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탑승자, 2020
2021년의 기술 수준으로 1인칭 시점의 VR 스토리를 만드는 건 쉽지 않다. 체험자(유저, 플레이어… 아직 용어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이라는 용어는 쓸 수 없다. 보기만 하는 ‘관’(觀)객은 더는 아니니까)에게 완전한 주인공의 지위를 부여하면 좋겠지만 체험자가 취할 행동이나 말을 사전에 계획할 수 없고 인공지능이나 시스템이 실시간 반응하도록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프라이프:알릭스>처럼 이미 사전 설계된 캐릭터에 마치 빙의하는 형태의 경험을 제공하게 된다. 체험자는 알릭스의 몸에 들어가지만 알릭스의 정신까지 지배하지는 못한다. 알릭스 대신 총을 쏘고 퍼즐은 풀 수 있지만 알릭스가 동료들과 대화하거나 혼잣말 할 때는 그저 방관자로 남는다. 게임에서는 이 정도로도 충분할 지 모른다. 하지만 스토리가 중심이 되고자 한다면 이 정도의 빙의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네 명의 탑승자>는 사전제작된 캐릭터에 영혼빙의된 ‘체험자’가 캐릭터의 감정에 진정으로 동기화될 수 있는가, 혹은 캐릭터의 정신세계에 진짜로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시도다.
체험자는 기차 여객칸 4인용 좌석에 앉은 승객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남성, 여성, 아이, 노인 중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다. 밖에서 볼 때 이 네 사람은 한 가족처럼 보일 지 모르지만 실은 서로 모르는 사이다. 모르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며 잠시 동안이나마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할 때 겉으로는 침묵이 흘러도 안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이 오가게 된다. 상대편을 지켜보며 저 사람은 어디를 가는걸까? 뭘 하는 사람일까? 생각하고 혹시 그 사람에게 호감이 생긴다면 저 사람에게 말을 걸어볼까 말까 고민하게 된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런 고민’에 빠지는 것을 아예 피하기 위해 옆 사람이나 앞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이어폰을 꼽고 눈을 감거나 내 앞에 놓인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스크린에 집중하기도 하지만 어찌된 일인 지 이곳의 네 명은 스마트폰도 헤드셋도 보지 않는다.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대편을 살피고 말을 걸거나, 혼자만의 상상 속에 빠지는 것 뿐이다.
그 중 남자는 중요한 순간에 호감을 가진 여성에게 말을 걸지 못해 몇 번의 기회를 날려버린 상처를 가지고 있다. 방금 이 남자의 내면에 빙의된 체험자는 360도 영상으로 등장하는 회상씬을 통해 그 남자의 ‘찌질했던 기억들’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근데 하필이면 지금 이 남자는 바로 건너편에 앉은 여성에게 호감이 있다. 말을 걸어볼까 말까. 오직 관심사는 그것이다. 저 남자의 찌질한 디폴트 자아는 절대 말을 걸리가 없다. 그렇다면 때마침 이 남자의 내면에 빙의된 체험자는 이 남자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을까? 있다. 저 남자 대신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내줄까 말까. 그 순간, 저 남자의 고민은 체험자인 나의 고민의 되어 버린다.
한편 여자는 건너편 남자의 그 심리적 갈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다른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친구와의 여행 중에 ‘아이를 갖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남자친구는 거절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답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이제는 꼭 대답하리라고 다짐을 해본다. 체험자는 여자의 에피소드부터 경험을 시작할 수도 있고 남자의 몸에 들렀다가 여자의 몸으로 왔을 수도 있다. 남자의 내면을 다 살피고 난 뒤 여자의 몸에 왔을 때, 또 하나의 자아인 나는 호감을 표현하는 남자에게 친절하게 답을 해줄 것인가, 아니면 잠시 스쳐갈 남자 따위 무시하고 남자친구에게 답변하는 것에 집중할 것인가?
세 편의 에피소드가 똑같은 정도의 몰입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아마도 체험자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적어도 남자 쪽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지금 이 남자가 느끼는 심리적 압박에 거의 유사하다 싶을 정도의 ‘압박’을 느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말을 한다 / 하지 않는다)에 따라 이야기의 분기가 나뉘기는 하지만 양쪽 다 예측 가능한 범위에 머무른다는 점이 다소 아쉽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잠시 동안이나마 캐릭터가 느끼는 심적 압박을 체험자도 느낄 수 있게끔 몰아가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이 작품이 도달한 분명한 성취 지점이다.
각 에피소드 별로 각기 다른 질감으로 표현된 것도 흥미로운 체험 요소다. 최초 이 작품은 실제로 4인용 좌석을 오프라인 공간에 설치한 뒤 네 명의 체험자가 각각 그 좌석에 번갈아 앉아가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고 한다. 비록 그 체험까지 실제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의자에 앉아서 체험해볼 것을 추천한다.
더 읽을거리
XR Must 데이터베이스에서 기본적인 정보를 볼 수 있다.
지금 이 작품을 경험할 수 있는 곳
2021년 6월 기준, 이 작품은 영화제 등 페스티벌을 통해서만 공개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작품은 7월에 열리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비욘드 리얼리티’에서 공개된다. (2021.7.1~18, 인천국제공항 제1교통센터 어메이징 스퀘어)
현재 4편의 에피소드 중 3편이 공개되었으며, 마지막 에피소드인 The Lady 편은 조만간 공개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