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서의 발전

2014 독서목록 77/149 (2014.7.13)


[자유로서의 발전] — 아마티아 센/갈라파고스/ 원제 : Development as Freedom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아마티아 센이라는 사람을 아예 몰랐다. 그가 인도 태생으로 동양인 최초의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라는 사실도,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교수와 같이 하버드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강의하는 교수로 학문적 성취에서는 마이클 센델교수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세상보다 알아야 할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아마티아 센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경제학자로 경제의 성장이나 발전보다는 불평등과 빈곤등의 후생경제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이 책에서 아마티아 센은 발전한다는 것은 소득의 상승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자유의 확대라고 이야기하며, 빈곤과 관련해서는 역량박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과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무척이나 어렵다.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을 쓰고나서 <국부론>을 집필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인간, 특히나 빈곤층이나 서민층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지 않고는 꽃 피울수 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많은 경제학의 이론들은 인간적인 삶보다는 기업의 이윤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도 그렇고 칼 마르크스도 그랬듯이, 아마티아 센이라는 학자도 인간적인 삶에 대한 가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후에, 경제가 발전하고 인간의 삶이 발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눈부신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에 성공한 우리나라의 경우에 이제는 이런 아마티아 센과 같은 학자들의 관점을 깊이있게 새겨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줄요약 : “경제성장만이 발전은 아니다.”

★★★★★


소득이나 부의 극대화를 우리의 기본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단지 유용한 것일 뿐이며 다른 것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경제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다룰 수 없다. 발전이란 우리가 영위하는 삶과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과 관련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의 확장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며 장애를 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한편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끼침으로써 우리가 더 완전한 사회적 인간이 되도록 한다. p.53

이런 문제에 논쟁을 해야하는 사람과도 마주칠 것이다. 그 사람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했다고 얘기하면 과연 설득이 될까? 하지만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면 바로 대화가 되겠지?

우리가 더 많은 부를 원하는 이유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조건에 의존하는지, 우리가 그렇게 더 많은 부를 통해 ‘하려는’ 일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가 더 많은 수입과 부를 원하는 데에는 적절한 이유가 있다. 수입과 부가 그 자체로 바람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들은 으레 우리가 소중히 여길 만한 삶을 영위하는 데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해주는, 다용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p.56

현대의 재벌들이나 거부들은 무엇때문에 더 큰 탐욕에 휩싸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때문에 일확천금이라도 내게 주어지기를 원하는가? 내가 원하는 궁극에도 결국 그들과 같은 속물주의 말고 다른 것이 있단 말인가?

세계사를 살펴봤을 때, (현재의 서유럽이나 북미에서처럼) 경제적으로 부유하건 (독립 이후의 인도나 보츠와나, 짐바브웨에서처럼) 상대적으로 가난하건 제대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기근이 발생한 적이 없다. 기근은 (영국령 인도나 영국인 지배자가 통치하던 아일랜드처럼) 외부에서 온 지배자가 통치하는 식민지나 (1930년대의 우크라이나, 1958~1961년의 중국, 혹은 1970년대의 캄보디아에서처럼) 일당 독재국가, 그리고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 혹은 과거의 사하라 사막 남부의 사헬 지대의 나라에서처럼) 군사독재 국가에서 일어나곤 했다. 사실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할 무렵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두 나라가 북한과 수단인데, 이 두 나라는 독재의 대표적인 사례다. 기근 방지라는 문제는 인센티브가 갖는 이점을 매우 명료하고 강력하게 보여주는데, 사실 민주적 다원주의가 갖는 이점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p.59

이제 인류는 정당하게 정치권력을 분산하고 있다면, 기근을 염려할 필요가 없구나. 특히 독재에 의한 피해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현재의 북한의 낙후된 정치체제는 도대체 어떻게 할꼬?

