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록에 대한 고찰 — 제 2, 3부 (MolochDAO의 Moloch이란?)

Clara Ex Machina
Holy Crypto
Published in
20 min readJan 21, 2023

원문은 2014년 7월 30일에 게시되었습니다.

1부 먼저 읽고 오시길 추천드립니다.

II.

기본 원리는 위에 언급한 다극(多極)의 함정을 아우릅니다. X를 최적화하는 일부 경쟁에서는 X의 향상 혹은 증가를 위해 다른 가치를 기꺼이 버릴 기회가 찾아오곤 합니다. 그 기회를 취하는 자만이 번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취하지 않는 자들은 멸종하게 되죠. 결국, 모든 이들의 상대적 지위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지만, 절대적 지위는 이전보다 악화되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고 맙니다. 이 과정은 그렇게 ‘교환’될 수 있는 모든 가치들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반복됩니다. 인간의 독창성이 더이상 상황을 악화시킬래야 시킬 수 없을 때까지 말입니다.

충분히 치열한 경쟁(1~10까지의 예시 참조) 상황에서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개인들은 모두 멸종하거나 도태되고 맙니다. 계속해서 예술을 향유하던 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모든 이들이 ‘생존’으로 축소되고 마는 악명 높은 맬서스 함정입니다.

경쟁이 비교적 덜 충분한 (11~14까지의 예시 참조) 상황에서는 최적화에 실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과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연구저널이나, 함께 협력하여 기업 복지를 철폐하지 못하는 입법 관계자들을 기억해보십시오. 이는 꼭 ‘생존’으로 축소되는 것까진 아닐지라도 그들이 자유의지를 상실하는 이상한 현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모든 하찮은 작가나 철학자들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유토피아는 정당한 편입니다. 사실, 정반대인 두 유토피아가 모두 우리의 세계보다 더 좋게 들린다는 것은 상당히 유망한 일일지 모릅니다.

길가던 사람 아무나 지목해도 그가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나은 이론적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그 일에 실패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들이 구상한 유토피아는 어려운 문제를 감추고 있거나, 실제로 실행될 경우 10분 안에 몰락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유토피아들의 예시를 몇 가지 들어보려고 합니다.

  • 정부가 기업 복지에 예산을 많이 쓰지 않는 유토피아
  • 모든 나라의 군대가 현재보다 절반으로 감축되고, 이를 통해 아껴진 예산은 모두 인프라를 위한 예산으로 배정되는 유토피아
  • 모든 병원에서 같은 전자 의료 기록 시스템을 사용하거나, 혹은 최소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의료 기록 시스템을 사용하여 의사들이 지난주에 당신이 만난 다른 병원의 의사가 어떤 처방을 내렸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유토피아. 이 경우 당신은 똑같은 검진을 다시 하기 위해 $5000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유토피아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이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토피아가 실제로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어서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저 또한 방금 이러한 생각들을 즉흥적으로 해냈지만 이것이 결코 참신하거나 세상을 바꿀 위대한 무엇인가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실온 온도 (화씨로는 68~72) 이상의 IQ를 가진 사람이라면 유토피아를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 체제가 유토피아가 아닌 것은 사람이 그것을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이 중력을 거르스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를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건조한 지형에서 앞으로 강이 어떤 모습으로 형성될지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인센티브’를 따른다는 사실을 전제로 삼으면 어느 문명의 각종 제도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 형세가 아름다움이나 항해를 위해 설계 된다기보단 무작위로 결정된 지형의 인공물에 더 가까운 것처럼, 문명의 제도는 번영이나 정의를 위해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결정된 초기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인공물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형을 고르게 다듬고 운하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더 나은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인센티브라는 지형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들에게 어떠한 동기(인센티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있는 일은 아니죠. 결과적으로, 매우 이상한 곳에서 거친 지류와 급류가 형성되게 됩니다.

지겨운 게임이론 얘기들은 여기서 접어두고, 이제 제가 살면서 해본 경험중 가장 신비로운 것에 대한 얘기로 넘어갈까 합니다.

신비한 경험들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 일은 라스베가스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라스베가스의 어느 한 빌딩의 꼭대기에 서서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도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한번도 라스베가스에 방문한 적이 없었으므로, 상당히 인상깊은 광경이라 생각하고 있었죠. 온갖 이상하고 아름다운 고층 건물들과 조명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에, 아주 분명하게 떠오르는 생각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런 멋진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인류는 참 대단하구나.

그러나 이런 것을 진짜로 만들어버렸다니 참 부끄러운 일이다.

