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The Severance Theory: Welcome to Respite

Ji-kyung Na
ixi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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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in readNov 22, 2021

The Severance Theory: Welcome to Respite연극이 원작인 작품으로, 해리성 정체장애를 겪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베니스 영화제를 통해 작품과 기존 연극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보자마자 어떤 매체보다 이머시브 씨어터에 적합하다고 느꼈다. 작품은 극의 주요 등장인물인 ‘알렉스’ 역할을 관객에게 넘겨준다. 관객은 어떤 사전 준비를 하지 않아도 체험자이자 배우로 자연스럽게 가정에 녹아들어 그들의 일부가 되는데, VR을 활용한 공연의 과정 자체가 이 작품의 특성을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잘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머시브 씨어터의 특성상 사전 예약된 소수의 인원만 체험을 할 수 있어 베니스 영화제 기간에는 제작진의 인터뷰와 체험자들의 후기로만 내용을 가늠하다가 운이 좋게도 지난 10월 레인댄스 이머시브 페스티벌을 통해 프리미엄 티켓 예매에 성공해 주인공인 알렉스 역할을 체험해볼 수 있었다.

  • 사전운영

주인공 알렉스 역할에 해당하는 프리미엄 티켓은 타임별 1명만 예약이 가능하고, 그 주변을 서성이는 관찰자들은 일반 티켓으로 여러명 예약이 가능하다. 내 타임에는 4명의 관찰자가 접속했다.

티켓을 구입하면 운영팀에서 안내 메일을 보내준다. 안내 메일에는 공연이 진행되는 소셜 VR 플랫폼인 브이알챗의 튜토리얼과 접속 방법이 세세하게 적혀있어 브이알챗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찬찬히 따라하면 어렵지 않게 접속할 수 있다.

공연 당일 정해진 시간에 브이알챗에 접속해 친구 목록에서 사전에 추가해둔 운영진을 찾아 해당 공연 월드로 입장한다.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곰돌이 운영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약간 요란하게 인사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새벽 시간이라 그렇게 느꼈던 것 일 수도 있겠다. (유럽 공연이라 한국 시간으로 새벽 3–4시에 진행되었다.)

체험자를 맞이하는 운영진의 모습 (출처: 직접 스크린샷)

곰돌이는 끊임없이 말을 하며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다가 다른 체험자가 접속하자 나를 반겼던 것과 같은 모양새로 달려가 인사를 건넸다. 이를 여러번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나도 새로 접속한 체험자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 날의 예약자들이 모두 모이면, 레고 모습을 한 운영진 한 명이 더 나타나 인사를 하고 각자 설정창에서의 세팅 설정을 도와준다. 나와 다른 체험자 모두 브이알챗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어서 운영진들의 설명을 바로 알아듣고 세팅을 했지만 작품을 위해 처음 접속한 사람들은 살짝 헤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할 분장 공간, 피부색을 선택할 수 있다. (출처: 직접 스크린샷)
사전 설정을 도와주는 운영진의 모습 (출처: 직접 스크린샷)

이후 운영진들은 알렉스 체험자와 관찰자 체험자를 분리해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는데 이 단계에서 체험자는 각자 맡은 역할로 분장한다. 역할에 맞는 아바타(나의 경우 알렉스)로 바꾸기, 앉기, 물건집기, 던지기, 마이크 끄지 않기 등의 기본 조작법을 익히고 연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참여해주기를 당부받는다.

그렇게 다시 돌아간 처음의 장소에서 다른 체험자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마 다른 공간에서 투명한 형태의 아바타로 변신을 한 모양이다. 이제 두 운영진은 나를 알렉스로 부르며 공간과 상황에 대한 마지막 안내와 함께 유유히 사라진다. 이들이 완전히 사라지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 체험자의 인터랙션

이야기가 주로 진행되는 공간은 알렉스의 집이지만 일련의 단계를 거친 후에 알렉스의 집에 도착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는 알렉스의 도움이 필요하다.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보이는 빛에 다가가고, 카일의 목소리에 맞춰 책을 열어보는 등의 직관적인 개입으로 장면을 전환하는 것은 온전히 체험자의 역할이다. 단순히 트리거를 한 번 누르는 ‘클릭’을 하는 것 뿐이지만 내가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다가왔다.

