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2014 독서목록 63/149 (2014.6.5)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 대니얼 데빗/옥당/ 원제 : Consciousness Explained

책을 읽으면서 교만해지는 때가 있다. 내용없이 적절한 짜깁기로 채운 책을 읽을 때면, ‘아, 이정도 책은 나도 쓰겠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책에 대해서 교만한 생각이 들고, 책을 읽는 것이 갑자기 시시해지곤 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하는지는 알겠지만, 그 세부사항에 대한 설명이 수준이 높아서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때는, ‘아, 세상엔 천재적인 석학이라는 분들이 계시구나.’하는 생각에 겸손한 마음이 들고,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잔잔한 만족감이 들때가 있다.

이 책은 이 시대 지식의 진보를 담은 책이다. 인간의 의식이 뇌의 유기적 작용에 의해서 생긴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식이 뇌의 유기적 작용까지도 통제하는 경외의 대상인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으로 가상의 의식이 생길수도 있는 것인가? 인간의 의식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서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대니얼 데닛이 그 동안 연구했던 결과를 제시한다. 물론 정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저자는 과학적인 측면에서 신비주의를 배제하고, 앞으로 뒤에 나올 위대한 과학자인 누군가가 답을 제시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본인은 인간의 의식에 대해 과학적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만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따라가면, 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의식을 만난다. 이 책은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어렵다. 철학을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추천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책의 늪에 빠져 고생할 수도 있는 책이다.

한줄요약 : “뇌의 작동원리와 인간의 의식, 그 중간엔 뭐가 있지?”

★★★★☆


당신이 잠든 사이 사악한 과학자들이 당신의 뇌를 떼어내 생명유지 장치가 있는 통 속에 넣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과학자들은 당신이 그저 통속에 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몸으로 전과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 작정이다. ‘통속의 뇌Brain in a Vat’는 많은 철학자가 애용하는 사고 실험이다. 여기서 과학자는 현대판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사악한 악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에 관해 데카르트를 속이기로 작정한, 심지어 데카르트의 존재까지도 속이려 한 가공의 마술사다(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설정한 것이 전능하고 사악한 악마다. 이 악마는 눈앞에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리는 것처럼 만들어 상대를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고 성찰했듯이 아무리 전능한 악마라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믿게 할 수는 없었다. p.18,19

데카르트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어야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 데카르트에 대해서 기본 지식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이 책을 통해서 데카르트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대략은 알 수 있었다.

사랑과 의식이란 두 가지 현상을 그와는 다소 다른 질병과 지진에 비교해보자. 질병과 지진의 개념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상당한 변화가 있었지만, 그 현상 자체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전혀 영향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질병에 관한 생각을 바꾼다고 해서 질병이 사라지거나 병에 덜 걸리지는 않는다. 질병 발생 양상을 크게 바꾸어 의학과 공중보건에는 영향을 미칠망정 질병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는 것이다. 지진도 언젠가는 인간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오거나 적어도 예측은 가능해지겠지만, 지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나 개념이 달라진다고 해서 지진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순수성을 잃은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옛날처럼 사랑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실제로도 그런 사랑에 빠질 수 없게 된다. 한 예로, 내가 나이를 거꾸로 먹어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거나, 지금 품고 있는 생각의 상당 부분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10대 아이처럼 첫눈에 반하는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가능하다고 믿는 다른 종류의 사랑도 존재하니 다행이지만, 만약 그런 사랑마저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간단히 말해, 사랑은 그 개념에 의존하는 현상이다. 사랑뿐 아니라 돈도 그렇다. 만일 모든 사람이 돈이 무엇인지 잊어버린다면 돈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늬가 새겨진 종이, 양각 무늬가 들어간 동그란 금속 조각, 은행 잔고 컴퓨터 기록,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지은 은행 건물은 있어도 돈은 없을 것이다. 돈으로 생기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환율이나 이자, 금전 가치도 없을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고, 오직 다양한 무늬가 새겨진 돈만이 설명할 수 있던 속성은 여러 사랑의 행위와 교환에 따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지던 궤적과 함께 증발해버릴 것이다. p.44,45

우리의 의식이나 태도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것과 바뀔 수 없는 것. 이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더 필요할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안에 손을 넣어 움직이는 단순한 손가락 인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려서 청중에게 손가락 인형 놀이를 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릴까? 우리의 영혼을 꼼지락거려서? 영혼이 행동을 통제한다는 생각에는 악명 높은 문제가 따르지만, 행위 뒤에 의식적인 마음이 없는 한 책임 있는 실제 행위자도 없다는 생각이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마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내면의 나’,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짜 나’는 내 뇌가 아니라 내 뇌를 소유한 것이다(‘자아와 그 자아의 뇌’). p.56