알비노 호랑이들로 가득찬 베니스, 파리, 로마, 이집트, 그리고 카멜롯의 거대한 40층짜리 실내 모형 건물들을, 그것도 북미에서 가장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에 나란히 짓는 것ㅡ.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해야만 이것이 우리 문명의 제한된 자원들을 분별있게 사용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 순간 제겐 어쩌면 지구상에 라스베가스의 존재를 정당화할만한 철학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잉 자본주의를 정당화할 때마다 제가 즐겨 써먹곤 하는 객관주의(Objectivism)조차도 적어도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만든다는 신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차 없이 살던 사람들이 차를 갖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했다는 점에서 고결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라스베가스는 그렇다면 대체 어떠한 효용이 있었던 걸까요? 수많은 얼간이들에게 공짜 돈을 불릴 기회라며 꿈을 불어넣고는 오히려 등만 쳐먹는 도시가 말입니다.

라스베가스의 존재의 이유는 문명을 쾌락적으로 최적화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파민성 보상 회로(dopminergic reward circuit)의 특징과 불균등한 규제 환경의 미세 구조, 그리고 쉘링 포인트들(게임 이론에서 서로 간의 소통이 없는 상황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기본값으로 선택하는 지점, 그리고 이러한 지점은 한 곳으로 주로 집중된다는 이론) 때문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여 (신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계획가는 “흠, 도파민성 보상 회로에선 약간 부정적인 위험-이익 비율을 가진 특정 작업들이 약간 긍정적인 위험-이익 비율을 가진 감정적 가치를 갖는 특징을 보이는군. 그렇다면 이를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 세계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이 만들어내는 ‘인센티브’를 따르며,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사막 한가운데에 알비노 호랑이로 가득찬 고대 로마의 40층짜리 모형 건물을 실내에 짓자! 그럼 이런 건물을 짓지 않은 사람들보다 좀더 부유해질 수 있겠지!”

첫 비를 맞기도 전에 강의 원류(源流)가 이미 지형으로 어느 정도 정해져 있듯, 카이사르의 궁(Caesar’s Palace; 라스베가스의 호텔이자 카지노)의 등장 또한 신경생물학, 경제학, 그리고 규제 체제에 이미 잠재적으로 예고되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건설한 기업가는 보이지 않는 선들 사이를 콘크리트로 메운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겠죠.

우리는 우리의 놀라운 기술적, 그리고 인지적 에너지와 인류의 출중함을, 잘 발달되지 않은 세포 수용체와 눈먼 경제학에 의해 탄생한 이론들을 그저 죽 읊어대는 데에 낭비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마치 어느 바보의 명령을 따르는 신들처럼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신을 보기도 합니다. 저는 라스베가스에서, 몰록을 보았습니다.

몰록의 마음은 순전히 기계로 만들어져 있으며! 몰록의 피에는 돈이 흐르며!

몰록의 영혼은 전기와 은행이다! 몰록의 긴 거리에는 무한한 여호와처럼 고층 빌딩이 서있다!

몰록이여! 몰록이여! 로봇 아파트와 보이지 않는 교외! 뼈로 가득한 국고! 눈이 먼 자본! 악마와도 같은 산업! 유령의 나라!

…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성기들!

III.

디스코디아 외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시간은 강처럼 흐른다. 즉, 이는 내리막길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내리막길로 향하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바다에 도착하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이 무작위한 우스갯소리를 100% 말 그대로 받아들여보고 이것이 어떤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는지 한번 알아봅시다.

방금 전 우리는 인센티브의 흐름을 강의 흐름에 비유했습니다. 여기서 내리막길 궤적은 적절한 묘사로 보입니다. 더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 유용한 가치를 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할 때마다 함정이 발동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경쟁력은 어느 순간 모두가 이를 갖게 되면 더이상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포기한 가치는 영원히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정 실패의 모든 걸음은 당신의 삶을 순조롭게 악화시키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태 ‘바다’에 도달한 적도 없거니와, 꽤나 자주 오르막길로 전환되기도 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생존 수준으로 돌아올 때까지 상황이 계속해서 악화되지만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여기에 나쁜 이유가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과잉 자원, 2) 물리적/신체적 한계, 3) 효용 극대화가 바로 그것에며, 여기에 좋은 이유인 4) 조정(coordination)이라는 이유가 하나 더 있을 것입니다.

