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하는 인류가 온다

에피소드 1 : 더 비기닝

Chancheol Jeong
ixi media
17 min readAug 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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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 6회로 기획한 ‘몰입하는 인류가 온다’의 첫 번째 에피소드다. 연재를 시작하게된 배경을 설명하고, 연재 구성과 ‘에피소드 2: 디스플레이를 쓴 인류’의 예고편을 전하고 마친다.

  1. 연재를 시작하며: 2021년 4월 어느 날의 기록

기다리는 봄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그날의 봄바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2021년 4월 어느 날 늦은 오후, 코로나 19 팬데믹이 우리 인류에게 선사한 온라인 수업의 피로도가 정점을 찍었다. 온라인 수업을 한창 하다보면, 화면에 보이는 학생들이 어디선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문명 생명체로부터 온 실시간 스트리밍 이미지인지 아니면 미리 촬영된 수강 장면인지 의문이 드는 순간이 찾아 올 때가 있다. 미동도 없이 나를 응시하는 학생이 있는 경우 의문은 더 짙어진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원본과 복사본 사이에 구분은 사라지고 클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손쉬운 방법이 있다.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시며 숨쉬는 자연을 응시하는 일이란 걸 나는 언제부터인가 체득했다. 며칠 사이 맥주를 다 마셨음을 확인한 순간(즉 마스크를 끼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문자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트위터나 페북에 올리기 딱 좋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러한 뜻밖의 소식이었다.

‘주문하신 오큘러스 퀘스트 2가 도착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인증샷은 남기지 못했다. 사실 난 사생활을 SNS에 올리지는 않는 편이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현관문으로 사뿐히 달려가 문을 열었다. 택배기사님은 이미 다른 층으로 내려가셨다. 그래서 현관 앞에 도착한 택배가 마치 하늘에서 온 선물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오늘은 일종의 축복이었다. 종이박스를 조심히 들어 방안에 모셔두고 맥주를 사러 나섰다. 거리를 걷는 내 모습엔 웃음이 빛났다. 자연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상현실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렇다는 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조심스럽게 언박싱을 하고, 새로운 가족이 될 ‘VR 헤드셋’을 충전하며, 맥주를 마셨다. 3년 전에 구입한 VR 헤드셋은 오늘 갑자기, 물론 몇 주 전부터 예고는 되었지만, ‘퇴물’ 이 되었다. 주문할 당시 스스로에게 약속했건만, 이제 옛것이 된 헤드셋을 처분할 생각은 이미 뒷전이 되었고, 난 새로 설치할 어플을 물색했다. 이미 나는 현실 너머에 있었다. 어떠한 장치의 도움 없이도 인지적으로 가상세계에 있을 수 있다는 인지주의 이론가의 주장을 선호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은 옳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적당히 충전된 헤드셋을 쓰고 기기등록, 로그인, 경계 설정 등 초기 설정을 마치고, 오큘러스에서 제공하는 ‘First Step’을 밟고, 여러 어플을 둘러 봤다. ‘역시 잘 샀어!’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유료 그림 그리기 어플을 살펴보다가 무료 웹 기반 어플인 ‘브러쉬워크(brushwork)’에 접속했다. 이전 ‘VR 헤드셋’은 컨트롤러를 지원하지 않았기에, 이미 알고 있었던 VR 장비로 할 수 있는 평범한 가상의 ‘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신비스러운 만족감을 느끼며 그림을 그렸다. 너무 성급히 사용한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배터리 충전량이 거의 바닥이 되어, 충전을 해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마시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아직 맥주 5캔이 남았다.

하지만, 아내가 팔짱을 끼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전공한 영화이론은 지극히 현실적일 때가 많다. 몰입에서 나와 마주하는 현실은 냉혹하다. 이제 아내에게 밝은 미소로 새 기기의 성능과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와의 관련성을 설명할 차례가 온 것이다. 알다시피, 집안에 기술 미디어를 새로 들이기 위해서는 집의 수호여신에게 신고하고 거주 허가를 받아야 한다. 예고 없이 도착한 경우엔 특히 허가 과정이 엄격하고 때론 다시 돌려보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언박싱은 최대한 본래 개봉전 상태로 되돌릴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나에게 전략은 있었다. 연구를 내세우는 것. 열심히 새 연구프로젝트를 설명(사실 말하면서 동시에 기획안을 세우고 있었다고 표현해야 옳다)하면서 구입의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을 때, 나의 딸아이 지우(초등학교 4학년)가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대면 수업을 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지친 기색으로 방에서 나왔다(참고로 나의 수업을 2년 동안 듣고 있는 대학생 친구들을 포함해, 난 항상 지우 세대의 아이들에게 과연 온라인 세상이란 어떤 공간으로 인식될지 궁금하다). 지우는 나와 약속이나 한듯이 이렇게 VR 헤드셋을 보며 외쳤다.

