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이상 이머시브 연극으로 간다

Sooyoung
ixi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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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min readOct 25, 2021

왜 매혹적인 XR 스토리 경험은 이머시브 연극을 닮아 있는가

1.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새로운 경험 방식을 요구한다

XR 경험(실감콘텐츠 경험)은 기존의 미디어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다름’의 본질은 현존감(Presence, 실감)에서 비롯된다. 즉, XR 경험에서는 체험자의 입장에서 ‘내 몸이 콘텐츠 속 세계에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XR 경험에서는 체험자가 콘텐츠 속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설정되느냐가 중요해진다. 기존 영상 미디어(Flat Media)에서 이 부분은 그다지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영상 콘텐츠 속 세계와 체험자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서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XR 경험에서 아무런 맥락 없이 콘텐츠 속 세계의 인물들이 체험자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도록 설정하면 체험자는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이미 내 몸이 그 공간 속에서 다른 인물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반응을 보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이곳에 있는데 왜 이 세계의 사람들은 나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이곳에서 유령으로 존재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맥락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따라서 XR 환경에서 체험자를 어떤 존재로 설정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 지에 대해 창작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존 영상 미디어에서 친숙한 전통적인 3인칭 관찰자 시점 외에도 게임에서 많이 쓰이는 3인칭 전지적 시점과 1인칭(주인공 역할)시점, 그리고 기존 미디어 콘텐츠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던 2인칭 시점(주인공의 친구, 혹은 조력자 역할)까지 등장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ixi에서 최민혁님이 연재하고 있는 ‘스토리 현존의 언어’ 시리즈를 참조하시길)

하지만 체험자 입장에서 XR 경험에 대해 상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1인칭 경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들인 1인칭 경험을 만드는 데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시점을 실험하는 이유는 체험자들이 만족할만한 1인칭 경험을 만드는 일이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스토리 경험을 전달하고자 할 경우 더욱 그렇다. ‘라스트 오브 어스(Last of Us)’ 같은 콘텐츠를 XR로 체험할 수 있게 하면 대박이지 않겠냐고? ‘하프라이프:알릭스’가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체험자는 극 중 주인공 알릭스가 되어 다양한 모험을 직접 하게 되지만 사실상 이야기 전개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을 가질 수 없다. 심지어 생각하지도 않는 말들이 알릭스의 목소리로 나가게 된다. 즉, 체험자는 알릭스의 몸에 깃들어 있는 빙의된 영혼이 되는 셈이다. 스크린 바깥에서 컨트롤러로 알릭스를 조종하는 것과 내가 알릭스의 몸 안에 들어가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스크린 바깥에서 내가 알릭스의 ‘퍼펫 마스터’ 역할을 할 때는 내가 상황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지만 알릭스의 빙의된 영혼으로서 나는 게임 플레이를 하면 할수록 이 세계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체험자들에게 충분한 자유도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스토리를 끌고 나갈 방법은 없을까? 분기형 스토리 구조, 멀티플레이 방식 등 다양한 고민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아직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기에 역부족이다. 모든 체험자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콘텐츠 속 세계관을 마음껏 모험하고 그 안의 인물들과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면서 스토리를 발전시켜 나가려면 결국 스토리 기획자 수준의 AI가 그 안에서 작동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런 AI는 지금 없을 뿐더러 가까운 미래에도 나올 것 같지 않다.

2.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주인공이 되는 경험’들

몇 년 전 왜 방탈출이 매력적인 콘텐츠인가에 대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을 살면서 세상의 주인공이 되볼 일이 없는데, 방탈출을 할 때 만큼은, 그 60분 만큼은 우리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거잖아요”

