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자리가 없어진다면? 그래도 불안하지 않으려면?

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 Unusual Suspect Festival Seoul

지금 하는 일을 갑자기 그만둬야 한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면?
그럴 때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난 11월 1일 오후 7시, 서울 대학로 공공그라운드 라운지의 탁자 세 개에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한 그룹은 ‘IMF 세대’, 다른 두 그룹은 ‘4차 산업혁명 세대’라고 스스로를 칭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나와 가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과 그 때 있었더라면 좋았을 ‘안정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밖의 다른 순서는 없었지만 이야기는 비슷한 흐름을 보이다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당연한 듯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 해온 방향이었다.

이 자리는 언유주얼 서스펙트 페스티벌 서울(Unusual Suspect Festival Seoul) 중에서 LAB2050이 주최한 ‘내 일자리가 없어진다면?’ 세션이었다. 우리의 일자리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사회 제도는 그에 맞게 변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런 변화 가운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같이 이야기해 보자는 취지로 열린 자리였다.

© Unusual Suspect Festival Seoul

마음에 여유가 없어요

LAB2050 좋은노동랩이 진행 중인 ‘일자리 지형변화 연구’의 일부가 먼저 공개되기도 했다. 황세원 연구실장은 ‘가장 안정적인 일자리’로 보이는 산업에서 짧게는 십여 년, 길게는 이십년 이상 종사하다가 갑자기 실직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첫 번째는 한국GM 군산 공장에서 실직을 경험한 4명이다.

“정년 전에 직장을 떠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실업급여를 10개월까지 준다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어요. 불안하니까 그전에 종종 하던 취미생활도 전혀 할 마음이 안 들고요. 이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아는 것이 전혀 없지요. 그나마 할 줄 아는 일 중에서,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보 중에서 생각해 보는 수밖에요. 아예 새로운 것을 배워서 취직한다고요? 그럴 수가 있을까요? 정부 추경 예산, 지원 사업이요? 들어본 적 없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불안’을 호소한 것은 당연했다. 대기업, 자동차산업, 지역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임금 수준, 이런 일자리에서 당연한 듯 ‘안정성’을 누려오던 이들이 공장폐쇄가 공표된지 단 3개월만에 실직을 했으니. 한시바삐 다른 일자리,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도 금새 사라질지 모른다는, 자녀들의 진로에도 먹구름이 낄지 모른다는 걱정이 가득했다.

슬펐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 다음으로 만난 사람들은 호주 애들레이드의 자동차 산업 쇠퇴 상황에서 실직한 노동자 3명이다. 애들레이드는 2004년 미쓰비시 자동차 공장 폐쇄를 시작으로 지난 14년간 자동차 산업 쇠퇴를 지속적으로 경험했다. 2017년에는 홀든 GM 공장이 폐쇄됐고 그 노동자들 대상의 이직 프로그램과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안정적이었고,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면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 직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직장을 잃게 됐을 때 슬펐고 불안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들과 누리던 삶의 형태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의료비, 주거비는 직장에 다니는지 여부와 관계가 없습니다. 실업보장 제도도 잘 돼 있습니다. 실직 기간이 힘든 것은 내일 일을 계획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지요.”

호주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1~3년 전 실직을 했는데 이미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택시기사, 주택 해충관리 등 다른 일을 찾았거나, 임시로 노동조합 상근자로 일하면서 다름 직업을 모색 중이었다. 이들은 호주 정부가 자동차 산업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불만, 실직하는 과정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표출하기는 했지만 그 이외에는 크게 불안을 느끼지는 않은 듯했다. 지역의 주택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기에 사회생활 초기에 이미 내집마련을 했었다는 점, 호주의 무상의료와 실업보장 제도 덕붙에 생활 안정성이 크게 침해받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애들레이드가 지난 14년의 경험으로 발전시켜 온 이직 지원 제도 등 덕분이었다.

© Unusual Suspect Festival Seoul

아, 여기에서는 그런 문제는 없습니다

마지막은 스웨덴 말뫼에서 1987년 문 닫은 구 코쿰스 조선소 노동자 4명의 인터뷰 내용이다. 실직 당시 40~50대였던 이들은 이제 70~80대가 돼 있었다.

