기술을 혁신하는 것은 정부의 일이 아니다

에스토니아 대통령이 말하는 ‘디지털 국가 혁신’

Leah Jang
해시드 팀 블로그
13 min readOct 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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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발전한다. 정부는 기술의 발전을 지원하고 장려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부의 책임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책임은 법적인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 케르스티 칼률라이드, 에스토니아 대통령

지난 10일, 대한민국 국회를 예방한 에스토니아의 케르스티 칼률라이드(Kersti Kaljulaid) 대통령이 ‘디지털 국가 혁신’을 주제로 연설했다. 이날 해시드 김서준 대표가 사회를 맡아 행사를 진행하고, 지정토론자로 나서 칼률라이드 대통령과 직접 문답을 주고받기도 했다.

칼률라이드 대통령에게 질의하고 있는 해시드 김서준 대표.

130만 명 인구에 유니콘 기업이 4개나 있는 나라[1], 세금을 납부하는 데 5분 밖에 걸리지 않는 나라의 비결은 무엇일까. 칼률라이드 대통령의 연설을 인용해 디지털 혁신의 과정과,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많은 이들이 에스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전자시민권 이레지던시(e-Residency) 덕분에 에스토니아를 들어봤을 것이다. 간단한 절차만 거치면 누구나 쉽게 신청할 수 있으며, 서울시 중구에서 카드를 직접 수령할 수도 있다. 전자시민권으로 법인을 설립하면 EU의 금융, 마케팅, 결제 시스템 등 비즈니스에 필요한 서비스들을 이용할 수 있다. 칼률라이드 대통령은 “에스토니아에서 결혼과 부동산 구매, 이 두 가지 서비스를 제외한 모든 나머지 공공 서비스는 24시간 온라인으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3국 중 하나로, 인구 130만 명, 면적은 한국의 반 정도다. 사진: 구글 지도.

에스토니아는 어떻게 이런 전자 정부를 구축하게 된 것일까.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에스토니아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1991년 노래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IMF와 세계은행에게 경제를 비롯한 공공 부문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 그들은 나라를 생산 공장으로 만들어 저임금 노동력을 수출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늦게 출발한 여느 국가들처럼 말이다.

“그래서는 결코 선진국가를 따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칼률라이드 대통령은 말한다. 에스토니아 총리실 자문관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정부가 디지털 솔루션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민간 기업은 디지털 DB(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이 때 정부는 기술 분야에서 창의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민간에서 배워 진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리고 IMF가 권장하던 전형적인 경제 모델을 채택하지 않고 몇 년이 흐르자, 다른 국가들에서 에스토니아의 모델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자신분증에 담긴 ‘정부의 의무’

정부에서 디지털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 즉 전자시민권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는 정부의 인터넷 서비스가 도입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공공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대개는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시키기 위해 시간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 운영체제와 인터넷 브라우저를 맞추고 무수한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

맥 OS를 쓰는 나는 인터넷으로 정부 서비스를 사용하느니 차라리 시간 맞춰 관공서에 방문하는 걸 선호한다. 사진: 민원24 화면.

반면 에스토니아는 ‘전자신분증’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온라인 상에서의 공공 서비스, 거래를 비롯한 신원 확인이 필요한 작업들을 편리하게 만들어 냈다. 2001년에 X-로드라고 불리는 탈중앙집권적 디지털 행정 통합 시스템을 출범했고, 2002년에는 전자서명을, 2005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자투표를 도입했다. 2010년에는 전자처방전을 만들어 전자신분증만 있으면 어느 약국에서든 조제가 가능하게 했다[2]. 칼률라이드 대통령은 디지털 시대에서 정부가 디지털 신원 확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에스토니아가 전자신분증을 만들 당시는 민간 부문이 여러 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리는 민간 기업들을 지원했다. 그러면서도 안전하게 모든 것이 실행되길 원했다. 온라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와 대화하고 거래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만약 기술이 미치고 있는 사회적인 영향을 정부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간과해 버린다면, 시민들과 민간 부분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페이스북이나 구글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기업들은 사이버에서의 아이디(신원)을 제공하고, 시장 점유율을 가져가고 있다. 민간 기업들이 기술을 이용해서 현실 세계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고, 대담하게 위험을 감당하면서 디지털 세상에서의 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비판하는 정부 관계자들은 정작 자신들의 의무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하는 것 같다. 시민들에게는 국가에서 보증하는 인터넷 여권이 필요하다. 정부는 자신들이 하고 있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이제 정부가 나서서 전 세계적으로 작동하는 아이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일자리’ 개념의 변화, 물리적 제약을 제거하다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하는 어느 곳에서든 정착하고 일을 할 수 있다. 특히 에스토니아 같은 EU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칼률라이드 대통령은 바뀐 ‘일자리’ 개념에 대응해, 어떻게 하면 모든 국민들의 투표권 등 헌법적 권리가 보장될 수 있겠는지 물었다. “단순히 투표를 위해 일하고 있는 곳에서 귀국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을 초래한다. 에스토니아는 2005년 전자 투표를 도입했다. 타임스탬프를 이용하고, 믿을만한 보안 체계를 가졌다는 뜻이다.”

