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ganghee
heeheewu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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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min readOct 3, 2023

리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훌륭한 리더는 어떤 가정환경 있었고 성장배경이 어떻게 될까? 리더의 자질은 무엇일까? 항상 궁금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리더를 보고 살아왔다. 학창시절 반장에서 선생님, 학생회장, 동아리 장, 팀장, 파트장, 국회의원, 대통령 등 수많은 조직에서 리더를 보았다. 어떤 리더가 좋은 리더일까? 나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이 고민에서 나는 도서관에서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이라는 책을 빌려 읽고 고민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1. 야망과 리더십의 자각

링컨의 아버지는 글을 쓰지도 못했지만 재치가 있고 흉내 내는 능력도 탁월했다. 링컨은 그의 아버지를 보고 자라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재미있게 또 재치 있고 지혜롭게 이야기 했다. 어린 링컨은 단순하게 외우는 능력은 출중하지 않았지만 추론력과 이해력은 남달랐다. 또 호기심도 굉장해서 듣고 읽은 것이나 새롭게 배운 것의 의미를 끝까지 알아내려는 욕심은 억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링컨은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에 반드시 필요한 자질 — 자신의 모든 능력을 완전히 개발하겠다는 의욕과 의지-을 드러냈다. 친구들과 노는 동안에도 책을 또 읽고 또 읽었다. 천부적인 유머 감각이 있어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주역이였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친구들의 반박을 무릅쓰며 다른 의견을 거침없이 제기하는 반골이기도 했다.
20대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마음속에 형성된 리더십이란 개념에 따르면, 리더는 자유와 평등과 기회에 대한 추종자들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링컨은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에서 시작했지만 거의 6년 만에 주의회에서 존경 받는 리더의 반영에 올라섰다. 정치 초년병이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엄청나게 성공한 게 분명하지만, 미국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고려하면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아버지 덕분에 폭넓게 독서하고, 쉽게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어떤 특정한 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 그 책은 마법처럼 그의 앞에 놓였다. 특히 아버지는 이야기와 우화와 격언을 통해 의무와 윤리와 도덕이라는 원칙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썼다.
루스벨트는 어떤 분야에서나 리더는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즉,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리더는 산문 작가와 시인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작품에서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알아낼 수 있다.
링컨과 루스벨트 모두에게 책은 “최고의 동반자"였다. 평생 동안 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방문객을 만나는 틈틈이,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 잠깐의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독서에 할애했다.
특권을 누리지 못할 때 야망이 뜨겁게 불타오를 수 있듯, 특권을 누리는 삶은 야망이 커가는 걸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어도어의 경우는 달랐다. 욕심스러운 독서부터 루스벨트 자연사 박물관까지, 또 엄격한 운동 프로그램부터 모든 교육 기관에서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해 거둔 발군의 성적까지, 거의 모든 활동에서 시어도어는 최고가 되려는 욕망을 가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허드슨 강변의 사유지, 스프링우드에서 형제 자매 없이 자란 때문인지, 에이브러햄과 시어도어에 비하면 대기만성형이었다. 에이브러햄과 시어도어는 젊었을 때부터 성공하겠다는 뜨거운 야망을 명확히 드러내 보였지만, 프랭클린은 삶의 과정에서 많은 것이 그랬듯 성공을 향한 열망도 감추었다. 또 남다른 적극성이나 집중력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평범한 학생으로 컬럼비아 법학 대학원에 다니 월스트리트의 보수적인 법률 회사에 취직하며 특권계급의 자녀로서 예측된 길을 걸었다. 그러다 더치스 카운티의 민주당 실력자, 존 맥과 에드워드 퍼킨스에게 승리가 보장된 민주당 후보로 주의원에 출마하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프랭클린에게 리더의 자질이 있다고 간파해서 그가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맥과 퍼킨스의 관심사는 루스벨트라는 이름이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갖는 영향력에 있었다. 프랭클린의 아버지인 세라 루스벨트라면 막대한 재산으로 아들의 선거 비용을 부담할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금고를 채우는 데도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프랭클린은 선거구에서 시간을 보내며 본연의 온화함과 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군중들과 쉽게 어울렸고 격정적으로 악수를 나누었으며, 어디에서나 친구를 만들었다. 기질이 성공의 핵심이라면, 프랭클린의 어린 시절 잔잔한 강과 큰 저택만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분위기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이 기질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요컨대 프랭클린의 성격은 따뜻한 환경에서 형성됐다.

린든 존슨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정치적 야심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가 현관 앞 목제 흔들의자에 앉아 서너 명의 정치 동료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저녁이면, 린든은 현관문 뒤 어둠에 숨어 주의원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린든은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역동적인 어법을 좋아했고,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깊은 지식에 감탄했다. 린든 존슨은 평생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어머니는 그가 바라는 것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즉 그가 빈둥대며 바이올린과 춤 공부를 게을리하면 그를 향한 사랑과 애정을 거두어들였다. 훗날 존슨은 친구와 동료, 보좌관을 대할때 이와 유사한 패턴을 보였다. 존슨은 관용과 사랑의 대가로 완전한 충성과 최고의 업적을 기대했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배신으로 인식하고 사랑과 배려를 거두어들였다. 그런 행동 패턴이 너무도 뚜렸해서 ‘존슨의 냉대'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존슨은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걸 싫어해 영화관이나 연극장에 가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야구장에서도 이닝 사이에, 심지어 투수가 투구하는 사이에도 정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어렸을 때 누리지 못한 한결같은 사랑과 애정을 승리와 성공이 어떻게든 보상해주는 것처럼, 존슨은 평생 이렇게 강박적으로 일했다.