“아빠 이거 뭐야?”

‘오! 나의 구원투수!’ 승리는 나의 것! 반가운 얼굴로 나는 충전기를 뽑아 헤드셋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바로 씌워 주었다. 아이가 좋아하면 만사형통이다.

“아빠 여기에 붓이 있어!” 딸아이는 내가 방금 전에 하다만 브러쉬워크에 어느 새 접속했다. VR 미디어 역사 연구자로서 나는 이 신비한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하려 했는데, 딸아이는 마치 예전에 해본 듯 이미 그리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무척 능숙했다. 지우의 팔은 이미 컨트롤러와 일체가 된 듯 보였다. 헤드셋 아래 아이의 입가에 웃음기가 빛났다. 나와 이유는 같지 않았지만, 아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딸아이의 웃음기가 묻어나온 몸짓을 바라보았다. 새 기기가 무사히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으로 나는 인식했다. 나는 뭔가 더 알려줄 마음으로 지우에게 “색을 섞을 수도 있고, 붓의 종류도 바꿀 수 있어”라고 말했다. 내 목소리는 점점 커졌지만 가상현실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이미 딸아이는 현실 밖에 있었고, 아마도 이미 체득한 정보였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당시 미러링이 되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림 그리기에 깊이 몰두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아마도 캔버스의 상단 끝에 무엇인가를 그리려 했었는지 지우는 뒤꿈치를 들고 팔을 최대한 높이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내게 상상력이 더 허락되었다면 지우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허공에서 움직이는 지우의 손은 매우 섬세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창문 너머에서 시원한 봄바람이 가상현실 속에서 현대무용을 하듯 그림을 그리고 있는 딸아이를 향해 불어 왔고, 아내와 나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 풍경을 지켜보았다. 아내는 아이를, 나는 새 식구가 된 VR 헤드셋을 응시했다. 물론 마음속으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맥주를 더 마시면 되었다. 아직 맥주 4캔이 남았다.

혼자서 온전히 새 VR 기기를 맞이하기 위해, 늦은 밤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헤드셋을 깨웠다. 헤드셋은 완충되어 있었다. 브러쉬워크에 접속해 갤러리 메뉴로 가보았다. 지우의 첫번째 ‘가상’ 그림이 저 멀리 걸려있었다. 나는 텔레포트 메뉴를 이용해 나름 능숙하게 그림에 다가섰다. 사실 많이 놀랐다. 아이의 그림에서 무엇인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메시지가 내게 화살처럼 날아왔다. 물론 아빠에게 아이의 그림은 모두 걸작이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분명 처음 접해본 장치였는데, 그림 그리기 인터페이스를 이렇게 익숙하게 다루고 저장까지 한 지우가 신기했다. 아이가 마치 진짜 물리적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듯 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이의 그림에는 내 그림에는 없는 진정성과 존재감이 있었다. 내 그림도 갤러리에 걸려 있었는데 ‘무제(untitled)’가 딱 어울리는 그러한 종류의 가상의 이미지였다. 가상세계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어떤 편견도 아이에게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의 능숙한 몸짓이 그림 속에 생생하게 박혀있는 듯했다. 아이에게 가상현실은 내가 생각하듯 낯설거나 물리적 현실이 항상 전제되어야 하거나 비교되는 그러한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였다. 나는 책으로 VR 미디어를 배웠다면, 아이는 언어를 배우듯 VR미디어를 흡수한다. 아이의 그림이 전한 메시지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단숨에 헤드셋을 벗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맥주를 더 마시고 싶어졌다. 아직 맥주 3캔이 남았다.

“가상현실은 내가 속한 세대가 아니라, 포스트디지털(Post-Digital) 시대에 태어난 세대를 위한 미디어다.”

위 문장을 잊지 않기 위해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내가 속한 X세대와 나의 아내가 속한 Y세대 그리고 지금의 MZ세대가 아날로그 PC통신, 인터넷, 모바일을 어떤 배움의 과정 없이 터득했듯 VR은 지금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있는 지우 세대를 위한 미디어라는 생각이다.

[그림1 ] 영화 <스티브 잡스>에서 잡스의 딸이 맥킨토시로 그린 역사상 최초의 디지털 추상화(좌)와 역사상 최초로 VR헤드셋을 쓴 지우가 가상 공간에서 그린 그림(우). 모두 도래할 뉴미디어의 혁신성을 알리는 신호다.