특히 기초교육이라는 사회적 기회를 통해 경제성장을 강화한 선구적 사례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이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때 이미 유럽보다 식자율이 높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종종 간과한다. 유럽에서는 이미 수 십 년 전에 산업화가 이러우졌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때에 그러했던 것이다. 이렇게 높은 문자해독률이라는 사회적 기회는 인적 자원을 개발했고, 이것이 일본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른바 동아시아의 기적은 일본의 사례와 상당히 유사한 인과관계에 기초했다(즉 인적자원 개발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렇게 확대된 역량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패턴이 나타났다). p.89,90

우리나라의 경우도 문맹률이 적고 고등교육을 받은 인적자원이 풍부한 것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적자원은 저개발 상태에서 중간이상의 상태로 빠르게 올라가는 지름길이다.

공리주의는 한 세기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윤리적 이론이자 특히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론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접근법은 복지와 공공정책에 관한 전통적인 경제학을 지배했다. 이 경제학은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현대적 형태의 공리주의에 의해 촉발되었고,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 헨리 시즈윅Henry Sidgwick, 프랜시스 에지워스 Francis Edgeworth, 앨프리드 마샬Alfred Marshall, A. C. 피구A. C. Pigou같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개진되었다.
공리주의적 평가의 요구사항은 세 가지 서로 다른 구성요소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요소는 ‘결과주의’(선입견을 주는 단어는 아니다)다. 이것은 모든 (행위, 규칙, 제도 등등의) 선택이 그 결과, 즉 그것들이 야기한 성과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몇몇 규범적 이론이 어떤 원칙들은 결과와 무관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간주하는 경향을 부인하는 측면이 있다. 사실 이 주장은 결과에 민감한 것 이상으로 나아가는데, 왜냐하면 결과 이외의 것이 궁극적으로 고려되는 것을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결과주의에 따라 어느 정도의 제약이 부과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결과의 목록에 무엇이 포함되고 무엇이 배제되는지에 의존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예를 들어 행위 자체가 그 행위의 ‘결과’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 자명한 의미에서- 분명히 그러한 것이다).
공리주의의 두 번째 요소는 ‘후생주의’로, 이것은 사태들을 판단할 때 각 상태의 효용에 국한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권리나 의무의 충족이나 침해 등과 같은 것에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후생주의가 결과주의와 결합될 때, 공리주의는 모든 선택을 그 때문에 야기되는 각각의 효용에 따라 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모든 행위는 그 결과 상태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며(결과주의 때문에), 결과의 상태는 상태의 효용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후생주의 때문에).
세 번째 요소는 ‘합계순위sum-ranking’다. 이것은 총합적 성취를 얻기 위해 서로 다른 사람의 효용들을 단순 합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총합이 각 개인에게 어떻게 분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효용의 불평등한 분배와는 무관하게 효용의 총합은 최대화되어야 한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발생한 효용의 총합으로 모든 선택을 판단해야 한다는 고적적인 공식은 이 세 가지 요소로 산출된다.
이러한 공리주의적 견해에서 볼 때 성취할 수 잇었던 최대치와 비교하여 효용의 총합에서 손실이 발생하면 그것이 바로 부정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대되는 것보다 집합적으로 덜 행복한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기대되는 효용의 총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부정의라는 뜻). 행복이나 쾌락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은 몇몇 현대적 형태의 공리주의에서는 극복되었다. 이렇게 변형된 형태의 공리주의에서는 효용이 욕망의 충족으로 정의된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충족된 욕망의 강도이지, 야기된 행복의 강도가 아니다. p.112~114

공리주의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알아야겠다. 복지를 논할 때 공리주의를 선행시키지 않으면 전혀 진도가 안나간다. 공리주의, 존 롤스의 정의론, 이것이 순서다.

한 개인의 ‘역량’은 성취할 수 있는 기능들의 다양한 조합을 가리킨다. 따라서 역량은 일조으이 자유로, 여러 가지 기능 조합을 성취할 실질적 자유를 말한다(덜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삶의 양식을 추구할 자유다). 예를 들어 부유한 사람이 단식을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굶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식사와 영양에서 기능적으로 동일한 성취를 할 수 있지만, 전자는 후자에 비해서 전혀 다른 ‘역량집합capability set’을 갖는다(전자는 후자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잘 먹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p.133

누군가를 도와주는 방식을 물질로 도와주는 것보다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다. 여기서 저자는 이것을 자유라고 한다.

