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로서의 디지털, 완전한 디지털 국가를 꿈꾸다

Kiheon Shin
Heavenly Designer
Published in
8 min readAug 21, 2017

최초의 디지털 국가 E-에스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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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작은 국가인 에스토니아(1)는 가상 거주권이라는 개념 아래 ‘E-레지던시(E-Residency)’(2)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이미 1997년 이래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상용화를 마친 에스토니아 디지털 국가 시스템의 새로운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거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간과 신체를 전재로 하는 개념임에 분명한데, 여기에 가상이라는 개념이 합쳐진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단번에 머리에 떠올리기 쉽지 않은 이 개념은 사실상 에스토니아가 제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탈국가적 신분이자 권리이다.

이러한 가상 거주권은 에스토니아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저렴한 비용과 손쉬운 절차를 통해 발급(3) 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국적이나 거주지에 대한 발급 조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 거주권을 기반으로 가상의 에스토니아 내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 또한 가능해진다. 하나의 예로 영국이 블랙시트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 영국 내 기업들은 유럽 연합에 남아있기 위한 우회적 수단으로 에스토니아에 기업을 설립하는 방법을 택했다.

E-레지던시에 기반한 비즈니스의 접근성을 높여주는 Holvi

에스토니아는 가상 거주권의 확산을 통해 현재 130만명의 인구를 2025년까지 1000만명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물론 여기서의 증가하는 인구는 대부분 가상 거주권에 의한 것이다. 적은 인구로 인한 시장의 한계를 전에 없던 방식으로 해결해나가는 에스토니아의 접근은 새로운을 넘어서 파격적이기까지하다.

에스토니아 데이터 대사관에 보관될 데이터 항목들

여기에 한발자국 더 나아가서 올해에는 또 다른 유럽 국가인 룩셈부르크에 최초의 ‘데이터 대사관(Data Embassy)’을 설립할 계획에 있다. 일종의 클라우드 컴퓨팅 시스템인 데이터 대사관은 에스토니아의 높은 디지털 의존도에 대한 보완책 중 하나이다. 실제로 2007년 외부의 강력한 공격에 의해 전 국가적 어려움을 겪었던 에스토니아에게 이것은 단순한 실험을 넘어선 실질적인 필요인 것이다. 최초는 늘 낯설고 두렵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변화는 많은 것을 당연하게 만든다. 에스토니아의 노력의 결과물은 더 많은 국가로 확산되며 점차 우리에게 당연한 개념으로 인식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블록체인 실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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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국가로서의 에스토니아는 2008년부터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실험해왔고, 현재는 기존 서비스의 일부 기술을 블록체인으로 대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용에 있어서는 아직 크고 작은 한계를 보이고 있는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을 국가라는 단위에서, 그것도 국가 구성원들의 모든 일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도입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에스토니아라는 국가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블록체인 실험실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다.

디지털 국가를 구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외부의 수많은 위협들로부터 국가라는 시스템,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방대한 데이터의 안전을 보장해야한다는 점이다. 블록체인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이다. 그동안 에스토니아가 쌓아올린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노하우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있다. 심지어 미국 국방성(US Department of Defense)을 비롯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유럽 연합 정보 시스템(European Union Information System) 등이 에스토니아의 노하우을 바탕으로 자체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을 정도이다. 블록체인의 도입에 대한 그들의 자긍심 또한 상당하다. 이와 관련하여 에스토니아의 전 대통령 토마스 헨드릭 일베스(Toomas Hendrik Ilves)는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에스토니아는 이제 블록체인 국가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블록체인을 통한 자산의 탈국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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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국가로서의 여러 서비스 가운데서도 특별히 ‘E-랜드(E-Land)’에 주목하게 된다. 부동산 정보의 디지털화는 부동산이라는 비교적 큰 단위의 자산을 보다 유동적이고 빈번하게 거래할 수 있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E-랜드는 에스토니아 내 모든 부동산 정보를 디지털화 함으로써 완전한 투명성과 소유권을 보장하고 동시에 기존의 부동산 거래에 소요되던 최대 3개월의 시간을 최소 8일로 단축한다.

