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잠깐, 여기서도 줄 세우기냐?”

겜알못
3 min readOct 19, 2014

체계화, 항목화, 분류… 그 이면의 부작용이 가져온 획일화.

잘 정돈된 것을 보는 것이 좋다. 물론 내가 어지럽게 흩어진 물건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정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인 건 아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깔끔하게 정돈된 것을 좀 더 선호한다.

세면대 위 수납장에 차곡차곡 정리된 수건. 자그마한 책꽂이에 가지런히 들어있는 책. 계절에 맞게 얇은 셔츠부터 두꺼운 외투까지 한 방향으로 걸린 행거. 이 정도의 정리정돈은 일상적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서류나 메모, 여기저기서 받은 명함 등도 어떤 기준을 정해 분류하면 좋다. 보기도 좋을 뿐더러, 다시 찾아봐야할 일이 있을 때 편하다. 체계화, 항목화, 분류라고 불리는 것들이 일종의 ‘기술’ 내지는 ‘노하우’로 취급받는 이유다.

문득 생각을 해본다. ‘체계적인 분류’라는 것은 분명 삶의 어떤 곳에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사회의 모든 곳에 들이댈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미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굳이 필요치 않은 곳에까지 들어와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퀘스트, 레벨업, 던전, 레이드, 파밍, 강화… 눈 감고 줄줄 읊어보라해도 무난할 이것들이 오늘날 내가 즐기는 게임의 모습들이다. 이 게임 저 게임 가릴 것 없이 너무도 비슷한 모양새들이다.

덕분에 수많은 게이머들은, “제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좀 보여줘!”라고 외치곤 한다.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는 개발자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가 있겠지마는.

언젠가 ‘더 이상 모작에 매달리지 말라’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이미 시중에 나와있는 어떤 작품을 비슷하게 따라하려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기존에 있는 것들을 따라하는 것이 아닌, 비틀어보는 발상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기준선을 잡아놓고 뭔가를 해보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기준틀’이 되어버리면 곤란하다. 하지만 실제로 수많은 사례들이 그 프레임 안에 갇힌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이건 어쩌면, 우리 스스로 지식과 경험을 과도하게 체계화하려 했기때문은 아닐까 싶다.

RPG? 이건 당연히 있어야지! FPS? 이게 들어가면 안 돼! 이거? 척 봐도 LoL 베낀 거네!

“똑같지 않습니다. 다른 부분도 있어요.”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다른 재미가 있는 게임입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맞는 말이었던 경우도 많았고. 그렇다고 해서 썩 개운하지는 않다. 그렇게 다른 재미를 뽑아낼 수 있는 작품이었다면, 처음부터 다른 모습이 되도록 빚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게임을 좋아하고 즐기는 한 사람으로서, 게임은 창작의 결과물이라고 늘 믿고 산다. 창작의 영역에서, 기존의 무언가를 연상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두 가지 중 하나라고 본다. 그 기존의 작품을 존중하는 마음이 담긴 ‘오마쥬’거나, 아니면 ‘모방’이거나.

요즘 게임들은 지나치게 체계화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고유의 사용자 경험을 만드는 일에 도전하기보다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뭔가를 느껴주기를 바라고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씁쓸한 현실.

오해할까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리된 데이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컨텐츠라는 영역에서는 좀 꺼져줬으면 좋겠다. 눈치가 있어야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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