맞는 말씀! 하지만 그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경험을 꼭 아무도 없는 좁은 방을 탈출하는 형태로만 해야할까? <대탈출>이나 <여고추리반> 같은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경험하는 훨씬 더 큰 규모의 모험을 우리는 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미 그런 경험들을 제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er)이다. <슬립 노 모어>나 <위대한 개츠비>와 같은 공연들은 넓은 공간, 그리고 그 안을 채우는 배우들을 통해 체험자 개개인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 같은 경험을 만들어 준다. 심지어 극 중에서 체험자들이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그게 가능한 이유는배우들이 체험자에게 직접 말을 걸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로 안내하고 심지어 때로는 오직 그 체험자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1:1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머시브 연극에서는 배우들이 앞서 언급한 ‘AI 스토리 기획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정해진 이야기(혹은 세계관)의 테두리 안에서 배우들은 체험자들과 직접 대화하고 행동을 이끌어 낸다. 그들은 정해진 대사를 반복하는 대신 체험자들의 반응에 따라 조금씩 디테일과 순서를 바꾼다. 체험자들은 혼자서라면 직접 알아내기 어려웠을 극 중 세계의 비밀들을 배우들의 도움을 받아 더 빨리 알아내게 되며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매 공연마다, 체험자 마다 그 경험은 달라진다. 심지어 같은 체험자가 공연을 여러 번 경험한다고 해도 만나게 되는 인물들의 순서나 들르는 공간들의 타이밍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고 그 차이에 의해 경험의 형태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2019년 국내 초연 시 화제가 된 이머시브 공연 <위대한 개츠비>

별다른 기술적 장치 없이 ‘배우’들의 역량을 활용해 이러한 경험을 만들 수 있다면 XR에서도 그런 경험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XR 스토리 기획자들은 바로 그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XR 콘텐츠 페스티벌 중 하나로 꼽히는 선댄스, 트라이베카, SXSW, 베니스 등은 매년 ‘XR 이머시브 공연’ 라인업을 선보이고 있고 그 라인업들이 전체 행사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베니스 VR Expanded는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2년 연속으로 ‘최우수 VR 경험상’을 이머시브 공연에 건넸다. 올해 SXSW VR 부문 관객상 역시 이머시브 공연에게 돌아갔다.

3. XR 이머시브 연극의 짧은 역사(2017~2021)

XR 이머시브 연극이 처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17년 경이다. 불과 5년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지만 XR 이머시브 연극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진화하며 대중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First Wave(2017~2019)

2017년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최초 공개 된 ‘드로우 미 클로즈(Draw Me Close)’는 사람들을 깜짝 놀래켰다. 그때까지 VR 경험이 사전에 제작된 콘텐츠를 감상하는 것이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극 중 인물이 갑자기 체험자를 껴안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VR의 실시간 모션 트래킹 기능을 활용하여 모션캡쳐 수트를 입은 배우를 현장에 넣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이런 경험 구현이 가능해졌다. 비슷한 시기 유사한 아이디어가 연이어 등장했다.

같은 해 여름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앨리스(Alice, The Reality Play)’ 역시 VR로 구현된 공간에 모션캡쳐 수트를 입은 배우가 실제 연기를 하고 관객은 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았던 마티아스 셸부르(Mathias Chelebourg)는 이듬해 바오밥 스튜디오와 협력을 통해 ‘잭과 콩나무’ 이야기를 활용한 ‘잭 VR(Jack VR)’이라는 작품을 내놓는다. 이 작품에서 체험자는 주인공 ‘잭’의 역할을 맡는데 1인 다역을 소화하는 배우와 실시간으로 의사소통함으로써 정해진 각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잠시 동안 정말로 ‘잭’의 삶을 살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드로우 미 클로즈(Draw Me Close)
앨리스(Alice, The Reality Play) 트레일러
앨리스 제작영상(Behind the Scene)
잭 VR 티저
잭 VR 관객 체험 영상(cnet 리뷰)

국내에서도 이러한 트렌드를 재빨리 포착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2018년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서 제작한 ‘The First Crisis’는 2명의 모션캡쳐 배우가 연기하는 가운데 1명의 체험자가 참여하는 형태로 극이 진행된다.

일련의 사례들을 통해 창작자들은 체험자 입장에서 이 경험이 얼마나 파워풀 한 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문제는 이 경험을 널리 알리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정교한 실시간 모션캡쳐를 위해서는 고가의 광학식 모션캡쳐 설비가 필요했고 체험자와 배우가 반드시 한 공간에 있어야만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잭 VR’은 트라이베카 영화제 공개 당시 큰 화제를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다른 국가에서 다시 공연되지 못했고 앞서 언급한 다른 XR 이머시브 연극 작품들 역시 ‘재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실 필자 역시 Draw Me Close와 Alice, 그리고 Jack VR 모두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다)

Second Wave (2020~2021)

