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샌프란시스코 Day 4
Day 4는 Nudge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인 이유를 수긍하게 하는 하루였다.
Day 3 초반부터 수면 패턴이 흔들린 여파가 클 테지만 오전부터 몸이 무거웠다. Day 3 초저녁부터 잠들었다가 중간중간 일어나긴 했지만 결국 오전 늦게까지 잤으니 적게 잔 건 아닌데 몸이 보내는 신호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 없이 숙소 앞 뮤니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뮤니 버스를 타고 시청 인근을 한 번 더 구경할까, 드 영 박물관이 있는 큰 공원 쪽을 가 볼까 고민하다 살살 알라모 스퀘어Alamo Square로 걸어가서 페인티드 레이디스Painted Ladies를 보기로 했다.
지도에서 보는 것만큼 가까운 느낌은 아니었지만 걸어서 갈 만했다. 가는 길에 스타벅스에 들러 Iced Latte를 한 잔 사서 마시며 걸었다. 확실히 스타벅스의 위세는 서울이 대단하다. 도로와 골목의 너비, 여유는 샌프란시스코가 확연히 우월한데 스타벅스 매장의 규모는 서울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서울이 그만큼 혼잡하고 인구 집약적이란 얘기겠지. 샌프란시스코도 시내에 스타벅스가 몇 블록마다 있긴 하지만 매장 하나하나가 서울처럼 큼지막하진 않다. 이해는 된다. 샌프란시스코는 서울 대비 집 한 채당 여유 공간이 훨씬 넉넉하니 카페로 내몰릴 필요가 없다.
공원까지 걷는 동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공원엔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 페인티드 레이디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아예 자리를 깔고 쉬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원 가운데 놀이터가 있어서 아이들도 보였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본 몇 개 공원 중 가장 예쁜 공원이었다. 페인티드 레이디스는 건축사를 잘 몰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리 대단할 건 없었다. 내부를 볼 수도 없고. 그래도 예쁘장한 건물 몇 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나름 괜찮았다.
나온 김에 좀 더 걸어보기로 했다. 따뜻한 국물이 나오는 음식을 먹은 지 며칠 지난 것 같아서 제팬타운으로 걸어가서 탄포포라는 여행 가이드에 나오는 일본 라면 식당에 갔다. 맛이 별로 없었다. 아, 나의 연희동이여. 굳이 연남동까지 나가지 않아도 훨씬 더 괜찮은 일본 라면을 먹을 수 있는데. 돈이 아까웠다. 그리고 Nudge. 차슈 토핑을 추가하지 말고 기본 라면만 먹는 게 낫다고 분명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문할 때 내 입은 차슈 토핑 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슈의 질과 맛은 평균 이하였다. 국물도 별로.
기껏 연희동보다 비싼 돈 내고 일본 라면을 먹었는데 안 먹은 만 못해서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어쨌든 기운을 내는 데 도움은 되었는지, 걸어서 계속 북쪽으로 가보고 싶었다. 가는 길에 랄프 로렌에서 클래식 폴로 셔츠를 샀다. 40% 할인 덕분에 괜찮은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매장은 아기자기했고 점장 아저씨는 멋지게 차려입은 세련된 분이었다. 귀찮아서 눈으로 보고 L 사이즈로 사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짚어 줘서 M으로 고쳐 살 수 있었다. 아메리카에선 나도 M이구나. 베트남 사이즈로는 L도 달라붙을 때가 많던데. 사이즈는 늘 헷갈린다. 결제할 때 터치스크린에 USD 결제를 원하는지 KRW 결제를 원하는지 물어보는데, USD가 유리하다. 몇천 원 남짓이지만 아낄 수 있었다.
근처 키엘에 가서 75 ml 토너도 하나 샀다. 며칠 동안 LAB 올인원 하나로 버티고 있었는데 보습이 부족해서 얼굴이 따가운가 싶어 남은 여정을 위해 샀다. 키엘의 체감 가격은 한국보다 괜찮았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한국 백화점의 분위기보다 밝고 젊은 느낌이랄까.
힘을 내서 계속 북쪽으로 걸었다. 쇼핑의 힘인가. 한 블록 꺾어서 알타 플라자 공원을 끼고 언덕을 계속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내리막길이 보이기 시작했고 저 멀리 해안가가 보였다.
체스트넛 가에 이르자 애플 스토어가 보였다. 뭐 파는지 뻔히 아는데 한 번씩 들어가게 만드는 게 애플 스토어의 힘. 매대 위에 올라와 있는 무선충전기에 아이폰을 올려놓고 지친 다리에 잠시 휴식을.
