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하는 디자이너

코딩하는 디자이너, 글쓰는 디자이너..

코딩하는 디자이너, 글쓰는 디자이너처럼 ‘ㅇㅇ하는 디자이너’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 기세가 다소 누그러진 이 시점에 굳이 그 말들을 곱씹어 보는 이유는, 나 역시 그 유행의 대열에 함께 했던 무엇무엇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만 하기도 벅차다

참 바쁘다. 디자인도 해야 하고, 코딩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 한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하지 않으면 왠지 자연선택설 한 켠에 등장하는 진화에 실패한 개체가 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래서 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게 된다.

어떤 나방이 될 것인가?!!

한 가지를 제대로 해내는 것만 해도 직장인으로서는 대단한 일일 것이다. 작품을 만들듯 혼을 담는 노력을, ‘상품’을 만드는 직장인에게도 똑같이 요구할 수 있을까?

갖가지 변수와 변명들로 Best가 아닌 Good enough로 타협하는 경우가 아마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디자인은 더욱 그렇다. 주관과 직관의 영역에 속한(것이라고 오해하는) 탓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거들기 바쁘다. 하지만 그 디자인은 수많은 리서치와 거듭된 사고과정 끝에 탄생한 논리의 산물이기도 하다.

디자이너 개인의 경험치 뿐만 아니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라는 공감대는 과연 몇 세대를 더 거쳐야 가능한 것일까?

논리적인 개발자

예전에 어떤 개발자로부터 뜬금없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저는 이과 출신이라서 논리적이예요.”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이과와 논리적 사고가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가? 당시에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 문장 속의 숨겨진 의미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For-loop-diagram

그가 경험했던 학문은 아마도 어떤 형식의 입력과 출력이 있고, 변수가 존재하며, 특정한 규칙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에 관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 형식과 규칙을 따라가는 과정은 가설과 검증의 반복이었을 것이고, 참과 거짓의 이치를 따지는 논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코딩과 글쓰기의 상관관계

사실 그가 이과에서 경험한 논리는 내가 문과에서 경험한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특히 문학에 이끌렸는데, 작품 속 한 문장 한 문장에 깃들어 있는 작가의 생각을 엿보는 것이 좋았다. 이 단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문장으로 인해 이어질 내용들은 어떻게 변주되는가?

작가의 펜 끝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레 문장 속 원인과 결과와 변수들을 밟게 되고, 다음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가설을 품게 되며, 검증의 시간은 책장을 덮기 전까지 계속된다.

글을 쓰는 동안 작가는 창작자이면서 동시에 첫번째 독자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수많은 독자들이 경험하게 될 과정을 작가는 처음으로 마주하며 설계하는 것이다.

창작자의 치열한 사고과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글쓰기의 논리는 결국 코딩의 논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심지어 최초의 프로그래머는 시인 바이런의 딸이었다.

다시, ㅇㅇ하는 디자이너

애써 디자인과 무엇을 병행하려 했던 것은, 결국 논리적 사고를 연습하는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코딩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버릇을 들이면, 그것이 결국 본업인 디자인에 힘을 실어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가설을 세웠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았나?

글쎄, 진화까지는 모르겠지만 결단코 퇴화하지는 않겠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