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현존의 언어 : 목격자

VR 영화의 스토리텔링 Ep.3

Che Minhyuk
ixi media
10 min readApr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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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콘텐츠의 상호작용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게임적인 것’을 많이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이머시브 스토리텔러들이 개척하는 스펙트럼의 일부일 뿐이다. VR 환경에서 관객은 스토리 세계 속에 현존(presence)하며 관객 자신의 몸을 스토리 경험의 인터페이스로 활용한다. 키보드나 마우스, 터치스크린을 통해서 아바타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의 실시간적 움직임이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이 때 생겨나는 상호작용의 가능성은 지금까지 우리가 다른 매체를 통해 경험해 왔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식과 감각들을 불러 일으킨다.

VR 영화 속 관객의 정체성과 역할, 능력과 감각, 캐릭터와의 관계를 탐구해 나가는 이 시리즈는 본질적으로 ‘서사와 상호작용의 만남’이 관객 경험의 혁명에 기반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런데 그 관객 경험의 변화는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 참여하고 이야기에 개입 하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동적인 ‘목격자(witness)’나 ‘구경꾼(spectator)’의 입장과 유사하면서도 현존의 상상력은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창조적인 시도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번 에피소드는 평면적 매체의 ‘목격자’를 인터랙티브한 목격자로 재발명하는 이머시브 스토리텔링의 지향점에 대해 다루려 한다.

1. 캐릭터의 감각 속으로 들어가는 목격자

https://uploadvr.com/dispatch-intense-episodic-vr-series-available-now/

언제나 필자의 최상위 리스트에 있는 Here Be Dragons 스튜디오의 작품 <디스패치(Dispatch)>(2017)에서 목격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극중 캐릭터의 감각 속에 ‘현존’하는 것이 된다. 911 상황실 접수원으로 일하는 Ted는 위급한 상황에 빠진 피해자의 신고전화를 받으며 경찰이 그를 구해낼 때까지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휘말리곤 한다. 청각 정보를 통해 현장을 생생하게 상상하는 Ted는, 한편으로는 처절한 폭력 현장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기에 대상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다는 것에 심한 좌절감을 느낀다.

© Oculus

관객은 Ted의 입장이 되거나 옆에서 그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Ted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야말로 가상현실 공간 안에 서 있다. 그 현실은 온전히 재현된 구상적 현실이 아니라 현장으로부터 들려오는 상황을 기반으로 그려지고 변형되는 불완전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목격하되 온전히 목격할 수는 없다. 어둠의 공간에서 형성되는 추상적인 와이어프레임들을 통해 상황을 ‘목격하고자’ 주변을 살피고 추리하고 숨죽인채 바라보고 위급한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 요소들에 온 감각을 집중해야 한다.

<디스패치>에서 관객은 상황을 ‘목격’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동원하는 관객이며 동시에 캐릭터의 감각 속에 ‘현존’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2. 스토리 경험의 관점을 선택하는 목격자

게임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라면서 시작하는 <인비저블 아워스(The Invisible Hours)>(2017)는 극중 인물인 니콜라 테슬라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힌 7명의 인물들 속에서 진실을 탐색해 나가는 경험이다. 관객은 누가 범인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테슬라 저택에 초대된 각 인물들을 유령처럼 쫓아다니며 관찰할 수 있는데 그들은 결코 관객을 알아차릴 수 없다.

무대가 따로 없이 관객과 배우가 같은 공간 (스토리 세계) 안에 존재하고 관객 자신이 원하는 관점을 통해 이야기를 체험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머시브 연극의 경험과 유사한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관객은 시간을 되돌리거나 빠르게 흐르도록 조작할 수 있고 전체 무대의 어느 곳이든 이동할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된 존재가 된다.

평면적 매체에서 관객은 스토리 세계의 외부에서 연출자가 디자인한 프레임을 통해 안쪽을 목격하는 입장이었다. 이제 스토리 세계 내부에 현존하는 관객의 입장을 두고 단순하게는 고스트냐 아바타냐로 나누어 이야기 하곤 하는데 <인비저블 아워스>나 비슷한 형식인 <일레븐 일레븐(Eleven Eleven)>(2019)에서의 관객은 ‘시간을 조절하고 어디든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초월적(?) 고스트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지만 스토리 경험의 관점을 선택하는, 그 선택 자체를 인터페이스로 지니고 있는 존재. 이런 포맷은 각 관객의 수만큼 다양한 경험의 결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일 것이다.

