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e Bloch-Bauer 초상화 이야기
„Meine 2 Porträts und 4 Landschaften von Gustav Klimt, bitte ich meinen Ehegatten nach seinem Tode der österr. Staats-Galerie in Wien, die mir gehörenden Wiener und Jungfer. Brezaner Bibliothek, der Wiener Volks u. Arbeiter Bibliothek zu hinterlassen.“
"배우자에게 요청한다. 배우자의 사망 후,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나의 초상화 2점과 풍경화 4점은 빈의 오스트리아 국립 미술관에게 유증(遺贈)하기 바란다."
(그림들이 빈에 속한다는 설명 부분은 번역에서 뺐다.)
아델 블록-바우어의 유언장이다. 그녀를 그렸던 초상화는 당대에 이미 유명해졌으며, 초상화 2는 아래와 같다.
자, 이 그림은 왜 유명해졌을까? 영화 "Woman in Gold”가 그리는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작은 마리아 알트만의 이야기부터이다.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은 바로 위에 등장하는 아델 블록-바우어의 조카이다. 아델에게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정확히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그녀는 조카들을 애지중지했었지만 40대 초반에 뇌막염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마리아 알트만은 집에 걸려 있는 초상화만 보며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결혼도 했고(성이 알트만으로 바뀐다), 파리에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하지만 세상은...
Anschluß(1996년의 철자법개혁에 따라 현재는 Anschluss라 쓴다).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의 합병 사건(1938)이다. 블록-바우어 집안에게는 날벼락. 마리아 알트만은 알트만 가문(역시 유대인이었다)이 섬유공장의 해외 계좌를 나치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나(영화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짐을 쌀 수 있었겠나? 모두 다 나치가 가져가버렸다.
미국 서부에서 마리아 알트만은 전쟁 이후 당시 미국에 없었던 캐시미어 셔츠를 팔며 상당한 기반을 다져 놓았다. 하지만 언니의 사망 이후, 이모의 그림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친구의 아들인 랜돌 쇤버그 변호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림이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고,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받아야 하니 알트만 여사는 당연히 오스트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그리고 이들을 도운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도 있었다. 후베르투스 체르닌(Hubertus Czernin)이다.
체르닌은 원래 폭로 전문 기자로서 제일 유명한 그의 업적은 마리아 알트만 사건이 아니라 쿠르트 발트하임 전-대통령의 제2차대전시 전쟁 범죄 폭로였다. 사실 맨 위에 적혀 있는 아델의 유언장에 법적 효력이 없을 수 있다는 것도 그가 발견한 사실이었다.
(유언을 다시 보자. 페르디난트는 그림을 오스트리아 정부에게 넘긴 적 없었고, 그림들은 나치가 몰수했었다.)
문제는... 소송 비용이었다. 오스트리아 재판 체계의 경우, 대상이 되는 사물의 가치에 따라 소송 비용이 치솟았다. 알트만 여사에게는 그런 비용을 치를 재산이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 알트만 여사는 쇤버그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여기서 쇤버그는 소송을 미국에서 벌일 수 있다는 실마리를 찾아낸다.
여기서 잠깐, 미국에서 다른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벌일 수 있을까? 국제법을 안다면 모두들 갸우뚱거릴 것이다. 외국 정부의 경우 "국가면제(State Immunity)"를 향유하거늘(여기서 벨데베레 미술관은 오스트리아의 국립 미술관이다), 외국 정부를 상대로 과연 소송을 벌일 수 있을까? 또 있다. 미국은 1976년 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FSIA)를 제정했다. 그녀의 그림 사건은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현재(2000년대 초이다) 건드리는 건 소급적용을 금지하는 원칙을 반하는 일이었다.
끝내 이 사건은 미국 대법원까지 올라간다. 미국 대법원은 알트만이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판결한다. (1) 벨데베리 미술관은 미국에서 문제가 되는 그림이 들어간 엽서와 책을 판매하는 등 '상업행위(commercial activities)'를 하고 있으므로 국가면제의 예외에 들어가며, (2) 국제법에 반하는 행위(여기서는 나치의 약탈)의 경우 FSIA의 소급 적용이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물론 대법원의 판결에 국제관습법/조약이 허용하는 경우 소급 검토가 가능하다는 식의 문장이 더 들어갔더라면 좋았을 뻔 했지만, 계속 이어질 판례에 기대할 수 밖에 없겠다.)
수세에 몰린 것은 오스트리아 정부이다. 아델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 다 드러났었고, 그간 수차례 알트만 여사가 협상을 제의했어도 요지부동이었던 오스트리아였기 때문에 마지막 중재에서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지만... 중재에서도 알트만이 승리했다. 따라서 그림은 알트만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알트만 여사가 클림트의 그림들을 자기 집에 걸려 하진 않았었다. 이미 그녀에게 그림 관련 변호를(!) 제의했던 로널드 로더(Ronald Lauder, 에스테 로더의 아들이다)에게 넘겼다(중간에 크리스티를 통한 경매가 있긴 했었다). 그리고 그는 거의 개인 미술관에 다를 바 없는 뉴욕의 노이에(Neue) 갤러리에 이 그림을 전시했다.
과연, 영화 때문인지 노이에 미술관에는 인파가 넘쳤다. 로더 가문이 만들었다 할 수 있을 이 갤러리는 독일어권의 19-20세기 미술 전문이기 때문에 당시 분리파(Sezession) 작품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분리파는 히틀러로부터 퇴폐예술(Entartete Kunst)로 비판을 받은 동시에, 히틀러 부하들의 콜렉션의 목록에 들어가는 이중적인 수난을 많이 받았었고... 클림트의 그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는 어째서 이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를 빼앗겼을까? 애초에 알트만이 부드럽게 협상을 제의했을 때 응해야 하잖았을까? 오스트리아는 스스로를 항상 나치의 희생자인 양 행새했었고, 스스로 말한 거짓말이 사실이라 믿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알트만 여사가 얘기했듯, 오스트리아는 두 팔 벌려 기꺼이 Anschluß를 받아들였었다.
다만 이때 도망쳤던 유대인들 명맥은 거의 끊겨 있거나 문서화 된 증거를 갖고 있지를 않으니 여전히 소유권이 오리무중인 작품은 많이 있다.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예고편을 임베딩하며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