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게 못 그려도 괜찮아
예쁘게 그리기와는 조금 다른 디자인
고백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린다. 어린 시절 나의 낙서에 진심으로 칭찬을 해주시던 부모님 덕분에 한동안 화가 — 그때는 그림 그리는 사람은 다 화가인 줄 알았다 — 를 꿈꾸기도 했었지만, 정규 교육과정을 따라가는 동안 정말로 그림에 재능이 있는 친구들을 보며 일찌감치 그 꿈은 접게 되었다.
그리고 화가의 꿈을 접은 지 십수 년이 지난 후, 언젠가부터 내 명함에는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자리하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지난 업무들을 돌아보다가, 문득 내가 디자이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관심사를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냥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지난한 과정들이 모두 소중하기에 그간의 기록들을 회고하는 것도 의미있겠다 싶어서 이렇게 몇 자 적어본다.
마케팅 꿈나무
대학에서 경영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두 학문의 접점인 마케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4학년때 잠시 인턴으로 근무했던 온라인 광고 대행사에서 그대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에 나의 주 업무는 검색광고였다. 포털사이트에서 특정 단어를 검색하면 검색 결과 상단에 촤르륵 노출되는 광고들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이다. 법이 허용하는 선에서 최대한 매력적인 광고 문구를 작성하고, 경쟁 입찰을 통해 내가 관리하는 광고를 상단에 노출되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처음에는 내가 만든 문장들이 인터넷에 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뿌듯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이해관계자 모두 행복한가 하는 점이었다. 광고주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들과 대행사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의 관계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광고주의 만족이라는 것은 결국 ‘비용대비 수익’이었다.
지표들을 들여다 보았을 때,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매력적인 광고 문구를 뽑아낼수록, 그리고 광고 노출 순위를 높일수록, 사용자의 클릭수는 늘어났지만 정작 광고주의 매출은 그에 비례하지 않았다. 클릭이 늘어난다는 것은 비용이 늘어난다는 것이고(Cost Per Click; CPC), 이 불균형의 결과는 어쩌면 모두의 불행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때에 왜 그랬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마케터가 아닌 고객의 입장에서 광고를 만나는 순간을 재현해 보기로 했다. — 클릭 자체가 비용이기 때문에 마케터가 광고를 클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금에야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고, 검색 결과에서 내가 만든 광고 문구를 클릭했다.
‘아… 그랬구나.’
각종 플래시 애니메이션과 팝업과 배너로 어지러운 랜딩페이지는 시선을 이리저리 흩어놓았고,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할 지 혼란스러웠다. 이 화면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광고주의 매출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첫 번째 전환점 _ 랜딩페이지 최적화와 사용자 경험
이 때에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알게된 개념이 랜딩페이지 최적화(Landing Page Optimization; LPO)였다. 광고가 아무리 매력적이더라도 랜딩페이지를 적절히 구성하지 않았다면 사용자의 유효한 액션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최적의 구성을 찾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테스트하고 수정/보완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토대로 랜딩페이지를 분석하고 나름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화면을 얼기설기 그려서 광고주에게 제안해 보았다. 그리고 돌아온 거절.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장황한 무용담을 들으며 나는 또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영역이 아닌 것을 건드려서일까?’
‘내 그림이 별로였나?’
‘논리가 빈약했던 탓일까?’
아마도 떠올렸던 많은 생각들이 모두 거절의 이유였을 것이다. 만약 그 때에 나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더라면 거기서 멈췄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렇지 못했고 조금 더 공부해 보기로 했다. 이듬 해에 나는 대행사를 그만두었다.
오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제안을 준비하면서 약간 들떠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숫자를 맞추는 일들과 광고주의 전화에 숨 죽이던 시간들이 ‘회사의 일’이었다면, 내가 찾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하려 했던 시간은 온전히 ‘나의 일’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 LPO와 관련된 많은 책들을 탐독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고, 이직에 대한 준비도 없었지만 왠지 마음은 편안했다.
LPO 관련한 책이나 인터넷 상의 자료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었다.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UX). 이것은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일종의 기회로 여겨졌다.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정말 많아 보였고, 컨설팅을 제공하는 업체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관련 지식들과 방법론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보고 또 보면서 블로그에 기록했다. 고객보다 ‘사용자’라는 단어가 더 자연스럽게 이해될 즈음에 몇 군데의 UX 컨설팅 에이전시에 지원서를 제출했고, 그 중 한 곳과 연이 닿아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무엇보다도, 철없던 당시에는 ‘UX 디자인이라니, 나도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건가?’ 하는 막연한 기대가 UX에 몰입하는 데에 한 몫 했었다.
UX 디자이너
UX 업계에 발을 들이고 나서는 주로 리서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사용자의 인상이나 불편한 경험들을 수집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을 고민하고 제안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인사이트를 발견하는 순간이 많았다. 특히 자동차나 TV, 스마트폰 등 제조업의 상품들부터 통신사의 신규 앱 같은 IT 분야의 서비스까지 짧은 기간동안 다양한 도메인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커리어 패스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큰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당시는 아이폰 출시 여파로 국내 휴대폰 제조사들이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쏟아내기 시작하고, 이와 함께 모바일 앱 생태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 쪽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고, 나는 온종일 모바일 앱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보고 직접 사용해 보기도 하면서 이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관련 자료들을 접할수록 앱 서비스를 직접 설계하고 싶은 욕심도 무럭무럭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서비스, 우리 서비스를 만드는 일은 에이전시보다 인하우스에서 일반적인 것이었고, 나는 또 한 번 이직을 하게 되었다.
포털 업체의 UX 직군으로서 맡게 된 첫 업무는 모바일 지도 서비스의 설계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리서치만 할 때보다 업무 범위가 확장되어 리서치를 토대로 한 기능 설계와 와이어 프레임 작성까지를 담당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내 명함에는 UX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두 번째 전환점 _ 프로토타이핑
지도를 거쳐 포털 서비스를 담당하면서부터는 리서치보다 설계 업무 비중이 커졌다. 대부분의 시간을 와이어 프레임 작성에 쏟아야 했고, 그 분량도 생각보다 많았다. 타 직군 실무자들과 커뮤니케이션 하기 위한 문서이기는 했으나, 문서의 방대함으로 인해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효율을 저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페이지 수를 줄이는 방법은 없을까?’
‘flow를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인터랙션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어떻게 해야하지?’
이런 저런 고민들이 밀려드는 시기였다. 파워포인트의 애니메이션 기능을 이용해 앱 화면의 플로우와 인터랙션을 표현해 보기도 했지만, 엄청난 비효율을 감내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업무 프로세스의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해 보였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UX 조직의 리더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이를 위한 실험적인 조직을 셋팅하기에 이르렀고,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자원해서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UX 디자이너에서 ‘인터랙션 디자이너’로 이어진 시간은 이미 여러 번 언급했던 이야기들처럼 흘러갔다.
예쁘게 못 그려도 괜찮아
UX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나의 인식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내가 알던, 혹은 오해했던 디자인은 ‘예쁘게 그리기’ 정도였는데, UX 디자인은 ‘정확하게, 군더더기 없이 그리기’인 것 같았다.
직관에 의존하기 보다는 사용자의 피드백과 데이터에 근거하여 설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예쁘게’는 부가적인 요소 정도로 우선 순위가 낮아지기도 했다. 덕분에 예쁘게 그리지 못하는 나도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진작부터 이런 사실을 알려주었더라면, 어린 시절의 꿈을 품에 안은 채로 더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연말이다.
자, 그러니 이제라도 이 글을 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본다.
“예쁘게 못 그려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