3. 다중감각을 통해 목격하는 것이 곧 스타일

일관된 법칙이나 통일성에 구애 받지 않는 과감한 연출로 가득한 <배틀스카(Battle Scar)>(2018)는 가히 VR 문법의 최전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70년대 뉴욕 펑크씬을 배경으로 하는 두 소녀 루페와 데비의 이야기 속에서 관객은 아마 자신의 입장을 인지하기에는 너무나도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현란한 스타일에 압도될 것이다. 몸이 없는 1인칭 시점의 루페였다가 루페와 데비를 3인칭 시점으로 바라 보았다가를 오가고 ‘거인’처럼 디오라마를 내려다보는 스케일과 노멀한 사이즈로 그 공간에 서 있는 스케일 간의 감각적인 교차를 통해서 이야기의 리듬을 따라 ‘목격’ 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혼합하고 다양한 샷 사이즈를 동시에 보여주며 VR의 공간을 균질한 세계가 아닌 꼴라주의 캔버스처럼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다. 여기서 관객은 다양한 관람 태도를 요청 받는다. 뉴욕 골목 어딘가에서 몸이 고정된 유령처럼 가만히 서서 루페와 데비를 바라보다가 디오라마로 구현된 상황이 펼쳐지면 그 안 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인터랙티브하게 몸을 움직인다. 그러다 갑자기 루페의 입장이 되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데비를 바라보기도 하고, 팝업북이 된 나의 일기장 안에 살고 있는 루페와 데비 쪽으로 고개를 넣어 들여다 보기도 한다.

© Oculus

<배틀스카>에서 목격한다는 것은 다중적인 관람의 인터페이스에 적응하는 체험이고 그렇게 관객이 몸으로 반응해 나가는 경험들은 비로소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리듬과 에너지에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비밀을 알고 있는 목격자

목격자에서 출발했지만 플롯의 핵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도 가능하다. 스토리 세계 안으로 들어간 목격자는 엄밀히 말하면 이야기에 개입하거나 플롯을 건드리지는 않는 중간지대에 머문다. 말하자면 그곳이 목격자를 위한 스토리 현존의 공간이다. 즉 극중 인물들이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이다. 마치 이머시브 연극 <슬립 노 모어>에서 가면을 쓰고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극중 인물이 나를 알아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화들짝 놀라게 될 것이다. 이런 경험의 가능성을 잘 보여준 사례는 초기 Oculus Story Studio의 작품인 <Lost>(2016)다. 잃어버린 손을 찾던 거대 로봇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유가 내 앞에 있던 로봇의 손이었다고 알게 되는 순간 갑자기 그 거대한 로봇이 나를 주시한다. 갑자기 나의 정체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된다.

© Oculus

만약 관객이 결정적 비밀을 알고 있는 목격자라면 어떨까. 이야기가 클라이막스로 진행될 수록 관객인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이 결정적인 것임이 드러나고, 범인이 나를 제거해야 하거나 혹은 내가 반드시 증언을 해야만 한다면? 내가 증언을 하는 것이 딜레마가 된다면 ‘망설임’과 같은 내면의 갈등이 상호작용의 핵심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목격자라는 입장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서사와 맞물려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변부에서 이야기 안 쪽으로 깊숙히 말이다.

스토리 현존의 공간 : 선에서 공간으로

스토리 경험이라는 것의 일반적인 속성은 주인공이 겪는 사건과 변화의 여정을 목격하며 따라가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그의 선택을 응원하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며 가슴 졸이기도 한다. 불확실한 삶에 맞서고 갈등하고 끊임없이 선택해내는 삶의 성질을 모방하여, 어쩌면 주인공은 관객 대신 그것을 겪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VR의 관객이 인터랙티브한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해서 주인공의 선택을 대신 좌지우지 하는 입장에 서버린다면 스토리 경험의 많은 요소들은 성립하지 못한다. 공간적인 위상으로 따지자면 관객은 주인공의 자리가 아닌 플롯의 주변부에 있게 되는 것이다. 캐릭터가 인지하는 세계와 스토리 바깥 세계 사이, 말하자면 현실과 가상이 만나는 접경의 공간에서 말이다. 그곳에서 목격자는 반딧불이 될수도 있고 지나가는 행인이 될 수도 있고 작은 램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선(line)으로 체험하는 평면적 인터페이스에서 상호작용이 플롯에 개입하는 ‘선택’의 문제가 된다면, 이야기를 공간(space)으로 체험하는 인터페이스에서 상호작용은 그곳에서의 삶의 감각을 입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VR은 목격자로서의 관객을 재발명한다.

인터랙티브 구경꾼 혹은 캐릭터의 감각을 체화한 존재, 이야기의 리듬을 따라 변화하는 관객 혹은 비밀을 알고 있는 목격자로 만들며 스토리 현존의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는’(Story-Living) 자유를 선사한다.

다음 이야기 : 조력자(Helper)

이 글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경험할 수 있는 곳

디스패치(Dispatch)
오큘러스 스토어(리프트)에 공개되어 있다.

인비저블 아워스(Invisible Hours)
오큘러스 스토어(리프트), 스팀, 플레이스테이션VR 용으로 공개되어 있다.

일레븐 일레븐(Eleven Eleven)
오큘러스 스토어(리프트), 스팀용으로 공개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 대해 지역 블록이 걸려있다.

배틀스카(BattleScar)
‘BattleScar’ 최종 버젼은 2021년 초 오큘러스 스토어스팀에 유료 공개되었다. 리프트 시리즈, 또는 퀘스트 시리즈를 통해 경험 가능하다.

Lost
오큘러스 스토어(리프트)에 공개되어 있다. 현재 무료. 오큘러스 TV를 통해 오큘러스 퀘스트 등 스탠드얼론 기기로도 감상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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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 Minhyuk
ixi media

VR Film Director, Immersive Storyteller, Volumetric Capture Produc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