사회적 현실에 명백한 불평등이 있을 경우, 사회의 실제 구성원들은 그것을 합당하다고 받아들이기 힘들다(예를 들어 이러한 불평등은 다른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경우에만 정당화되는데, 토머스 스캔론Thomas Scanlon이 윤리적 평가를 위해 이 기준을 제시하고 강력하게 사용했다). 확실히 심각한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으며, 몇몇 사람이 주장하듯 노골적인 야만이다. 게다가 불평등하다는 느낌은 사회 통합을 해칠 수 있으며, 어떤 유형의 불평등은 심지어 효율성을 저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많은 상황에서 대부분 사람들에게, 때로는 심지어 모두에게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갈등은 특정한 상황에 따라 가볍거나 심하게 나타난다. ‘불편부당한 관찰자’나 ‘원초적 입장’, 혹은 ‘합리적이지-않음으로-인한-거부not-reasonable-rejection’를 포함하는 정의의 모델은 이러한 상이한 고려사항에 주목해야만 한다. p.157,158

불평등의 문제는 해소할 때의 에너지도 너무나 많이 든다. 불평등하지 않게 사회를 가져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서유럽과 미국 사이의 대조는 또 다른 흥미로운-어떤 면에서는 더 일반적인-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사회윤리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만, 복지국가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서유럽인들에게는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고 방식이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사회윤리는 유럽에서는 흔한 두 자릿수의 실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럽은 놀랍도록 냉정하게 이 일자리 없는 상태와 그것의 증가를 받아들여왔다. 이러한 차이 저변에는 사회적 책임과 개인적 책임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존재하는데, 이 문제도 앞으로 다를 것이다. p.161

미국의 인종적 이민문제 때문에 그럴까? 인종이 다른 이민자들이 몰려 올 때마다 미국인들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유입된 인종들은 들어간 사회 밑바닥을 형성해서 것이다. 당연히 기득권층은 사회 밑바닥 층에 대한 동정심이 없을수 있다. 반면 유럽의 경우 동일 민족이 대부분인 경우라 역사와 함께하는 누군가는 반드시 연결고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누군가가 실제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들의 불행을 좌시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는 당연한 것이 수도 있겠다.

시장의 역할은 시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도록 허용되었는가에도 달려 있다. 시장의 원활한 기능 덕분에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많지만, 같은 기능 때문에 손해를 보는 집단도 있다. 후자의 집단이 정치적으로 더 강하고 영향력이 있다면 그들은 시장이 경제에서 적절한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게 노력할 수도 있다. 이것은 독점적인 생산 단위가 국내건 국외건 경쟁에서 벗어나 — 비효율성과 다양한 유형의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 번성할 때 특히 문제가 된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유지된 생산을 통해 형성된 높은 생산단가 혹은 낮은 생산품들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잘 조직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있는 ‘산업가’ 집단은 그들의 이윤이 잘 보호받도록 할 수 있다. p.192,193

가장 큰 문제가 정치적 영향력이 일반 대중에서 자세하게 설명되기 매우 어려다는 점이다. 최근의 법률들은 그것이 당사자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지 손해를 가져다 줄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그러한 법률의 제정이 진행되는 지의 여부는 정치권력의 향배에 대한 이슈에 가려 일반일들에게는 자세히 시기적절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경쟁에 대한 일반적 제약을 지지하는 주장에 비판을 가하는 열린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거래와 교역을 제한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물질적 이익을 얻는 집단의 정치적 힘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미 많은 저자들이 그와 관련한 기득권을 확인함으로써, 그리고 경쟁을 배제하는 것에 포함된 ‘지대 추구 행위’의 영향력에 주의함으로써 이러한 주장들을 판단해야 한다고 적절하게 지적했다.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가 유명한 구절에서 지적했듯이 만일 “어떤 수단A가 천 명 각각에게서 1프랑씩의 손해를 입히고 한 명에게 1천 프랑의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후자는 이 수단을 얻기 위해 상당한 힘을 쏟겠지만 전자는 미약하게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결국 A를 통해 1천 프랑을 얻으려는 사람이 이길 것이다.”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정치적 영향력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매우 현실적인 현상이다. p.194

