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가난하게 살아갈 축복
빌뱅이 언덕, 권정생
국제도시를 목표로 만들어진 송도에 가면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본따 이름지은 송도 센트럴파크가 있다. 계획도시답게 인공섬을 만들고 인공수로를 판뒤 너른 잔디 공원을 조성하고 그 옆으로 목이 아프게 높다란 초호화 아파트가 4동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통유리로 외벽을 마감한 건물은 조각 조각 서로 각도를 달리해서 서해로 지는 노을을 받아 흡사 건물 전체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송도 센트럴파그에서 잠시 시간을 보낼 때면 저런 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용솟음치다가 현실을 인식하고는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짓게된다. 최첨단 초호화 주거지를 바라보며 두칸 흙집에서 삶을 마감한 권정생 선생의 빌뱅이 언덕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권정생 선생은 일제시대 동경에서 태어나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년을 보냈다. 가난과 폐결핵은 선생의 전 생애를 걸쳐 떼어낼 수 없는 고통이자 삶의 동반자이다. 어린 시절 우리가 부모님께 지겹게 들었던 그 찟어지게 가난한 삶의 모습들이 선생의 생생한 묘사와 언어로 진부하지 않고 가슴아프게 절절이 들려진다. 너무 가난해서 손 쓸 수 없던 형제의 죽음, 동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속수무책의 참혹한 죽음이 많았을까? 그러나 가난과 병,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선생은 자연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동화와 시로 플어내었다. 이 땅의 풀, 곤충, 동물과 산, 강, 내를 사랑하는 선생의 마음이 글의 곳곳에 뭍어나온다. 또한 선생은 신앙에 대한 통렬한 글도 많이 남기셨다. “처음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편지”와 “김목사님께” 등을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모습에 대한 번민과 참 신앙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추운 겨울 맨 손으로 새벽 교회 종을 치면서 마음 깊이 성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비록 겉모습은 시골 교회의 우러러 볼 것 없는 종지기에 불과한 선생이었지만 진정한 성자가 아니었을까?
예수 믿으면 3년안에 부자된다는데 20년이 되도 가난하다는 선생의 외침. 그것은 가난해서 억울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땅의 교회에게, 사람들에게 외치는 선지자의 목소리다.
“사랑사랑 하다 보니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사실까지 덮어 버리고 양가죽을 뒤집어쓴 이리 같은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알량하고 비굴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복종만이 신앙의 도리로 알고 맹종하다 보니, 이젠 마귀의 명령에도 굽신대는 절대적인 착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1981년의 이 글이 내게 20년이 지나 온 것이 통탄스럽다. 이 땅의 교회는 선생의 시절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선생의 글을 읽으니 괜시리 30년도 더된 내 신앙의 길에 있었던 선배들이 원망스럽다. 왜 우리는 이 고민이 없어 “자신이 그래도 떳떳하게 착실하게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왔다고 착각”하며 살았을까?
“내가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가 사랑했던 들꽃 한송이를 나도 사랑하고 싶고 그가 아끼던 새 한 마리를 나도 아끼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구태여 큰 소리로 외치며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곁에 함께 있는 가련한 목숨끼리 다독이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복순아, 가난할수록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착하게 살 수 있는 권리는 아무도 못 빼앗아 간단다. 우리 못 먹고 못 입어도 꽃 한 송이 참새 한 마리도 끝까지 사랑하자꾸나.”
송도에서 돌아와 아직은 새 것인 내 자동차를 손보고 닦으며 차를 사던 5년전 기억을 떠 올렸다. 5년이 되기 전에 이렇게 저렇게 성공해서 더 크고 성능 좋은 차를 사겠다고 다짐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 또 가슴이 아리다. 머리는 착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그 생각이 마음에까지 손과 발까지는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