몇 분 쉬고 나와서 Smitten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슈퍼 두퍼 매장을 또 마주쳐서 들어가 주문할 뻔했지만, 오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친구들과 저녁을 먹을 수도 있어서 가볍게 아이스크림만 먹기로.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으며 팰리스 오브 파인 아츠(꼭 볼 필요 없다)를 지나 이스트 비치에서 저 멀리 보이는 골든 게이트 브리지를 잠깐 보고 마리나 대로를 따라 포트 메이슨Fort Mason을 향해 걸었다.
이스트 비치East Beach 근처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비치에서 걸어 나오면서 필즈Philz 커피를 들고 가는 사람을 보고 나도 마시고 싶다며 부러워했는데, 좀 걷다 보니 곧 필즈 커피 트럭이 보였다. 그 반가움이란.
Medium 원두 중에서 TESORA를 주문했다. 점원의 빠른 영어가 전부 들리진 않아서 정확한 뜻을 모르고 질문에 좋다고 답했는데 던킨 오리지널 스타일의 커피가 나왔다. 커피 스타일 자체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마실 만했다. 주문할 때 좋다고 답한 질문 외에도 몇 가지 물어봐서 고맙지만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왜, 네 마음에 들 수도 있잖아. 시도해 보지 그래.”라며 되받아쳤다. 쾌활한 성격 같았다. 그러더니 내게 뜬금없이 You so sweet! 이라고 외쳤다. 말투가 다정하단 뜻일까 내가 귀엽단 뜻일까. 왜 그리 말했는지는 몰라도 젊은 이성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고맙다고 짧게 답했다. 유부남 아저씨가 되고 이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커피 맛이 실제보다 괜찮은 듯했다.
트럭 옆 벤치에 앉아 잠시 쉴 요량으로 가방을 내려놓고 커피도 잠시 내려놓았는데, 뒤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커피를 땅에 완전히 쏟아버렸다. Oops.
커피 받아간 지 몇 분 안 되어 TESORA 한 잔을 더 달라고 하니 의아해하길래 거센 바람 때문에 커피가 땅에 쏟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추가로 결제할 필요 없다며 한 잔을 새로 내려줬다. 친절한 사람이다. 낯선 땅에 여행 오니 작은 친절이 참 고맙다. 이번엔 커피를 좀 더 신중하게 손에 쥐고 앨커트래즈 감옥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었다.
포트 메이슨 쪽 공원에 이르자 이제는 다리가 아니라 발바닥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물집이 좀 잡힌 것 같았다. 이제야 좀 여행 온 것 같았다.
포트 메이슨은 아마도 미스터 선샤인에서 설정상 이병헌이 꼬마 때 미국으로 건너올 때 도착했을 그 항구일 것이다. 아내와 모처럼 재미있게 보기 시작한 드라마여서 생각이 났다.
기라델리 광장에 이르니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여행객들과 함께 붐볐다. 초콜릿 아이스크림 맛이나 볼까 하다가 줄이 너무 길어 포기했다. 오면서 먹기도 했고.
기라델리 구경 후 어디로 갈까 하다가 애플 맵에서 근처 파타고니아 매장을 발견했다. 난 매력 있는 브랜드를 좋아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매장이 꽤 넓고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할인 등을 고려해도 약간 더 싸게 살 수 있다. 정가와 비교하면 가격 차이가 꽤 난다. 당장 필요한 것은 없어서 샌프란시스코 기념 티셔츠만 한 장 사서 나왔다. 7시면 문 닫는 시간이라 아슬아슬하게 나왔다. 서울보다 매장 닫는 시간이 확실히 빠르다.
오늘 LA에서 도착한 친구들이 숙소에 도착해서 깜빡 잠들었다가 연락을 했다. 유니온 스퀘어에서 보잔다. 피셔맨스워프 마크까지만 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넘어가 볼까 했다. 하지만 줄이 길고 출발 간격도 컸다.
우버 X를 탔을 때 꽤 구형이긴 해도 나름 말리부였는데 냄새 때문인지 멀미가 심했다. 그래서 이번엔 우버 Select를 타 봤다. 요금은 비싸지만, 역시 BMW가 쾌적하긴 했다. 물론 계속 타기엔 비싸다. 세계 어딜 가든 돈만 있으면 참 편하다.
유니온 스퀘어까지 편하게 가서 테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함께 스테이크를 먹었다. 딱딱한 게 싫어서 미디움 웰던을 택했는데 그냥 미디움을 택할 걸 그랬다. 굽기 기준이 서울과 좀 다른 듯. 그래도 먹을 만했다. 서울에서 스테이크 하우스는 얌전 떠는 느낌인데 여기선 떡볶이나 순대 먹으러 온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였다.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감자랑 샐러드는 기본 포함되어 있다. 감자를 프렌치프라이로 바꿀 수 있고 샐러드는 여러 종류 중 고르면 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9시가 되어 각자 숙소로 가는 교통편을 확인했다. 난 뮤니 버스 31을 타면 한 번에 가서 편했다. 미국에서 9시는 얼른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