지우의 그림을 접했을 때 내 머릿속에 영화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2015년 대니 보일 감독의 <스티브 잡스 Steve Jobs>다. 영화를 보면 1984년 역사상 최초로 ‘맥킨토시’를 세상에 선보였던 날에 관한 장면이 있다. 잡스를 찾아온 딸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잡스와 마케팅 디렉터는 폐쇄형 구조로 만들어진 ‘맥킨토시’의 미래를 두고 이견을 나눈다. 그 사이 잡스의 딸은 생전 처음 접한 맥킨토시를 이용해 무작정 그림을 그렸다. 일상의 장난감 다루듯 친숙하게 마우스를 이용해 딸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잡스가 놀라며 ‘이것이 매킨토시의 미래다’라는 의미로 마케팅 담당자에게 보여준다. 잡스와 딸아이가 서로 약속했던 것도 아니고, 마우스를 이용해 그린 최초의 디지털 추상화가 역사에 남을 걸작이어서도 아니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회사의 우려와 달리 스티브 잡스가 선보인 최초의 맥킨토시가 얼마나 시대를 앞선, 다음 세대를 위한 혁신적인 미디어였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 추상화 에피소드는 모두 픽션이다.

모든 세대가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미디어의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기 쉽게 디자인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디어마다 타고난 사용자가 있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 나에게 PC와 인터넷이 그러했듯, MZ세대에게 유튜브와 모바일이 그러하듯, 지금의 아이들에게 VR 헤드셋을 포함한 이른바 ‘실감미디어 장치’는 일종의 손쉽고 이질감 없는 놀이장치(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인간과 기계의 운명 같은 만남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표현이 있다.

“사람이 차를 고르는 게 아니야. 차가 주인을 고르는 거지.
사람과 기계의 오묘한 인연이란다.”
-영화 <트랜스포머>(2007)의 바비 B 아저씨(Uncle Bobby B)의 대사.

늦은 밤 방안에 앉아 VR이 나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고민에 빠졌다. VR이라는 뉴미디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단지 관망하는 것이 유일한 나의 태도일까? 아니다. 우리 세대에게는 더 큰 임무가 있다. VR이 대변하는 실감미디어 미디어문화의 생태계를 보다 확실하게 미래 세대의 일상의 미디어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좀더 현실적으로 실감 미디어 엔지니어도 그렇다고 어플 개발자도 아닌 나의 임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영화의 지난 과거를 끄집어내어 새롭게 배열하거나, 이론의 힘에 기대어 영화 작품과 미디어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직업을 가진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했다. 해답은 깊은 곳에 있지 않았다. VR 미디어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인류는 언제부터 현실의 문턱을 벗어나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했는지 등 21세기 VR 미디어가 만들고 있는 문화의 근원지를 찾는 일이다. 이 말이 어렵다면, 위에 인용한 바비 B 아저씨의 말처럼, 도대체 VR헤드셋은 언제부터 우리 문화 속에서 최적의 사용자를 기다리며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해 왔는지, 가상현실의 시작과 현재를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나의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실감미디어 장비가 등장할 것이고, 또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더 다채로운 종류의 어플이 마치 ‘궁극의 어플인 듯’ 등장할 것이고, 무수한 영역들에서 VR과 AR(증강현실) 등이 현실과 결합할 것이다. 산업, 교육, 통신, 교역, 의료 등의 영역에서 이미 다양한 청사진이 제시된지 오래다. 대책 없이 ‘실감미디어가 미래다’라는 식으로 광고하는 기사를 걱정스럽게 읽을 때도 많다. VR 미디어가 일상 생활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게될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는 좋은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실감미디어는 다음 세대의 놀이터이다. 스크린을 응시하는 우리 시대의 몰입은 스마트폰이라는 마지막 종착지에 도달했다. 다음은 디스플레이를 쓴 ‘몰입하는 인류'의 시대다.

‘몰입하는 인류가 온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워드프로그램을 열어, 책 제목과도 같이 크게 가운데 정렬로 ‘몰입하는 인류가 온다’라고 적었다. VR과 함께 지낼 세대를 ‘몰입하는 인류’라고 부르기로 스스로 정했다. 이 새로운 인류의 기원과 미래를, 존재의 시대성을 설명하고 탐색하는 일이 내가 해야할 일이라 생각해서다. 그날은 이렇게 내가 속한 세대의 미디어인 컴퓨터에 나의 고백을 기록하는 일로 끝났다.

