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 필요해
삼다 1기 저녁반 2학기 11주차 에세이 — 수치스러운 기억 안승용
요즘은 어지간한 물건들을 인터넷으로 가격 비교하고 온라인으로 구매 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오늘 내가 이야기 하려는 대학 시절에는, 전자제품을 조금 저렴하게 사려고 한다면 용산 전자 상가에 나가서 여기 저기 가격을 물어보고 사야만 했다. 가격 정보는 구매자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속칭 “용팔이”라 일컬어지는 판매원들끼리 가격 정보를 공유하고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공급자 위주의 시장인 것이 특징이었다. 지금처럼 물건이 흔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품을 구입하는 일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용팔이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 있었는데 일단 가게로 손님을 끌어들인 후 손님이 사려고 하는 제품의 가격을 헐값에 불러 자신의 가게가 싼 값에 물건을 준다는 느낌을 준 뒤에 그 제품의 기능과 성능을 헐뜯어 원래 사려던 제품 가격을 알아보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비슷한 다른 제품을 비싼 값에 팔아치우는 것이었다.
용산과 세운상가 등에서 자주 물건을 사며 잔뼈가 굵은 내게 그런 수법은 낡은 방식이라 여간해선 걸려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침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던 시기에 아내는 워크맨이 한 대 필요하다고 함께 구입하러 가길 원했다. 전자제품에 대해 잘 모르는 여성들에게 용산에서 눈탱이 맞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전자공학을 전공한 남자친구는 든든한 원군임에 틀림없었을 게다. 그러나 그날이 내게 잊을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이 될 줄 난 상상도 못했었다.
용산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가게에 들러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지하철에서 나와 바로 가까이에 있는 가게들은 손님들의 눈에 쉽게 띄고 오가는 사람이 많아 가게세가 비싸기 때문에 물건 값이 비싸기 마련이었다. 구경만 하고 가라는 판매원의 강권에 일단 들어가서 당시 유행하던 몇 가지 모델을 구경하고 가격을 물어보았다. 몇 개의 제품이 진열대 위에 올라왔고 가격을 묻고는 가게를 나서려고 하는데 판매하는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가격을 묻기만 하고 그냥 가면 어쩌냐는 거다. 가격을 알아보러 들어갔으니 원하는 정보를 얻으면 떠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조직폭력배나 진배없게 험상궂은 얼굴 앞에 나도 모르게 그냥 가게를 떠나면 무언가 해코지를 할 것 같다는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그러나 경험 해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나는 아내에게 “이 물건이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하며 얼른 가격을 치르자고 했다. 아내는 그 상황이 고압적이고 반 강제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오히려 나는 그런 아내가 다행으로 여겼던 것 같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몇 걸음 더 가 다른 가게에 같은 제품의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가지를 쓴 것이다.
그렇게 잊히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의 용산은 내 머리 속을 이십년 가까이 떠나지 않았다. 정말 오래된 기억이지만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다. 작년 언젠가 아내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어 용서를 구했다. 피해자는 나니까 용서를 구했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 하지만 그녀나 나나 모두 피해자. 이십년만의 고백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었지만 난 내가 손해 보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아니 손해의 기미만 보여도 분노가 불 일 듯이 일어나는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노련해지고 그런 어이없는 일은 겪지 않지만 내가 손해 보는 몇몇 상황이 아직 내 마음 속에 앙금처럼 남아있다. 따지고 보면 타인의 폭력이나 이기심에 휘둘린 상황에 난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있는 형국이다. 얼마나 더 나이가 들어야 허허 웃으며 털어 버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