1. 과잉 자원. 깊은 바다는 빛도 없고 자원조차 열악한 끔찍한 곳입니다. 또한 징그럽고 추한 생물들이 서로에게 기생하거나 서로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고래의 사체가 바닥으로 가라앉는데요. 이는 심해 생물들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먹잇감이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잠시동안 심해 생물들은 기적적인 과잉 식량의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고래의 사체를 처음으로 발견한 몇몇 종들은 마치 왕의 식사처럼 거하게 이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생물들이 이 사체를 발견할수록 사체에서 빨리 번식하는 동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고래는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결국 모든 이들은 다시 맬서스 함정으로 돌아가야만 하게 됩니다.

(고래에 대한 무시무시한 비유의 출처는 Slate Star Codex로, 2014년 6월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예술을 포기하고 동족 포식을 시작한 쥐 그룹이 갑자기 훨씬 더 수용력이 높은 새로운 무서도(無鼠島)에 도착하게 된 것과 비슷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한 번 평화로운 생을 살며 예술적 걸작을 창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고래 추락의 시대 (=과잉 자원의 시대), 초과 적재 능력의 시대, 멜서스 함정에서 혼자만 갑자기 천 마일을 앞서 출발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시대입니다. 경제학자 Robin Hanson이 말한 것처럼, 꿈의 시대인 것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 우리를 가둘 만큼 자원이 부족하지 않은 한, 우리는 예술과 음악, 철학, 사랑과 같은 어리석고 1차원적 생존에 비최적화된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무자비한 살인 기계에게 패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물리적/신체적 한계.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예에게 식량을 주지 않거나 잠을 자지 못하게 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기로 결정한 노예 주인이 있다고 쳐봅시다. 조만간 노예의 생산성은 극심하게 감소할 것이며, 그는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이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 전략을 시도해본 끝에 노예 주인은 노예들이 잘 먹고, 잘 자고, 최소한의 휴식 시간을 가질 경우에 가장 많은 일을 끝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최대한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가정했을 때) 노예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동량을 조절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신체가 물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넘어설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닥으로의 경쟁(race to the bottom)”은 물리적/신체적 한계를 만나면 실제 도덕적 바닥까지 이르기 전에 멈춰버리게 됩니다.

노예 제도에 대해 연구한 역사가 John Moes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노예제도인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 지방의 노예제도가 사실 역사적 이상현상이며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과거의 노예제도 대다수는 (특히 고대 노예제도들) 노예들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좋은 대우와 환경을 제공하였으며, 때로는 자유까지 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경제학적 계산 끝에 나온 결정이었습니다. 노예들에게 일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법에는 당근과 채찍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채찍은 보통 좋지 않은 결과를 낳곤 하죠. 매분 매초 노예를 감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예의 근태를 평가하는 기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노예들에게 단순히 목화를 따는 일 이상으로 복잡한 업무를 맡기고 싶을 경우 이들을 모니터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단지 ‘노예화’되었을 뿐인 철학자들로부터 어떻게 수익을 낼 수 있을까요? 그가 선(善)의 이론을 토해낼 때까지 열심히 채찍질을 한 뒤 그 내용을 책으로 써서 판매하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이 문제에 대한 고대의 해결책은 (그리고 아마도 이는 프나글(Fnargl; 지구를 독재하게 된 외계인)에 영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노예들에게 원하는 어디로든 가서 무엇이든 가장 수익률이 좋은 것을 하도록 지원해준 뒤 그 수익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노예들은 당신의 작업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임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세계 곳곳으로 떠나 그가 올린 노동의 성과를 당신에게 보내는 방식으로 일하게 됩니다. 어쩌면 ‘자유’에 가격을 매기고 노예가 열심히 일을 해서 그 돈을 지불하면 자유를 얻게 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겠죠.

Moes는 더 나아가 이러한 체제들이 수익률이 높았던 덕분에 여러 가지 비슷한 시도들이 미국 남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단지, 이들이 채찍과 사슬에 얽매이게 된 이유가 경제적인 고려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정부 관계자들이 수익률은 높지만 백인 우월주의에는 알맞지 않은 “자유롭게 비즈니스에 참여하는 노예 제도”에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서로 다른 농장이 경쟁력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예를 더욱 잔혹하게 대하게 만드는 ‘바닥으로의 경쟁’이 특정 시점이 지나면 잔혹성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멈추게 됩니다.

또다른 예시를 들자면 현재 멜서스주의적 인구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여성이 9개월에 오직 한명(혹은 쌍둥이의 경우 예외)만을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가능한 한 자손을 많이 낳으라고 강요하는 종교 집단들이 실제로 자신을 계속해서 복사-붙여넣기 할 수 있었다면 우리 세상은 정말 이상한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종교와 관계 없이 세대마다 얻는 피해는 그러므로 최소화된다고 볼 수 있죠.