2. ‘몰입하는 인류가 온다’ 연재 구성

이 연재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몰입하는 인류가 온다’ 연재를 통해 앞으로 올 실감미디어 문화의 오랜 기원을 어렵지만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뿌리를 찾으려 한다. 우리가 현재 얼마나 중요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 바로 목격하고자 해서다. 지금 새로운 인류의 문화가 생성되는 빅뱅의 순간을 우리는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예상치 못하게 이 변화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역사는 늘 이렇게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으로 변화되지 않는가? 중요한 일은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되고 기록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변화를 파헤치는 고고학자의 임무이다.

몰입하는 인류가 온다. 길게는 고대시대부터 짧게는 모더니티가 폭발하기 시작한 19세기 근대시대부터 몰입하는 인류의 등장은 예고되었다. 하지만 문자 시대에도 그림의 시대에도 가상의 공간은 있었지만, 오직 상상할 수만 있었다. 책을 읽으면 내용에 몰입해서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인류는 쉽게 감정에 동화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모두 정신의 소산에 불과했다. 인류는 시각적 몰입을 향해 달렸다. 21세기 하이퍼미디어 시대, 가상공간은 인류가 공존하는 비물질적 영토이다. 가상 세계에도 존재하는 인류는 언제 어떻게 등장했을까?

연재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로 구성하고자 한다. 물론 각각의 제목은 지금과는 다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제목을 접했을 때 독자들이 떠올리게 될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 에피소드 𝟙: 더 비기닝
  • 에피소드 𝟚: 디스플레이를 쓴 인류
  • 에피소드 𝟛: 메타버스, 가상공간의 산책자
  • 에피소드 𝟜: 몰입형 미디어의 고고학
  • 에피소드 𝟝: 공간적 스토리텔링
  • 에피소드 𝟞: 가상현실과 인류의 공진화
  • 에필로그: 몰입하는 인류를 위하여

역사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역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프랑스의 위대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다음 세대를 위한 역사책 썼다. <역사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블로크는 이 책을 다음 문구로 시작했다.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블로크는 이어서 “그 질문 속에 제시되어 있는 문제는 다름 아닌 역사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라며, 이제 역사가는 이 문제에 나름대로 답변을 준비해야만 한다”고 썼다. 지금까지 연재를 소개하기 위해 일상의 기록처럼 쓴 이 글과 이후 이어질 에피소드의 목적도 마찬가지다.

“아빠 도대체 VR미디어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지우는 능숙하게 ‘오큘러스 퀘스트2’를 다루었지만, 그 이후로 내가 종종 실감미디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위와 비슷한 실감 미디어의 쓸모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 지우 또래의 아이들은 나보다 더 직관적으로 실감미디어를 다룬다. 하지만 역사의 ‘역사적’ 쓸모에 대해 블로크가 써내려갔던 것처럼 나 역시 VR 헤드셋이 대변하는 실감미디어의 ‘역사적’ 쓸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와 미디어의 오묘한 운명이다.

아래는 ‘에피소드 2: 디스플레이를 쓴 인류’의 예고편이다.

3. ‘몰입하는 인류가 온다’, 에피소드 2: 디스플레이를 쓴 인류 (예고편)

‘에피소드 2’에서는 디스플레이를 쓴 인류의 출현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자 한다. 지난 시대의 완전한 몰입을 겨냥해 퍼져갔던 기술과 문화의 지류가 HMD를 통해 다시 한데로 결집하는 듯하다. 그것은 19세기 이후 근대 시청각 문화 안에서 끝없이 상상되고 실험되었지만 여전히 개척되지 못한 인류의 현실 너머의 목적지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여기에 있으면서 거기에 있는 듯한 또 다른 현실의 창조다. HMD는 완전히 현실을 차단하고 완벽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미디어로써, 인간은 HMD와 완벽히 연합하기를 오랜 세월 꿈꾸어 왔다.