2019~20년 사이 XR 이머시브 연극 경험이 주는 장점은 살리되, 좀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 되었다. 2019년 11월 오큘러스 및 스팀에 정식 출시되어 최초의 ‘상용화’ 된 XR 이머시브 연극 콘텐츠가 된 ‘언더 프레젠트(The Under Presents)’는 온라인 상에서 배우와 체험자가 동시 접속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의 형식을 차용한다. 배우와 체험자가 서로의 몸을 직접 느낄 수는 없지만 온라인 상에서 서로 실시간으로 목소리로 대화하고 아바타를 통해 접촉할 수 있다. ‘언더 프레젠트’를 제작한 텐더클로우는 한발 더 나아가 2020년 ‘언더 프레젠트’ 내에서 ‘템페스트(The Tempest)’라는 별도의 공연을 런칭한다. 이 공연에서 배우는 일종의 쇼 호스트 역할을 하며 5~6명의 참여자(관객)들을 이끌어 나간다. 이 시도를 통해 텐더클로우는 XR에서는 콘텐츠(공연)가 다시 플랫폼(극장)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하지만 ‘언더 프레젠트’와 같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XR 게임을 직접 개발할 수 있는 개발역량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모든 스토리 기획자, 혹은 공연 기획자가 게임 개발역량을 갖출수는 없는 일. 그러자 창작자들은 기존 XR 플랫폼 중에서 공연장으로 활용할 만한 기능을 제공하는 곳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The First Crisis’에 이어 한예종이 제작한 XR 이머시브 공연 ‘허수아비(Scarecrow)’는 2020년 선댄스 영화제 초연 당시 앞선 XR 이머시브 연극처럼 현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지만 그해 가을 레인댄스 영화제에서는 기성 VR 서비스인 VR 챗(VR Chat)을 활용한 포맷을 선보였다.

같은 해 여름, 베니스 영화제에서도 VR 챗을 활용한 XR 이머시브 연극인 ‘파인딩 판도라 X(Finding Pandora X)’가 첫 선을 보였다. 기존의 XR 이머시브 연극이 체험자와 배우가 실시간으로 의사소통하고 교감하는 경험에 집중했다면 ‘파인딩 판도라 X’는 배우가 연기하는 극 중 캐릭터인 제우스, 헤라와 함께 체험자들이 직접 사건을 해결하는 데 좀 더 비중을 둔다. 그 과정에서 방탈출 게임에서 나올 법한 퍼즐 등도 활용하면서 XR 이머시브 연극이 가진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서의 잠재력이 좀 더 부각된다. 올해 열린 SXSW 2021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파인딩 판도라 X’는 이후 업계 관계자가 아닌 일반을 대상으로 한 상용 유료 공연을 런칭한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XR 콘텐츠 대비 고가인 55달러로 책정된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 사례를 기록했고 최근 2차 공연이 시작된 상황이다. (공연일정은 여기 참조)

The Under Presents Trailer
The Under Presents : The Tempest Trailer
파인딩 판도라 X 트레일러

2021년 들어서도 새로운 XR 이머시브 공연이 계속 등장하고 있고 상용화로 연결되는 사례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올해 트라이베카에서 최초 공개 된 ‘The Severance Theory : Welcome to Respite’ 역시 VR 챗을 활용한다. 이 작품은 앞서 1인칭 주인공 경험 디자인을 할 때 겪게 되는 어려움인 ‘빙의’로 인한 체험자의 어색함을 오히려 적극적인 콘텐츠 요소로 연결시킨 사례이다. 극의 주인공은 다중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또 어떤 인격이 나올지 걱정하면서 동시에 아이가 자신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참여자가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면 극 중 아이는 자신의 자아를 잃고 다른 인격, 즉 참여자의 인격이 발현되는 셈이 된다. 체험자가 아이인 척 하고 싶어도 당연히 사전 지식이 없기에 부모들이 언급하는 예전 추억 등을 떠올릴 수 없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소통의 단절과 안타까움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체험자는 다중인격장애 가정의 삶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The Severance Theory : Welcome to Respite Official Trailer

작년 ‘파인딩 판도라 X’에 이어 올해 베니스 베스트 VR 경험상을 수상한 ‘LE BAL DE PARIS DE BLANCA LI’는 19세기 말, 혹은 1920년대 개츠비 시대를 연상시키는 35분 짜리 XR 이머시브 무용극이다. 베니스에서는 두 가지 버젼이 공개되었다. 배우들이 직접 접속하지 않는 온라인 버젼, 그리고 10명의 관객들과 2명의 무용수가 동시에 접속하는 오프라인 버젼. 베니스 영화제 기간 중 온라인 버젼은 누구나 체험할 수 있도록 공개되었고 오프라인 버젼은 현지극장에서 물리적인 공연 형태로 열렸다. 이 오프라인 공연 버젼은 영화제 직후 프랑스에서 상용 공연으로 다시 런칭하여 현재 진행 중이다. (공연일정은 여기 참조)