이어 “일자리는 더 이상 물리적 장소와 관련이 없고, 하는 업무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서 “1년 중 반은 한국에서 일하고, 겨울이 되면 따뜻한 지중해 국가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들에게 어떻게 정부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세제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고 말했다. “어디에 있든 사회 보장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직장 주소와 자택 주소에 기반해 세금을 징수하는 과거의 산업 시대는 지나갔다. 이 시대에 빠르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부유한 시민들은 이를 해결해주는 민간 서비스를 찾게 될 것이고, 부유하지 않은 시민들은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공공 서비스를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 정부는 실패한 것이다.”

에스토니아 대통령 케르스티 칼률라이드. 사진: Valda Kalnina/EPA

사회적 취약 계층과 영세업자에게 더 도움될 수 있어

이외에도 에스토니아에는 공공 시스템의 민주화를 고민한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올해 여름부터는 외국인이든 비거주자든 대부분의 도시에서 누구나 대중교통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동의 자유를 무한대로 보장하기 위함이다. 대중교통 요금을 이동의 자유에 대한 일종의 규제로 본 것이다. 당장은 무료화에 따른 보조금 예산이 몇 천 만 유로에 달하지만, 정부는 관광객의 증대로 인한 높은 부가가치 창출, 도시 거주민의 소비 진작, 지역 균형 발전을 내다보고 있다.

의료 기록도 모두 전자화되고 있다. 전자신분증에 처방전을 기록해 종이 처방전 없이도 약을 조제받을 수 있고, 엑스레이 등 검사 내용도 모두 전자신분증에 기록된다. 전자화된 병력은 응급 상황에도 활용될 수 있다. 앰뷸런스를 부르면 과거 병력과 현재의 증상을 매칭해 환자가 어떤 상황인지 보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해당 분야에 전문적인 병원으로 이송하는 식이다.

이외에도 에스토니아 정부는 올해 약 10만 명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 데이터를 수집한다는 목표를 갖고 게놈 분석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더 정확하고 과학적인 연구를 시행할 수 있으며, 의사들은 더 적합한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당장 500만 유로의 예산이 들더라도 앞으로 효용을 가져다줄 수 있으면 하자는 것이 에스토니아 정부의 태도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정부의 역할은 유전자 검사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모든 데이터는 분산된 DB에 보관되고, 동의 하에만 데이터가 교환된다[2].

칼률라이드 대통령은 지금까지 디지털 행정 통합 시스템으로 시민들이 1년에 4–5일 정도의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에스토니아 GDP의 2%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시스템을 관리개발하기 위해 GDP의 2%가 소요되었지만, 이렇게 한번 손익분기점을 지난 시스템은 앞으로의 투자 비용보다 가져다줄 수 있는 효용이 더 클 것이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공공 정책의 실행이 무엇보다 사회 취약 계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소득이 낮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일수록 시간을 내어 공공 기관에 방문하기 어렵다. 때에 따라서는 공공 서비스를 처리하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사회 서비스 이용 부담은 아이를 둔 여성들에게 해당한다. 하지만 24시간 열려 있는 공공 서비스로 일하는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세금 신고나 소득 공제를 신청할 수 있다. 장애인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이는 앞서 말한 “정부가 하지 않으면 부자들은 민간 서비스를 찾게 될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혜택을 미루게 될 것”이라는 칼률라이드 대통령의 말과도 맞닿아있다. 특히 구글과 아마존이 하고 있었던 일이, 디지털 신원부터 게놈 빅 데이터 수집에 이르는 에스토니아의 정책과 닮아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에스토니아는 다른 국가들이 아니라 공룡 기업들과 겨루고 있는 셈이다.