3. 효용 극대화. 우리는 가치를 보존하는 것 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의 관점에서 모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며, 후자를 위한 최적화 시도들이 전자를 파괴한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문명의 중요한 경쟁/최적화 과정의 대부분은 인간의 가치를 최적화하는 것입니다. 고객의 가치를 만족시키면 어느 정도 자본주의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유권자의 가치를 만족시키면 어느 정도 민주주의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에티오피아의 어느 커피 농장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커피콩을 재배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인들을 고용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농장은 현재 다른 농장들과 생과 사를 다투는 경쟁을 하고 있으며 최대한 많은 가치를 포기해서라도 남들보다 약간 앞설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커피콩의 질을 희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이를 구매하지 않을테니까요. 업무 환경이나 임금 또한 지나치게 희생할 순 없습니다. 에티오피아인들을 고용하는 데에 지장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경쟁 최적화 과정의 일부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지 않는 한) 직원과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호혜택적인 균형이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커피 농장주들이 수확량을 증가시키지만 고객들에게 질병을 안길 수 있는 독성 농약을 발견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고객들은 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황이며, 정부는 이에 대한 규제를 아직까지 설립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미국인들에게 판매”하는 것과 “미국인들의 가치를 충족시키는 것”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인들의 가치가 쉽게 포기될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혹은 에티오피아에 베이비 붐이 일어나 각 직무마다 다섯 명의 지원자가 경쟁을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쳐봅시다. 회사는 이제 임금을 낮출 수 있게 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신체적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잔혹한 근무 환경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직원을 구하는 것”과 “에티오피아인들의 가치를 만족시키는 것”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여 이제는 에티오피아인들의 가치를 희생시켜도 될 상황이 와버린 것입니다.

혹은 누군가가 커피콩을 쉽고 저렴하게 채취할 수 있는 로봇을 발명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럼 회사는 이제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하고 이들을 거리로 내몰 것입니다. 에티오피아인들을 통해 창출할 수 있는 효용성이 수익을 위해 더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점이 오면 그들의 고용유지를 위한 모든 노력이 회수되는 것이죠.

혹은 노동자들이나 고객들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어떤 새로운 가치가 있다고 쳐봅시다. 커피농장들이 알고보니 환경보호단체가 보호하려 하는 희귀 열대 조류의 서식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겁니다. 또는 그들이 농장에 고용하고 있는 부족과 다른 부족의 조상의 묘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 부족이 어떤 식으로든 합당한 존중의 표현을 받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커피 재배가 지구 온난화 현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될지도 모릅니다. 다만, 평균적인 미국인들이 커피를 구매하는 것, 그리고 평균적인 에티오피아인들이 농장에서 일하는 것, 이 두 가지를 가로막는 가치가 아닌 이상 이는 쉽게 희생될 가치들입니다.

제 요점은 “자본가들은 종종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자본가들은 욕심이 많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욕심이 많은 자본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그들은 그런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경쟁에서 패배하고야 마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체 당하는 치열한 경쟁 상황에 놓여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마르크스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러한 인과관계를 매우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이며, 그가 “자본가들은 욕심이 많다.”고 주장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의 예시처럼 민주주의 또한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으며 이것이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상으로 민주주의는 좋은 정책 결정과 관계있는 유권자의 행복을 위해 최적화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좋은 정책 결정과 당선 가능성 사이의 분열이 일어나는 순간 ‘좋은 정책 결정’이라는 가치는 쉽게 희생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형량(prison terms)은 수감자들과 이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하는 전체 사회에게 불공정한 결정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할 의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죄에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으며, 만약 그들이 석방을 도와준 어느 죄수가 다시 죄를 저지르는 순간 (그리고 통계학적으로 석방된 죄수들 중 한 명 정도는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국회의원의 정책 덕분에 석방된 어느 죄수가 5인 가족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가 재선을 바라는 것은 고사하고 발 뻗고 잠이나 잘 수 있을까요?”와 같은 말들이 방송에 떠돌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므로 교도소의 수감자 수를 줄이는 것이 좋은 정책일지라도 실제로 실행되기 위해선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옥, 몰록이여! 영혼 없는 감옥과 슬픔의 의회에 의한 죽음, 몰록이여! 몰록의 건물은 심판이며! 몰록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정부!)