집에서 마주친 엄마는 너무도 상냥하게 나를 대하며 여러 질문을 했는데 그런 과장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고마웠지만 왠지 모르게 살짝 무섭기도 했다. 초반의 나는 도통 어떻게 대답하고 반응해야할지 몰라 말을 더듬거리기만 했다. 방 침대에 눕다시피 앉아 HMD를 끼고 있던 나는 처한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 자리를 고쳐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그 순간의 기분이 알렉스와 닿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마주친 엄마의 모습 (출처: 직접 스크린샷)
아빠의 모습 (출처: 직접 스크린샷)

우리의 곁을 맴도는 관찰자들에게도 역할이 있다.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된 이후 내게는 사전 세팅을 함께했던 다른 체험자들의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으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딱히 받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극의 후반부에 맞닥뜨린 소름끼치는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며 컨트롤러를 쥐고 흔들다가 메뉴버튼을 실수로 누르면서 일종의 투명인간 아바타를 한 관찰자들이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몰입이 깨진다기보다는 혼자가 아니라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만약 그 때 실수로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면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눈을 감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관찰자들의 모습 (출처: 직접 스크린샷)

관찰자들은 내게 다가오는 어떤 존재를 두드려 패주고 있었다. 해당 씬의 설정상 움직일 수 없었던 내 입장에서는 그 역할도 꽤 재밌어보였다. 관찰자들이 알렉스 가족을 바라보기만 했더라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을테지만, 극의 전개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어떤 역할을 주는 방식을 활용한 부분이 특히 좋았다.

  • 체험자의 돌발행동

엄마와 아빠가 어느정도 편해진 나는 슬슬 장난칠 궁리를 했다. 엄마가 준 장난감을 집어 던지고, 요리하는 것을 방해하고, 아빠가 꺼낸 술을 뺏어 마시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엄마 아빠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자연스러워 장난칠 맛이 났다. 이내 이 정도의 행동들은 다 계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좀 더 심한 장난을 치거나 어딘가에 숨어보려고도 했지만 너무 과하게 했다가 작품 진행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더 하지는 않았다.

엄마를 방해하는 모습 (출처: 직접 스크린샷)
아빠가 꺼낸 술을 뺏는 모습 (출처: 직접 스크린샷)

마침 내가 알렉스를 맡은 타임에 지인이 관찰자로 참여했는데, 그는 운영진(배우)과 내가 사전에 대본에 관해 어느정도 이야기를 맞췄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더 과감하게 행동해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사실 실제 대면한 상황에서의 나였다면 그렇게 장난을 칠 생각을 아예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원래의 나는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고, 나대는 것을 싫어해서 첫 만남에 그렇게 말을 많이 하지 못한다. 거기에다 나를 지켜보는 관객들이 있다면? 아니, 애초에 알렉스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실물 공연에서 ‘알렉스’ 역할를 맡은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엉거주춤 엄마와 아빠를 따라다니다가 말 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끝났을 테지만, 몽롱한 새벽 시간에 HMD라는 가면을 착용하고 있어서인지 평소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 나와버렸다.

주체험자는 특별한 준비 없이 이렇게 공연에 참여하는 것 자체만으로 적어도 3개의 정체성(실제의 나, 익명의 가면을 쓴 나, 알렉스)을 가진다. 이것만 봐도 VR이라는 매체에 적합한 작품이 아닐 수가 없다.

그나마 지인이 관찰자로 참여해 나를 보고있다는 것과 기록용으로 내 화면을 녹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나를 다 놓지 못한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에서 꽤 까불었던 것 같다. 익명성이 주는 힘은 실로 엄청나다.

물론 알렉스가 엄마와 아빠에게 적절한 반응을 해주어야 공연이 무난하게 진행되겠지만, 매 공연마다 다양한 알렉스들을 만나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극을 풀어가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기도 하니 체험자들은 공연 중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대신 마음 가는 대로 참여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 하다.

