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직장인의 프로젝트 후기

photo by Andreaswierer

시작

“스타워즈 시나리오도 처음엔 거절당했어요, 일러스트를 보여주고 나서야 투자를 받았죠.”

광고 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 받았을 때, 협업 부서의 리더가 했던 말이다. 디자인 전담 조직을 이끌고 있던 그의 말을 해석해 보자면,
‘디자인만 보여주기보다는 움직이는 결과물을 직접 보여주는 게 더욱 설득력이 있다.’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 선행 연구 위주로 일을 진행하던 우리 파트에 실무와 맞닿은 프로젝트는 일종의 기회로 여겨졌고, 광고의 특성상 측정 가능한 성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판단에 협업은 쉽게 성사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협업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름 새로운 광고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회의에 참석했지만,
이미 광고 노출 지면은 정해져 있었고, 디자인도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 부분이 이렇게 움직였으면 좋겠어요. 슈우욱!”

숱하게 말하고, 또 들었던 의성어와 의태어가 그렇게 슬프게 들릴 줄은 몰랐다. 협업이라고 하기 보다는 업무 지시라고 느껴질 만큼, 바꿀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기대했던 바는 결정된 사항을 구현만 하는 프로토타이퍼가 아니라,
초기 전략부터 화면과 동선, 최종 제품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UX팀으로서의 역할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했던 것일까?

협업을 하려면 스타워즈의 일러스트가 아니라, 시나리오부터 같이 써야한다고 생각했었다.


give & take

나의 직속 리더에게 협업 과정에서의 이슈들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의외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원하는거 다 해주세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자청해서 그들의 손이 되어주라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어진 설명을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가 프로젝트에서 원하는만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뢰관계를 쌓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한 발 물러서서 먼저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일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관계 맺기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고 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의 몇 가지 과제들 중에서 가장 공들여 작업했던 것이 첫번째 프로토타입이었을 만큼, 우리 부서의 첫인상을 만드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의사결정자들의 피드백도 좋았다.


다시 시작

그 덕분이었는지 두번째 과제는 오히려 우리쪽에서 제안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제안을 하기보다는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 역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몇 가지 UX 방법론을 사용한 워크샵을 하기로 했다.

단순히 광고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의 발산보다는 자사와 광고주, 그리고 일반 사용자들의 니즈를 유추해보고 그에 맞는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있는 제안으로 이어질 것이라 판단했다.

첫번째 워크샵에서는 각 이해관계자의 니즈를 예상하여,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발산해 보았고, 두번째 워크샵에서는 첫번째 워크샵에서 발산했던 아이디어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빠르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 위주로 아이디어 스케치를 진행했다.

역시 익숙한 방식대로 일을 진행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프로토타이핑과 생산성

인터랙션디자인을 고민하게 되면서부터 코드 기반의 프로토타이핑을 조금씩 공부하고 있었다.

명확하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고, 수정과 재활용이 용이한 장점을 이유로 선택한 코드 기반 프로토타이핑은 두번째 과제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우리는 짧은 기간안에 정말 많은 배너 광고를 테스트 해볼 수 있었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결과로 제시할 수 있었던 덕분인지 제안했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실제 상품으로 출시되었다.

오버레이형 배너 프로토타입

표현과 구조 사이

그렇게 두번째 과제가 잘 마무리되고, 세번째와 네번째 과제도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업무 프로세스에 익숙해질 무렵, 두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성향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디자인 부서에서 공유하는 벤치마킹 자료는 시각적 효과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고, 우리쪽에서 공유하는 내용들은 구조적인 부분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 디자인 부서는 너무 시각적인 모션 효과를 추구하는 듯 보였고, 동일한 구조를 기반으로 할지라도 표현 방식만 다르다면 또 다른 상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디자인 부서가 보기에는 인터랙션디자인 파트에서 자꾸만 여러 이유를 들어 가능성을 제한하고, 단순하고 재미없는 효과들만 고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예전에는 나 역시 눈에 보여지는 부분을 위주로 화면을 그리고 동선을 설계했었지만, 인터랙션디자인을 고민하고 코드 기반의 프로토타이핑을 하면서 부터는 껍데기 아래에 있는 것들이 신경쓰였다.

그런 까닭에 동일한 구조의 상품을 디자인만 바꿔서 여러벌 만들 필요는 없어 보였다. 과거에 개발자들이 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거라고 상상하니 새삼 부끄러웠다.


이 프로젝트의 타겟은 누구였나?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광고 상품을 접하게 되는 것은 일반 사용자일지 몰라도, 광고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광고주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로는 광고주의 시선을 끌 수 있어야 상품성을 확보하게 된다. 디자인 부서에서는 그런 이유로 끊임없이 시각 효과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름 광고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자신감에 쉽게 프로젝트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사용자 중심 사고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광고주라는 또 다른 사용자를 간과했던 것이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난 지금에서야 돌이켜보건데,

처음부터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디자인 부서의 제안들도 보다 유연하게 수용했을 것이고, 협업 과정에서의 커뮤니케이션도 훨씬 부드러웠을 것이며, 좀 더 많은 아이디어들을 상품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TL;DR

광고 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깨닫게 된 교훈 몇 가지

  1. 원하는 것이 있으면, 먼저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줘야겠다.
  2. 역시 마음이 편해야 일이 착착 진행된다.
  3. 많은 베리에이션이 필요할 때, 코드 기반 프로토타이핑이 좋더라.
  4.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도 다 이유가 있는거다.
  5. 나도 과거의 언젠가 부끄러운 언행을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