XR 이머시브 연극의 짧은 역사(2017~2021)

4. 이머시브 연극에서 이머시브 엔터테인먼트로

사실상의 코로나 종식이 예상되는 2022년은 명백히 오프라인 경험이 다시금 부상하는 해가 될 것이다. 이머시브 연극은 코로나 직전까지 대중적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던 장르였고 잠시 중단됐던 그 트렌드는 내년에 본격 재개될 전망이다. 이머시브 연극 분야의 글로벌 리더라 할 수 있는 ‘펀치드렁크’와 ‘시크릿 시네마’는 이미 차기작을 각각 발표한 상태다.

코로나 이전 ‘HBO 웨스트월드 SXSW(2018)’ 등을 통해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기존 영상 콘텐츠들의 ‘이머시브 연극’ 확장 프로모션, 그리고 외식 등 기성 브랜드들의 이머시브 연극 활용 역시 이미 ‘위드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 10월 21일부터 홍콩 페닌슐라 호텔 레스토랑 ‘펠릭스(Felix)’에서 시작한 ‘위대한 개츠비: 이머시브 다이닝’은 그 신호탄 격이라 할 만 하다.

2018년 SXSW 기간 중 공개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HBO 드라마 ‘웨스트월드’의 오프라인 프로모션 이벤트. 극 중 ‘웨스트월드’를 텍사스 사막 한가운데 실제로 구현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아미 오브 더 데드’ 프로모션을 위한 VR 체험시설 Viva Las Vengence (2021)

다만 2022년에 오프라인 트렌드가 돌아온다고 해도 지난 2년 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동안 발전한 XR 기술은 훨씬 저렴한 비용에 훨씬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오프라인 이머시브 연극 경험에 제공할 수있다. 동시에 대중 관객과의 접점을 이제 막 찾기 시작한 XR 이머시브 연극들은 오프라인 공간과의 연계를 통해 좀 더 확실하게 대중들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오프라인 이머시브와 온라인 XR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이 흐름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경험 전반이 ‘이머시브 엔터테인먼트’로 진화해 갈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볼 수 있다.

지난 2018년, 이머시브 연극의 빠른 성장세에 힘입어 ‘이머시브 디자인 서밋(Immersive Design Summit)’이라는 행사가 최초로 개최된 바 있다. 그 이듬해부터 주최 측은 ‘이머시브 엔터테인먼트 리포트’라는 연례 보고서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2019년 결산을 담은 ‘2020년 보고서’는 이제까지 각각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되던 이머시브 콘텐츠들을 ‘이머시브 엔터테인먼트’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을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당시 그들이 분류한 이머시브 엔터테인먼트 영역에는 이머시브 연극, 체험형 미술/박물관 뿐 아니라, 방탈출, 공포체험시설, VR/AR, 테마파크, 테마형 레스토랑 및 바, 체험 마케팅 등이 포함된다. 이머시브 디자인 서밋은 2020년 이러한 카테고리 변화를 반영하여 ‘HERE 서밋’으로 명칭을 바꾸고 한층 확장된 행사를 계획했으나 코로나 발발로 행사 직전 취소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리고 얼마 전 다시 ‘The Next Stage’로 이름을 바꾼 행사를 내년 1월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곳에서 ‘이머시브 연극에서 이머시브 엔터테인먼트’로의 진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지 궁금해진다.

배우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AI가 등장한다면 또 세상은 어떻게 바뀔 지 모른다. 하지만 향후 10년 내 그런 AI는 등장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최소한 앞으로 10년 동안은 뛰어난 ‘인간’ 배우들과 XR 기술, 그 둘의 결합으로 생성될 XR 이머시브 연극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즐겁게 해줄 지 마음껏 기대해 봐도 좋겠다.

2022.3.2 Update
지난 12월 The Next Stage Summit은 오미크론 유행 초기와 맞물려 결국 행사가 전면 취소되었다. 행사를 준비하던 핵심 인력은 현재 노프로시니엄(No Proscenium)에브리띵 이머시브(Everything Immersive)라는 두 사이트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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