2. 역경과 성장

링컨은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난 것을 무엇보다 괴로워했다. 그는 주하원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인구밀도가 낮고 가난한 지역도 번영할 수 있도록 편안한 도로와 항해할 수 있는 수로를 건설하는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었다. 그는 그 공약을 이루어 내지 못했다. 오히려 주민들에게 걷어주려던 부담이 늘어나고 말았다. 또한 메리 토드와 약혼을 취소하기로 결정하면서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주의회를 떠난 뒤, 그는 그 지역의 유력한 변호사였던 스티븐 로건과 새로운 파트너 쉽을 맺게 된다. 로건은 링컨의 말하는 능력과 배심원을 다루는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로건과 돈독한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마침내 링컨은 남부럽잖은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일리노이주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무기력증에 빠졌던 링컨의 정치적 야망도 되살아났다. 초선 하원의원이 된 링컨은 휘그당 후보이던 전쟁영웅 재커리 테일러를 위해 하원에서 연설한 링컨은 사려 깊으면서도 유머러스한 연설로 휘그당 동료 의원들과 기자들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다. 테일러가 1848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뒤 중요한 직책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링컨은 국유지 관리국 국장에 지명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신이 탐내던 직책에서 탈락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출세하겠다는 희망을 버렸다. 링컨이 하원의원으로 있었던 2년은 실패로 많이 평가되었다.
명성이 높아졌지만 링컨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개발을 위한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똑같이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했다. 진정으로 상대와 공감하며 조금의 꾸밈도 없이 모두를 다정하게 대했다.
1858년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뒤 대통령에 당선된다. 링컨의 당선 승리 요인은 그의 남다른 리더십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는 능력, 자신의 판단력과 직관력에 대한 확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근면함, 웅변 능력, 차분한 본성을 버리지 않았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대의를 꺾지도 않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장티푸스로 어머니를 잃고 12시간이 지나지 않아 급성 신장병으로 아내도 잃게 되었다. 전당대회에도 실패하자 서부 경계지 배드랜드 목장에서 살기로 한다. 부인이 죽고 나서 몇 주 동안 탈진할 지경까지 일에 몰두했듯이 루스벨트는 배드랜드에서도 노련한 카우보이에게도 위험하고 힘든 일을 자처하며 자신을 가차없이 몰아붙였다. 흥분과 두려움을 통해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을 되찾으려는 듯한 안간힘으로 보였다. 서부로 피신하고 2년이 지난 1886년 여름, 루스벨트는 다시 정계로 복귀할 준비를 끝냈다. 루스벨트는 장기적인 계산을 버리고, 어떤 직책이든 기회가 주어지면 그 직책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혼신을 다해 일했다. 루스벨트는 인사위원직을 거쳐 경찰청장, 해군성 장관의 차관보로 임명이 되었다. 이후 스페인 전쟁에서 군 지휘관으로 활약을 인정받아 올버니 주지사로 임명받게 된다. 하지만 껄끄럽게 봤던 공화당원들은 허울뿐인 부통령직을 루스벨트에 제안하였다. 그 시기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 되고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된다.
루스벨트의 리더쉽은 실제로 일련의 단순한 격언과 금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통제력을 강화하라. 어디에 있더라도 모두에게 물어라. 직접 돌아다니며 관리하라. 각 조직의 기본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라. 공격을 받으면 반격하라. 자신의 주장을 꿋꿋하게 고수하라. 정치적 자산을 이용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라. 당신이 추진하는 일이 방해받거나 중단되면 해결책을 찾아라.’

1921년 8월 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휴양지 캄포벨로에서 잠이 깼을 때 등이 아팠고 이상하게도 기력이 떨어진 기분이였다. 48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비 증상이 팔다리를 넘어 발가락, 등과 방과 항문의 괄약근까지 퍼졌다. 척수성 소아마비였다. 기본적인 신체 기능도 해낼 수 없었다. 프랭클린은 낙천적인 기질, 즉 어떤 상황에서나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는 성향 덕분에 루스벨트는 그런 충격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동 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시도하고 실험해보았다. 그리고 다 쓰러져가던 리조트를 선구적인 재활 센터로 개조하였다. 192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엘스미스가 루스벨트에게 뉴욕 주시사로 출마하라고 제안했다. 뉴욕 주지사가 된 루스벨트는 이후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1941년 연방 상원의원에 낙마한 린든 존슨은 패배의 충격을 받았다. 이를 자신의 가치에 대한 국민의 심판으로 받아드렸다. 좌절해 있던 존슨에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하원의원직을 권유하여 하원의원으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존슨에게 하원의원은 맞지 않았다. 2년 밖에 근무기간이 안되였다. 그리고 연공 서열제 때문에 유능한 직원도 체념한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제도가 있었다. 존슨의 기력 상실과 일에 대한 의욕 약화는 직원들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7년을 하원의원으로 보내고 마침내 상원의원에 들어가게 된다. 존슨은 당을 운영하는 리더가 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원내총무를 지나 당대표가 된다. 이후 존 F 케네디의 부통령이되고 그가 암살되어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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