Propy의 블록체인 기반 거래 구조

여기에 블록체인을 결합함으로써 얻어지는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Propy’나 ‘Rex’와 같은 블록체인 기반의 서비스는 기존 부동산 거래의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킨다. 기존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던 주체들은 스마트 계약(4)이라는 블록체인 내부의 기능에 의해 P2P(Peer to Peer) 방식의 거래에 의해 대체된다. 그 결과 부동산은 개인과 개인 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보다 실질적인 가치로 평가되고 거래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블록체인을 통한 금융의 탈국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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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에스토니아 내 설립을 앞두고 있는 블록체인 기반의 은행인 ‘폴리비우스(Polybius)’는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탈국가적 은행이다. 폴리비우스는 지난 7월 블록체인 기반의 ICO(Initial Coin Offering)라는 방식을 통해 목표액 투자를 유치(5)하였고 이를 토대로 최초의 개발 로드맵에 따라 새로운 모습의 은행으로서의 기능들을 구현해나가고 있다. 주목할 점은 기존의 은행과 달리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국적이나 거주지에 관계 없이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에스토니아 내에서 은행으로서의 인가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폴리비우스의 계좌를 통해 사실상 모든 EU에 속한 모든 국가에서 금융 활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회의 중심에는 더 이상 기존의 국가나 은행의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다.

ICO 단계에서 설정된 투자 금액 별 폴리비우스의 개발 로드맵

공기로서의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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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국적, 영토와 그것의 경계, 그리고 나아가서는 기업, 금융, 주거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우리를 포박하고 있던 묵직한 사슬은 이제 디지털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고 의식되지도 않은 공기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디지털화는 이것들이 마주하는 모든 접점 가운데 빠르게 연결되고 쉽게 결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공할만한 파급력을 가진다. 이러한 파급력은 기존의 각각의 주체들이 범접할 수 없는 디지털 만의 고유한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공기와 같이 우리의 일상을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결코 우리는 그것을 막아설 수 없고 붙잡아둘 수 없다. 현재, 그리고 미래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몸 속 깊숙히 그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 뿐일지도 모른다.

미주

(1) 인구 130만 명의 유럽의 작은 국가인 에스토니아는 가장 디지털적이며 가장 미래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카이프(Skype)도 에스토니아로부터 시작한 서비스 중 하나이다.

(2) 통계에 따르면 현재 138 개국의 22,000명 이상이 E-레지던시에 등록되었으며 1,600개 이상의 기업이 그것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이들은 E-레지던시가 가져다 주는 기회에 대한 대가로 에스토니아에 막대한 재정적 기여를 하고 있다.

(3) E-레지던시는 온라인을 통해 100유로의 비용으로 전 세계 어디서나 신청 가능하다. 또한 그것을 획득한 사람은 온라인 상에서 법인 설립을 비롯한 각종 은행 거래 등의 업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다. 흥미로운 기록으로는 2009년 당시 새로운 법인 설립에 필요한 시간에 단 18분이 소요됨으로써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4) 스마트 계약은 블록체인 내 거래 상에 누구나 볼 수 있는 형태로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명시된 조건에 따라 계약이 성사되거나, 무효화된다. 이 과정에서의 별도의 제3의 중재자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계약 방식보다 더 높은 보안과 무결성을 가질 수 있다.

(5) 폴리비우스의 ICO는 한달여의 기간 동안 전 세계의 참가자 26,814명으로부터 최대 목표금액으로 설정한 $25,000,000을 훌쩍 넘은 $38,000,000를 확보하였으며, 현재는 계획된 로드맵에 따라 에스토니아 내에 은행을 설립하기 위한 과정을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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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heon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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