“만족한 고객들”과 “만족한 시민들”을 최적화 과정의 결과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문명의 가장 큰 발전 중 하나이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다른 체제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몰록을 우리의 노예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 관계는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몰록이 행한 많은 일들이 사실 우리의 이익보다는 그의 이익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4. 조정.

함정의 반댓말은 정원입니다.

신의 관점에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이 합심하여 초유기체를 형성하면 초유기체가 쉽게, 기교있게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입니다. 각 주체 간의 경쟁 상황은 정원이 될 것이며, 한 명의 정원사가 모든 것의 위치를 지정해주고 그 패턴에 맞지 않는 요소들을 제거할 것입니다.

비자유주의자 FAQ에서 제가 지적했던 것처럼, 정부는 쉽게 물고기 양식장과 관련된 환경 오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죄수의 딜레마의 해결책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로 통치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마피아 보스가 배신한 죄수를 쏴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환경 오염을 행하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노동자에게 회사가 가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제재는 바로 그러한 행위에 대한 정부의 규제일 것입니다. 정부는 무력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하여 국가 내부의 무기 경쟁을 해결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효과적인 세계 정부가 등장한다면 국제 군사력 증강 경쟁은 비교적 빠르게 해결될 것이라고 감히 예측해봅니다.

정부의 가장 효과적인 요소 두 가지는 바로 법과 폭력입니다. 좀더 추상적으로는 합의와 집행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부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이 이 두 가지 요소를 갖고 있으며 함정을 피하기 위한 조정 메커니즘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서로 경쟁을 하곤 합니다. 수업의 성적이 곡선으로 분포하는 경우는 직접적 경쟁일 것이고, 대학 입시, 직장 등을 위한 경쟁은 간접적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쟁 모델 때문에 개개인의 학생들은 부정 행위를 저지를 강한 압력을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과 학교는 여기서 각종 규칙들을 설정하여 일종의 정부 역할을 하고, 이를 어기는 학생들에게 처벌을 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하는 사회적 구조 또한 일종의 정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부정 행위를 행하는 자들을 불신하고 기피한다면, 이는 내재적으로 부정 행위에 대한 규칙과 집행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윤리, 사람들 간의 합의, 산업 길드, 범죄 집단, 전통, 우정, 학교, 기업, 그리고 종교들은 모두 우리의 인센티브를 변화시켜 함정을 계속해서 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조정 제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도 인센티브를 받습니다. 여러 큰 집단들을 보시면 이들은 직업, 지위, 명성 등을 위해 경쟁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다른 주체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다극 함정에 면역일 필요도 없으며 실제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론적으로 정부는 기업과 시민들을 특정 함정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정부 자체가 빠질 수 있는 함정 또한 다양합니다.

미국은 여러 단계의 정부, 깰 수 없는 헌법, 서로 다른 부서/지사 간의 견제와 균형, 기타 여러 장치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또다른 방법을 씁니다. 한 명의 인물에게 이 모든 것을 담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군주제를 옹호하기 위해 (불공정한 방식으로) 악의적인 모습을 띤 방법입니다. 군주제는 인센티브가 없는 인센티브제입니다. 한 사람이 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되 그의 존재는 모든 체제의 밖 혹은 위에 존재합니다. 그는 모든 경쟁에서 영원히 이긴 셈이며 사실상 그 어떤 것을 위해서도 경쟁할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몰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며, 그의 인센티브가 미리 정해진 곳으로 흐르도록 조장할 각종 인센티브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제가 주장했던 개념인 “빛나는 정원”과 같은 몇 가지 매우 이론적인 케이스들을 제외하고는 군주제만이 이렇게 작동하는 유일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무작위 인센티브 구조를 따르는 대신 한 사람의 변덕에 좌지우지 되고 있습니다. 앞서 비판한 것처럼 카이사르의 궁 호텔과 카지노는 자원의 심각한 낭비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칼리굴라(로마제국의 제 3대 황제) 또한 완벽한, 자애로운, 합리적인 중앙 계획자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나침반의 자유주의-권위주의 축은 불화(discoordination)과 폭정(tyranny) 사이의 트레이드오프 관계입니다. 신의 관점을 가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조정할 수 있지만 그가 스탈린일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모든 중앙 권한으로부터 자유로운 체제를 설립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몰록이 고안할 수 있는 모든 어리석은 다극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자유주의자들과 군주주의자들은 각기 한쪽을 위한 설득력있는 주장을 갖고 있습니다만, 저는 여러분께서 대부분의 트레이드오프 관계와 같이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한 불쾌감을 억누르고 그것이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임을 인정하는 노력을 기하길 기대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