진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인생을 어떻게 바꿀까? 켄 윌버의 무경계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우리 현상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광경, 소리, 냄새, 미끄러고 따끔거리는 느낌, 덥고 추운 느낌, 사지가 놓은 위치 감각과 같은 ‘외부 세계의 경험’이다. 둘째는 환상의 이미지, 백일몽과 혼잣말, 회상과 좋은 생각, 갑작스러운 육감과 같은 ‘내면세계의 경험’이다. 셋째는 신체적 고통과 간지럼, 배고픔이나 갈증에서 분노, 기쁨, 증오, 당혹감, 욕정, 놀라움 같은 격정적인 정서와 자긍심, 불안, 고립감, 후회, 경이감, 냉정함 등에 이르는 ‘정서적 경험’이다. 이를 심리학자들이 좋아하는 이상한 용어로로 표현하자만 정동情動,affect이다. p.73

현상에 대한 경험의 종류에 따라 인식의 정도가 달라진다. 이런 경험의 종류를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인식의 정도를 나타낸다.

분노, 두려움, 증오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니면 좀 더 복잡한 예로 ‘공감’을 생각해보라. 어원학상으로 그 말은 고통을 함께한다는 의미다. 독일어로 ‘Mitleid(아픔과 함께)’ 또는 “Mitgefühl(느낌을 함께)’이다. 아니면 ‘공명sympathetic vibration’을 생각해보라. 공명은 악기 줄이 진동하면서 옆에 있는 줄이 같이 울리는 현상으로, 가까이 있는 두 줄이 고유진동수를 공유하여 일어난다. 자식이 심한 모굥감을 느끼거나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는 자식 못지않게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같은 정서가 온몸을 휩쓸고, 생각을 잠식하며, 평상심을 흔들어놓는다. 부모는 같이 싸우거나 울거나 무언가를 사정없이 내려치고 말 것이다. 이는 공감의 극단적인 형태다. 왜 우리는 우리 안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설계된 것일까? 그 현상은 대체 무엇일까? p.91

공감이라는 단어가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에 어원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어원을 따라가면 고대인들의 지혜를 볼 수 있다. 아니면 이런 언어도 신의 작품인가?

당신도 무의식적으로 자동차를 운전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몇 킬로미터를 운전했지만 대화에 몰두해 있거나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느라 지나온 길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교통상황은 어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럴 때면 마치 지금까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운전을 대신한 것 같다. 많은 이론가가(나를 포함하여, Dennett, 1969) 이런 현상은 ‘무의식적 지각과 지적 활동’의 예로 자주 든다. 그러나 당신이 정말로 스쳐 지나간 모든 자동차와 정지 신호등과 시시때때로 마주친 커브길을 의식하지 못한 것일까? 아무리 다른 일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해도 운전하는 동안 보았던 것에 관해 캐물으면 세부사항을 대충은 이야기한다. ‘무의식적 운전 현상’은 의식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기억상실이 일어난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p.186

무의식적인 지각은 꽤 일상적인 활동이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지각이 최면등을 통해 의식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과학적인 것인가, 아니면 허구적인 것인가?

밈이 들어차 인간의 뇌가 바뀐 것이 뇌의 역량에 주요한 변화를 이루었다. 모국어가 중국어인 사람의 뇌와 영어인 사람의 뇌가 다르다는 사실은 뇌의 역량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피설험자가 지시사항을 이해했는지 아는 것이 실험자(타자현상학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해보라. 이런 기능적인 차이가 뇌의 아주 미세한 변화 양상에 모두 물리적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지금도,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신경학자에게 비가시적인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밈이 들어차 창조된 기능적인 구조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더 고차원적인 수준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행이도 컴퓨터공학에서 나온 아이디어 하나를 이용할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밈에 의해 뇌에서 창조된 ‘가상 기계virtual machine’의 운용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p.273