경제학자의 훌륭한 경제이론에 바탕을 한 정책이 결국 이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에 의한 불평등, 불균등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하지만 이런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중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포장된 모습에만 표를 던진다는 것이다. 결국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은 갈수록 유리해진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이제 재정 긴축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이 문제는 최근 수십 년간 세계적으로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현재 재정 문제에서 보수적이어야 할 필요성은 매우 강력한데, 과도한 일플레이션과 불안정에 따른 파괴적인 효과가 널리 연구되고 토론되기 때문이다. 사실 재정은 보수주의가 확실한 장점을 보이는 주체이며, 이 분야에 대한 신중한 접근은 쉽게 보수적 형태를 띤다. 그러나 우리는 재정적 보수주의가 무엇을 요구하며 왜 그러한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재정적 보수주의의 요점은 ‘버는 만큼 구매한다’는 명제처럼 상당히 호소력이 있지만 선명한 장점을 가진 것은 아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에서 미카버 씨는 다음과 같이 유창하게 말한다. “연간 소득 20파운드와 연간 지출 19파운드 6펜스는 행복으로 귀결되지. 연간 소득 20파운드, 연간 지출 20파운드 6펜스가 되면 비참해져.” 많은 재정 보수주의자들은 개인의 지급 능력에 대한 이러한 비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아마도 마가렛 대처가 가장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국가 정책에는 명확한 규칙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미카버와 달리 국가는 돈을 빌리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지출할 수 있다. 사실 거의 모든 국가가 항상 그렇게 해왔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가 아니라 과도한 재정지출 효과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마주해야할 기본적 논점은 특히 심각한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없는 ‘거시경제의 안정성’이라는 결과적 중요성을 말한다. 재정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근거는 가격 안정성이 중요하며 이것이 재정적 낭비와 무책임 때문에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인식에 있다. p.213,214

어릴 때는 왜 국가는 항상 재정적자를 지고 가는지에 대해 진지한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단지 국가도 잘 살려고 하다보면 마이너스 가 되는거구나, 마이너스 살림이 이상한게 아니라는 인식이 내게 생겨버렸다. 보수적인 재정정책에 내가 지지하는 개인적인 이유이다.

우리는 민주적 제도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것을 발전을 위한 기계적 도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 활용은 우리의 가치와 우선선위에 의해서, 그리고 사회적 발언과 참여라는 활용 가능한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야당의 역할은 이런 맥락에서 특히 중요하다.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가 허용하는 공적 논쟁과 토론은 가치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실 어떤 필요를 갖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것은 공적 참여와 대화가 지닌 성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적 토론의 힘은 민주주의의 상관항으로서 광범위한 적용 범위를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을 향상시킴으로써 민주주의 자체가 더 잘 작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에 대한 공적 토론이 더 많은 정보를 기반으로 하고 더 주류가 된다면 이것은 환경을 위해서만 좋은 일이 아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건전성과 기능에도 역시 중요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게 중요한 것처럼 민주적 과정의 영역과 영향력을 보장하는 조건과 환경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사회적 기회의 주된 원천으로서 가치가 있지만(이러한 인식은 적극적인 방어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법과 수단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 역시 존재한다. 사회 정의의 성취는 제도적 형태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민주적 지배와 규제를 포함해서), 효과적인 실천에도 달려 있다. 나는 실천의 문제를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자유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기여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이유를 제시했다. 이것은 미국과 같이 안정된 민주주의 체제나(서로 다른 인종 집단의 분화된 참여와 관련해서) 신생 민주주의 국가 양자가 모두 직면한 과제다. 이것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문제들이다. p.240,241

경제의 문제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모든 과정이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 센은 민주적인가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얼마나 민주적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명확해진다.

