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합의로 바라본 화폐의 역사

김경진
김경진
Aug 31, 2018 · 10 min read

지금 탈중앙화와 블록체인의 유명세는 암호화폐의 흥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 것은 반대로 탈중앙화와 블록체인이 화폐에 주는 의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1만년도 더 전에 물물교환을 통해 ‘경제’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암호화폐라는 실험을 시작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탈중앙화의 진짜 의미에 쓴 것처럼 탈중앙화를 분석할 때는 다루는 대상이 ‘사실에 대한 합의’인지 ‘결정에 대한 합의’인지 구분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화폐에서 사실합의는 내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또는 내가 누군가에게 얼마를 보냈는지에 대한 합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정합의는 화폐를 발행, 분배,사용하는 규칙에 대한 합의입니다. 나아가 사실합의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합의까지 포함합니다. 먼저 사실에 대한 합의 관점에서 화폐의 역사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사실합의 관점에서는 물리적 속성이 화폐를 구분하는 좋은 기준이 됩니다.

물질기반화폐: 실물화폐에서 지폐까지

최초의 화폐는 조개나 소금과 같은 실물화폐였습니다. 실물화폐는 소재 자체가 가치를 지니는 화폐를 뜻합니다. 이러한 실물화폐의 단점은 분명합니다. 저장과 거래가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경우에는 물에 닿기만 해도 용해되어 버리는데 이를 보관하거나 들고 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 금속화폐입니다. 금속은 대체로 보존성이 높고,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의 경우 단위 가격이 높아서 적은 양만 가지고도 큰 가치를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금속화폐도 실물화폐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만 편의상 구분하겠습니다. 금속화폐 이후에는 지폐가 등장합니다. 가치가 증가하면 무게도 증가해야 하는 금속화폐와 달리 지폐는 아무리 큰 액수라도 쉽게 들고다닐 수 있습니다.

물질기반 화폐의 최종진화 형태로 볼 수 있는 지폐

실물화폐, 금속화폐와 지폐는 모두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물질기반 화폐는 사실에 대한 합의 관점에서 탈중앙화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화폐를 누군가에게 줄 때, 그 거래 사실에 대해서 중개자 없이 양자만 합의를 하면 됩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물질이 동시에 여러명에게 가거나 사라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중지불이나 일방적인 거래취소가 발생할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발행하고 관리하는 화폐 또한 그것이 물리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사실합의 관점에서 탈중앙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화폐

물질기반화폐는 저장과 거래가 번거롭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한 것이 전자화폐입니다. 전자화폐는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형식의 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리적 실체가 없다는 속성때문에 저장하는데 금고나 창고가 필요하지 않고, 사용하는데 두툼한 지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전자화폐는 태생적으로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로 이루어진 돈이라면 누군가 이를 쉽게 복제하거나 변조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제가 만원짜리 지폐를 사진으로 찍어서 누군가에게 보냈을 때, 이를 송금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제가 한명에게만 이를 보냈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사람의 돈과 그 송금 기록을 중앙기관이 맡아서 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이 현대 전자화폐 시스템의 근간이 됩니다. 전자화폐는 그 편리성을 입증하여 이미 경제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은행에 맡겨두고, 거래에 사용할 때도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편리해보이는 전자화폐도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앙화의 효율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참여자에게 다수가 권한을 위임해야합니다. 사실합의만 위임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이상의 권한을 위임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독과점 형태의 경쟁구도가 형성되고, 사실합의 시스템의 비효율성이나 실패 위험성이 증가합니다. 잘 구성된 경쟁 시장에서는 비효율적인 참여자는 자연스럽게 도태됩니다. 하지만 한번 중앙기관이 힘을 얻기 시작하면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도태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여러 양상으로 드러납니다.

중앙화된 전자화폐 시스템의 일종인 신용카드

첫 번째 문제는 높은 수수료입니다. 중앙화된 중개기관은 신뢰의 댓가로서 많은 수수료를 취합니다. 소수의 신뢰기관이 독점이나 과점에 가까운 지위를 얻은 상황에서 수수료는 완전경쟁시장일 때 보다 높아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국내은행을 통해 해외계좌로 송금하는데 수수료는 대략 5만원 가까이 부과됩니다. 신용/체크카드의 경우에는 사용 건마다 작게는 1%에서 5%까지 수수료가 빠져나갑니다.