다른 알렉스들은 어떤 식으로 참여했을까? 기회가 된다면 관찰자 시점에서도 체험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 소품의 활용

집에는 장난감, 그림 도구, 주방 도구 등 내가 만질 수 있는 소품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것들을 만지는 것 만으로 주변 환경이 바뀌지는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내게 소품들을 가져오거나, 어딘 가로 데려가 무언가를 해보라고 권유하는 식이었다.

엄마가 건네준 소품 (출처: 직접 스크린샷)

엄마와 아빠가 대화를 할 때 혼자 돌아다니면서 거실의 소파에 앉거나, 자잘한 소품들을 집어보려고 해봤지만 가능한 것은 없었다. 진행에 방해가 되거나 정신이 없어질까봐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이야기에 필요한 소품들만 잡을 수 있게 해둔 점은 조금 아쉬웠다.

  • VRC 월드 빌딩

이 작품으로 브이알챗을 통한 이머시브 씨어터를 처음 체험해보아서 보통 어떤 식으로 월드를 제작하고 공간을 구성하는지 잘 몰랐다. 공간이 바뀐다면 포털로 이동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본격적인 공연의 무대가 되는 월드는 하나 뿐이었다.

포털을 통해 운영진들이 모든 체험자를 한 번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 시키는 일은 간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쉽지 않다. 접속 오류가 생길 수도 있고, 플랫폼이 익숙치 않아 중간에 낙오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많은 관객을 수용하기 위해서 체험자가 운영진(배우)보다 많이 접속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월드에서 진행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크레딧 공간으로 향하는 포털 (출처: 직접 스크린샷)

이 작품에서도 공연이 다 끝난 뒤에 다음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해 포털을 한 번 사용하기는 하는데, 시커먼 우주 공간에 ‘CREDITS ROOM’이라고 적힌 문 하나만 보이게 해두고는 모두에게 얼른 저쪽으로 들어가라고 반복적으로 말을 한다. 이것이 극 중간에 포털 이동을 넣지 않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공간이 입체적으로 변하는 모습 — 1 (출처: 직접 스크린샷)
공간이 입체적으로 변하는 모습 — 2 (출처: 직접 스크린샷)

이 외에도 사람이 아닌 주변 공간이 움직이는 설정이 알렉스의 상황과 잘 어울리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요소들을 고려해 디자인한 월드 안의 개체들이 날아오르고, 펼쳐지는 식의 입체적인 장면 전환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전환에는 운영자의 컨트롤과 주체험자의 개입이 적절하게 사용되었고, 중간 중간의 장면들에서는 세트 무대에 있는 듯한 연극적인 느낌도 들어 이머시브 씨어터 입문자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다.

작품 설명을 해주는 운영진 (배우와 운영진은 모두 한 사람이다) (출처: 직접 스크린샷)

공연이 끝나면 엄마, 아빠를 연기했던 배우이자 초반 가이드였던 운영진들이 다시 나타나 브이알챗 안에 제작된 작품 공식 월드로 안내한다. 작품과 제작진들(프로듀서, 공연 진행 스태프, 배우를 한 사람이 모두 맡고, 2명씩 짝지어 3팀으로 번갈아가며 공연을 올린다.)에 관한 소개 후, 공식 월드 탐험을 하고나서 간단한 질문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모두와 인사를 하고 HMD를 벗어보니 시간은 약 1시간 20분이 지나있었다.

새벽의 신호로 창문이 파랗게 물들고 있었는데 믿거나 말거나 나는 육성으로 “와 진짜 재밌다!”고 소리쳤다. 비교 대상이 없어 이 경험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작품을 거친 후에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VR만이 가능한 요소들을 공연에 적절히 활용한 것이 좋았다.

막연하게 상상만 해온 미지의 세계를 살짝 맛 본 느낌이다. 앞으로 이머시브 씨어터 작품들이 얼마나 어떻게 더 발전할 지 궁금해진다. 12월로 예약해둔 또 다른 작품인 Finding Pandora X는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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