언어에 따라 뇌의 역량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특정 언어가 특정 역량을 더 크게 만든다는 얘기인데, 이런 것들은 우생학의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선천적인 우생학은 이미 과학의 뒤편으로 사라졌으니, 이제 후천적인 우생학이 나타날 시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뇌에 관한 한 훌륭한 입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담겨 있다.
“ 색이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보는 사람의 눈과 뇌에만 존재한다. 물체는 빛과 여러 파장을 반사하지만, 이런 빛의 파동 그 자체는 색깔을 갖고 있지 않다.(Ornstein and Thompson, 1984, p.55)”
이것은 상식적인 지혜를 표현하려는 좋은 시도지만, 이 말을 엄밀하게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저자가 의미한 것이 될 수 없고, 사실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색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과 뇌에만 존재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눈과 뇌가 세상에 있고, 관찰자가 바라보는 물체와 마찬가지로 물질세계의 일부다. 또한 그 물체처럼 눈과 뇌도 색깔을 갖고 있다. 눈은 파란색이나 갈색, 녹색이고, 심지어는 단지 회색과 흰색 물질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의 흑질substantia nigra도 있고, 푸르게 보이는 청반핵locus ceruleus도 있다. p.471,472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가 내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존재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구나. 뭔말이야?

17세기에 근대 과학이 동튼 이후, 자아라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현미경 아래에서도 보이지 않고, 자기 성찰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가 이루어졌다 그런 사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아라는 것이 ‘비물질적 영혼’,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아가 형이상학적인 열띤 상상력에서 나온 산물일 뿐,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식이 되었든 자아라는 것이 일종의 관념이어서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공격당할 일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어떤 이는 중력의 중심도 진짜로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것으로 정말 충분한가?
정말로 자아가 있느냐는 질문은 어느 쪽으로 답하든 답하기 터무니없이 쉬워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가? 물론이다.! 질문 자체가 그 대답을 상정하고 있다(데이비드 흄에 의하면, “헛되이 자아를 찾아왔던 이 ‘나’라는 존재는 누구인가?”). 우리 뇌 말고 어딘가에 우리 신체를 통제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실체가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은 실증적으로 백치 소리거나(윌리엄 제임스의 ‘교황 뉴런’) 형이상학적 허튼소리(길버트 라일의 ‘기계속의 유령’)다. 간단한 질문에 ‘명백히 그렇다’와 ‘명백히 그렇지 않다’라는 두가지 대답이 나올 때는 중간 입장을 고려해봐야 한다.(Dennett, 1991a). 처음에는 그것이 양측 모두에게 반직관적인 일로 보이겠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명백한 사실 하나가 있다는 것은 다 같이 부정하지 않는가! p.528,529

자아의 존재가 신의 기적에 의해서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대니얼 데빗의 전제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뭔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닐까? 그런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고귀하지 않는 것이라면, 왜 우리말고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없을까?

자기와 세상을,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이런 근본적인 생물학적 원리는 매우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심리학자 폴 로진과 에이프릴 팔론April Fallon(1987)은 훌륭한 실험으로 혐오감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이성적으로는 우리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행위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맹목적으로 강력하게 저항하는 숨은 기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금 당장 당신 입에 고인 침을 삼켜보라. 이 행위는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깨끗한 물을 한 컵 가져와서 거기에 침을 뱉은 다음 삼켜보라고 요구했다면 어떨까? 구역질이 일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인지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일단 우리 몸 밖으로 나온 것이면 더 이상은 우리 일부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이질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시민권을 잃었고, 거부해야 할 것으로 변질되었다. p.530

나의 경계를 나의 신체 안과 밖으로 규정했을 때의 일반적인 사례다. 하지만 내가 나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때 일반적인 경우를 뛰어넘을 수 있다. 신체적인 철인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철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성숙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것이 모두 착각이거나 착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테디 베어도 의식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어떤 로봇도 의식이 없다는 것은 그렇게 자명하다고 볼 수 없다. 자명한 일은 그것이 어떻게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 친구도 어떻게 로봇이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상상하기 어려웠으므로 로봇을 의식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기 꺼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도 쉽게 그런 상상을 해볼 수 있다. 상상력의 두 가지 위업 간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은 둘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로봇의 컴퓨터 뇌가 의식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믿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실리콘 칩 덩어리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정보 처리 과정이 의식적인 경험에 해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기적인 인간의 뇌가 의식을 갖는다고 상상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어렵다. 어떻게 수백만 개의 뉴런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복잡한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이 의식적인 경험에 이르게 하는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간이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여전히 상상하기 힘들더라도 말이다. p.556,557

그렇다면 앞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의식을 가진 존재가 나타날 것인가? 그런 상황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과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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