질의 응답 시간에는 에스토니아의 혁신 산업 조성에 대한 직접적인 예시도 들어볼 수 있었다. 해시드 김서준 대표가 “에스토니아가 새로운 혁신 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기존 산업 강자와의 마찰을 어떻게 극복해왔는지” 묻자 칼률라이드 대통령은 에스토니아의 차량 공유 서비스 택시파이(taxify)를 언급하며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것보다 자유시장의 원리에 최대한 맡기고, 정부는 새로운 서비스가 창출될수있는 법적 공간과 인프라를 조성해주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비슷한 서비스인 우버가 진출하는 도시마다 기존 택시 생태계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당국 등과 마찰을 빚고 있는 데에 비해, 택시파이는 진출하는 도시마다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기존 택시 영업을 하고 있는 운전사도 택시파이 플랫폼에서 운영할 수 있게 하는 식이다. 에스토니아 기업가 정신을 엿볼 수 있다[2].

우리 정부에게 남은 과제

5월부터 한국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의 군내 도입방안을 연구하고 있다[3]. 7월에는 국회의원회관에서 ‘축산산업에 블록체인 기술을 입히다’는 정책토론회도 진행했다. 소의 귀에 무선주파수인식 표를 붙여 데이터를 수집하고, 단계별 정보를 블록체인에 저장한다는 식이다[4]. 새로운 기술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이러한 접근은 낯설지 않다. 정부가 주도해서 기술을 발전시키겠다고 선언하고 막대한 재정 지원을 투입한다. 알파고가 크게 유행일 땐 ‘한국형 AI(인공지능)’이었고, 그 전후로 ‘빅데이터’, ‘드론’, ‘사물인터넷’에도 한 차례 정부의 바람이 들어갔다. 전형적인 ‘한국형 4차 산업혁명’ 접근법이다.

물론 기술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칼률라이드 대통령의 발언을 빌려 말하자면 “기술을 혁신하는 것은 정부의 일이 아니다”. 정부가 기술적인 발전을 지원하고 장려할 수는 있으나, 정부의 진정한 책임은 지역적 차원에서, 나아가 다자적 협력을 통한 국제적인 법적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다.

혁신 분야의 답답한 정부 규제를 향한 업계 종사자들의 불만은 블록체인만의 일이 아니다. 헬스케어에서도 그랬고, 자율주행차에서도 그랬다. 그래서일까. 이번 에스토니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유난히 혁신 분야 종사자들의 열렬한 환영과 공감을 받았다.

오는 11월에는 정부가 새로운 ICO 규제 방침을 밝힐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5] 이혜훈 국회 4차산업혁명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그래도 나쁜 규제는 그 규제에 맞춰 사업을 하고 대응할 수 있지만, 어떻게 규제할지 모르는 상황은 나쁜 규제보다 더 나쁘다고 한다”라고 말하며 국회와 정부의 기민한 대응을 요구했다.

새로운 물결에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은 비단 산업계와 투자자들이 준비를 갖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북유럽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가 던진 화두에 이제 대한민국 정부가 응답할 차례다.

“우리는 계속해서 에스토니아에 창의적이면서도 합법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제적인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에스토니아는 유엔 안보리의 비상임 이사국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우리가 유엔 안보리에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같은 작은 나라는 작은 목표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디지털 사회와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케르스티 칼률라이드, 에스토니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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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1] Hunt, E. (2018, June 29), Estonian president delights in country’s high proportion of unicorns. The Guardian. Retrieved from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8/jun/29/estonia-unicorns-president-kersti-kaljulaid-delight

[2] 박용범. (2018). 블록체인, 에스토니아처럼. 서울: 매경출판(주)

[3] 강진규. (2018, September 18). 국방부, 블록체인 도입 채비…11월까지 방안 마련. 더비체인. Retrieved from http://www.thebch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29

[4] 오세성. (2018, July 26). [현장+] 축산업계 블록체인 활용, 정부와 시장의 ‘동상이몽’. 한국경제. Retrieved from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7261037g

[5] 허준. (2018, October 23). 이혜훈 국회 4차 특위 위원장 “ICO 규제, 11월에 변화 있을 듯”. 파이낸셜뉴스. Retrieved from http://www.fnnews.com/news/20181023120129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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