민주주의와 기근의 부재 사이의 인과적 관계는 알아차리기 쉽다. 기근은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이지만, 지배자가 죽는 일은 없다. 왕과 대통령, 관료들과 우두머리, 군부 지도자와 장군들은 기근의 희생자가 되지 않는다. 만일 선거도 없고 야당도 없고 검열 받지 않는 공개적 비판도 없다면, 권력을 쥔 자들은 기근을 막지 못한 실패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는 이와 달리 기근의 책임을 지도층과 정치 지도자에게 돌린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예측되는 기근을 막기 위한 정치적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 사실 기근은 막기 쉽기 때문에(이 단계에서 경제적 주장은 정치적 주장으로 바뀌게 된다), 충분히 사전에 막을 수 있다. p.269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견이 통일이 되지 않은 상태다 얼마나 비효율적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 책을 많이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독재정권하에서 주입된 교육의 효과인 것 같다. 새감 무서워진다.

이것은 조금 진지한 문제다. 그러나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낡은 형태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몫이다. 삶의 양식은 사회가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보존될 수 있다. 이것은 사회가 보존하고자 하는 대상과 생활양식에 부여하는 가치와 그 보존 비용 사이의 균형 문제다. 물론 이러한 비용편익 분석에 대해 정해진 공식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에 대한 합리적 평가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 주제에 대한 공공의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대중의 역량이다. 우리는 역량의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 사회적인 특권층 외에도 사회의 다른 집단들이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둘러싼 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막대한 비용을 치리고서라도 모든 생활양식을 보존해야 한다고 강제하지는 않아도, 대중이 사회정의를 위해 그러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사회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은 실제로 필요한 일이다. 이것은 (기초교육을 통한) 읽기와 쓰기, (자유로운 언론을 통한) 정보 습득, 그리고 (선거, 소환, 그리고 시민권의 일반적 행사와 같이) 자유롭게 참여할 실질적인 기회 같은 기본적 역량에 대해 중요성을 부여할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인권은 이러한 실천과도 연관되어 있다. p.347

개인의 역량에서 사회적 역량으로 가는 것은 단지 개인의 합으로만 되지는 않는다. 개인의 역량이 사회적 역량으로 모으는 기술적 요인에 따라서 사회적 역량은 다양한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개인의 역량에 대한 참여의지 정도가 매우 다르면, 때때로 개인은 대중이 되었을 때 침묵하고, 단지 동조만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술수에 능한 나쁜 의도를 가진 누군가에게 이용을 당할 소지도 상당히 많게 된다. 사회적 합의란 도대체 누구의 역량까지 어느 정도를 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성을 사용해 더 바람직한 사회를 규정하고 진작시킨다는 생각은 과거에 사람들을 강력하게 추동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조차도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아가톤Agathon에게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성을 기반으로 선택함으로써 가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적절한 평가의 틀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또한 목표와 평가적 활동을 고무시키기 위해 작동할 제도를 필요로 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성취하려는 것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행동규범과 추론을 필요로 한다. p.359

우리가 성취하는 것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것들, 이런 것들의 총합과 적절 한 조화로 우리는 우리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공감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이익이나 복지의 어떤 희생도 필요하지 않다. 곤궁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 당신이 그의 고난을 함께 겪는다면 오히려 당신을 더 풍요롭게 해준다. 그러나 헌신적 행동은 자기희생을 포함하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도우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부정에 대한 당신의 감각 때문이지 당신 자신의 동정심으로 인한 괴로움을 달래려면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헌신을 추구하는데는 ‘자기’의 요소가 들어가는데, 그러한 헌신은 그 자신의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헌신적 행위가 개인을 이익(혹은 복지)을 증진시키건 아니건 그 목적은 개인의 합리적 의지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p.385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의 내면의 문제이다. 만약 누군가를 돕는다는 이유가 그 사람은 내부에 존재하는 이유 때문이라면 그 행위는까지 칭찬할 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면 자신의 풍요로움보다 다른 사람을 평가해긴 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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