미디어의 역사가 항상 그렇듯 인간과 HMD 연합의 역사에서도 상상이 출발이자 미래였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1932년 작품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에서 레니나(Lenina)와 존(John)이 즐겼던 ‘필리즈 Feelies’는 상상적 가상현실 미디어의 시작이었다. 영화관 같은 이 장치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자극해 실제로 어떤 현실 속에 있는 듯한 체험을 전달한다. 요절한 SF소설가 스탠리 웨인바움(Stanley G. Weinbaum)이 1935년에 발표한 로맨스 SF소설 <피그말리온의 안경 Pygmalion’s Spectacles>에도 비슷한 가상현실 미디어가 등장한다. 웨인바움은 오늘날 HMD와 같은 안경 모양의 장치를 상상했다. ‘가상현실’ 용어를 창시한 재런 러니어(Jaron Lanier)와 닮은 가상현실 장치 개발자가 등장하는 1992년 테크노스릴러 영화 <론머맨 Lawnmower Man>에서 가상현실 장치의 실험대상이 된 조브(Jobe)는 육체를 버리고 순수한 의식만으로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이버스페이스의 신이 되기를 욕망했다. <레디 플레이 원 Ready Play One>에서는 HMD를 쓴 삶이 일상이 된 미래를 그린다.

20세기 세기말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의 가속화 이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시간을 디스플레이 장치를 응시하며 보내왔다. 스티븐 잡스가 서사한 디스플레이를 손에 쥔 인류의 삶이다. 하지만 응시의 시대는 저문다. 전자 이미지로 둘러싸인 가상공간에서 누군가를 응시하고, 대화를 나누고, 무엇인가를 찾고, 기록하고, 만들고, 즐기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HMD를 쓴 인류의 삶이 도래한다. 아직은 VR 전시관에서, 거실에서, 방안에서, 연구소에서 일시적이거나 비규칙적으로 일어나지만, 또한 그러한 삶은 여전히 상상적이거나 낯설지만, 기술의 진보는 이미 그곳을 겨냥했다. 문화는 더 미리 앞서 있었다. 앞서 언급한 가상현실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미 가상현실 시대를 대비해왔다. 재런 러니어가 <가상현실의 탄생 The Dawn of the New Everything: Encounters with Reality and Virtual Reality>(2018)에서 ‘도래한다’고 말했던 HMD를 쓴 인류의 삶은 더는 미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미디어의 역사가 증명하듯, 새로운 미디어는 새로운 인간의 존재 방식을 낳는다. HMD를 쓰고 가상현실에 거주하는 인류는 단지 이중적 존재, 즉 현실세계의 나와 가상세계의 나라는 이분법적 도플갱어가 아니다. 문자와 이미지를 통해 가상현실 속 인간의 삶을 그렸던 소설가나 영화감독뿐만 아니라, 이반 서덜랜드(Ivan Sutherland), 재런 러니어, 톰 짐머만(Tom Zimmerman), 스콧 피셔(Scott Fisher) 등 실제로 가상현실 미디어의 개발에 달려들었던 기술력만큼이나 상상력이 뛰어났던 개발자와 사이먼 페니(Simon Penny)나 올리버 그라우(Oliver Grau) 등의 가상현실 미디어의 역사를 탐구한 동시대 이론가가 상상하고, 구현하고, 규정하려고 했듯이 HMD를 쓴 인류는 오히려 트랜스휴먼에 가깝다. 육체를 빌려 비물질적 육체로서 가상세계에 사유하며 살아가는 존재. 이분법적 도플갱어는 영화와 같은 일방적인 20세기의 미디어가 낳은 인류, 스크린을 응시하는 인류의 삶이었다.

21세기 가상현실 미디어 HMD가 낳을 인류는 디스플레이를 쓴 인류이다. 인간과 가상세계를 시각화하는 디스플레이 장치와 이 양자를 모두 매개하는 컴퓨터 인터페이스가 연합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과 미디어의 결합체이다. 그래서 21세기가 향하는 가상현실은 단순한 과거의 시각적 몰입이 아니라 초월적 몰입이다. 재론 러니어는 1989년 어느 잡지사에서 요청한 인터뷰에서 “가상현실은 텔레비전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을 항상 자연의 지배자로 소환하는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제1원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새롭게 도래할 인류를 위한 선언문의 제1조의 내용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야기 안에 있어요. 그림자들에게 말을 걸면 그들은 대답을 하죠.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야기가 당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봐야 해요. 당신은 이야기 안에 있는 거예요.”

<피그말리온의 안경>에 등장하는 신비한 안경의 발명가 알베르트 루드비그(Dr. Albert Ludwig) 교수는 시각과 소리만이 아니라, 맛과 후각과 촉각까지도 전달할 수 있는 영화 속 세상으로 주인공을 유혹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21세기 관점에서 읽는다면 루드비그 교수의 말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당신은 이야기 안에 있는 거예요”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1세기가 지나서 도래할 디스플레이를 쓴 인류의 삶으로의 초대였다.

(에피소드 2의 예고편은 여기까지입니다. 본편을 기다려 주세요.)

정찬철 chancheol.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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