두 번째는 낙후된 시스템입니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 중앙화된 시스템은 보통 탈중앙화된 시스템 대비 효율적으로 설계하기 쉽지만, 독과점 구조에서는 비효율성이 발생해도 개선할 유인이 적습니다. 이러한 소수 중앙기관의 비효율성은 모든 참여자에게 악영향을 미칩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례는 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 네트워크입니다. SWIFT는 1973년에 구축된 국제 송금 전산시스템인데 40년이 넘도록 제대로 개선되지 않았고, 3일가까이 걸리는 해외 송금 지연시간의 주범으로 지적되어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블록체인이 이를 개선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세 번째는 낮은 자유도 입니다. 중앙화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나의 권한을 위임 한다는 것입니다. 내 권한을 위임한만큼 자유도가 줄어드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은행에 맡긴 돈은 소유자가 완전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외송금 시에 심사절차가 있으며, 은행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 송금이 불가능합니다. 또 은행의 영업시간이 아니면 송금이나 인출이 어렵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이유로 자유에 제약이 생기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단일지점 실패 위험성입니다. 금융기관의 허술한 운영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고, 외부의 영향이 크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한국 주요 카드사에서 2012년부터 여러차례 1억 400만 건이 넘는 개인정보가 유출되었으나 2014년 1월에 뒤늦게 밝혀진 사례가 있습니다. 아이핀을 관리하던 신용평가사의 직원이 고객 데이터를 팔았는데, 이 사례를 통해 카드사의 보안 허점이 줄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고객 데이터에는 이름, 주민등록 번호, 집 주소, 연봉 등의 정보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른 사례로는 2011년의 저축은행 영업 정지 사태가 있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부산저축은행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저축은행이었습니다. 예금의 절반인 4조원 이상을 무분별하게 리스크가 큰 사업들에 불법대출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2조원 이상의 분식회계를 통해 부실을 감추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고객들의 돈을 일정비율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말해왔으나, 실제로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2010년에 금융감독원과 감사원에서 감사를 했음에도 이러한 부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단일지점으로서의 중앙기관의 실패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지만,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 외부에 알려지기 전까지 그 비용을 인지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중앙기관의 실패가능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인류는 전자화폐라는 매우 편리한 수단을 발명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여러 측면에서 중앙화의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암호화폐: 분산원장 기반 화폐

전자화폐의 편의성을 가진 동시에, 중앙화의 비용까지 제거한 화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9년에 제시된 비트코인은 탈중앙화된 전자화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탄생한지 9년 동안 허가받지 않은 다수의 노드가 참여하는 분산원장 시스템으로도 이중지불이나 데이터변조를 막을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

탈중앙화된 화폐의 장점과 전자화폐의 장점을 합쳤으니 가장 진보된 화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비트코인은 전자화폐의 속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사실합의의 탈중앙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대신에 탈중앙화의 비용을 크게 발생시켰습니다.

널리 알려져있듯 비트코인은 강한 보안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비례하는 만큼의 전력을 소비합니다. 2018년 현재 비트코인은 전력 소비량 세계 40위인 오스트리아와 비슷한 수준의 전력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트코인은 초당 7건의 거래밖에 처리하지 못합니다. 그 이상으로 요청된 거래는 무한정 대기해야 할 수 있어서, 남들보다 높은 수수료를 내는 방식으로 우선권을 획득해야합니다. 비트코인의 송금 수수료가 비싼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재 비트코인 송금 수수료는 거래 건당 평균 1달러 이하이지만, 2017년 말에 거래가 많이 일어났을 때는 건당 평균 50달러를 웃돌기도 했었습니다.

높은 지연시간 또한 문제입니다. 처리용량에 여유가 있을 때도 블록에 거래가 포함되기 까지 5~10분정도 시간이 소요되며, 해당 블록이 충분한 확실성을 얻기 까지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또 비트코인은 해당 주소에 매핑되는 비밀키(개인키)를 지닌 사람에게 송금의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지만, 이 비밀키는 64자리에 달하는 임의 숫자/문자 조합으로 되어 있어 안전하게 보관하고 사용하는 것이 까다롭습니다.

분산원장 기반 화폐의 미래

이렇듯 비트코인은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 실생활에 적용되기에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수년간 연구를 해오고 있고, 유명 대학 교수들이나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이 뛰어들고 있지만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어보입니다. 여러 암호화폐 중 처리용량이나 처리속도 측면에서 가장 뒤떨어지는 비트코인은 점차 결제나 교환 수단보다는 가치의 저장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커지고 있기도 합니다.

암호화폐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가격 변동성은 ‘모든’ 분산원장 기반 화폐의 문제점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에 대한 합의에 더하여 결정에 대한 합의까지 탈중앙화한 화폐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연방준비제도가 미국 달러를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로 발행한다고 하면 기존의 미국 달러와 똑같은 방식으로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몇몇 국가에서는 법정 암호화폐를 발행하는 방향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법정화폐나 실물자산에 가격을 연동시키려고 하는 다양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 프로젝트들도 진행 중입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은 사실에 대한 합의를 탈중앙화 하는 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결정에 대한 합의 관점에서 화폐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알아보고, 암호화폐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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