“조선소는 참 좋은 직장이었지요. 우리의 인생 그 자체였어요. 단순 작업보다는 창의적인 일이 많았어요. 새로운 배를 수주받으면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답을 찾아갔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공장장까지 성장하기도 했어요. 노동자들은 모두 조선소를 어떻게든 더 유지했으면 했지만 정부와 경영진이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은 압니다. 노동조합 위원장이 이사회의 일원이었으니 당연히 알지요. 가족들과의 삶의 형태나 안정성은 전혀 위협이 없었습니다.”

역시 복지 국가 스웨덴이어서인지, 실직한 후의 경험은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는 실직자가 어떤 불안과 불안정성을 겪는지, 빈약한 실업보장, 조직에 속하지 않으면 대출이자부터 올라가고 의료보험도 더 비싸지는 문제를 설명하고 나서야 “아, 그렇겠군요. 여기에서는 그런 문제는 없습니다.”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말뫼 시는 코쿰스 조선소 폐쇄로 한때 실업률이 22%까지 치솟을 정도로 위기를 겪었지만 1990년대부터 친환경 도시, 지식기반 산업으로의 전환을 꾀한 결과 북유럽에서 가장 젊은 도시, 첨단 산업을 보유한 도시가 됐다. 산업 쇠퇴를 겪는 전 세계 도시들에 귀감이 될 만한 일이지만 구 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로서는 소외된다는 느낌을 가질 만도 한데, 이들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는 변화를 해야지요. 정부는 원래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리틀 포레스트’가 진짜 ‘금수저’ 아닌가요?

이런 이야기들을 공유한 뒤,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와 가족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회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 때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회적 안정성이 있다면 덜 힘들었을까?”
© Unusual Suspect Festival Seoul

이날 참가자들은 입장할 때 이미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혹은 줄 것 같은 사건을 골랐다. 크게 ‘IMF 외환위기’와 ‘4차 산업혁명’으로 나뉘었다.

‘IMF 외환위기’ 테이블에 앉은 참가자는 아무래도 연령이 높았지만 30대도 있었다. 한 여성 참가자는 “저는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가 ‘IMF 세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시기 이후로 십수 년에 걸쳐서 직장의 안정성이 계속해서 낮아진 다음에 사회에 나간 탓에 첫 사회생활부터 그 여파를 온전히 겪었기 때문이다.

“저는 사실 2년 계약직, 프로젝트 단위의 직장밖에는 경험해 보지 못 했어요. 제가 볼 때는 정규직이어도 구조조정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안정적인 직장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늘 잠깐 실수하고 넘어지면 다음이 없을까봐 걱정했어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처럼, 실패하면 받아줄 시골집, 공동체가 있는 사람이 진짜 ‘금수저’라는 생각도 해요.”

누구나 직장을 옮기는 시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삶이 달라진 사람들도 있었다. 안정적이고 월급도 많이 주던 직장에서 정년퇴직할 것으로 생각했던 중년 남성 참가자는 IMF 시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고생을 했다. 중학생이었던 딸을 학원에 보낼 수 없었던 일, 딸이 “아빠는 운전할 줄 아니까 회사 잘려도 괜찮겠지?” 했던 말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 Unusual Suspect Festival Seoul
“실직을 해보니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어요. 직장 의료보험에서 지역 의료보험으로 바뀌니까 보험료가 거의 세 배가 되는 거예요. 돈은 못 버는데 말이죠. 몬드라곤에서는 한 협동조합이 망해도 노동자들이 아무 걱정을 안 한다는데, 기존 월급의 70%를 주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불안하지 않고 다음에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고민만 하면 된다는데, 회사가 망하지 않는 것보다도 그렇게 망해도 괜찮은 것이 ‘안정성’ 아닐까요?”

‘4차 산업혁명 세대’를 자처한 참가자들 중에서는 현재 나름대로 안정적인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유망 기업의 회계 담당자인 여성은 “인공지능 때문에 회계업무가 없어질 수 있다고 해서 불안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당장 다른 일을 찾아보거나 새로 공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 위치에서 일하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서너 번 직장을 옮겼고 최근에 퇴사를 했다는 한 참가자는 “이미 한 직장에서 평생 일 하는 구조가 아니다. 안정적인 직장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누구에게나 직장을 바꾸거나 직업 자체를 바꿔야 하는 상황들은 오는데, 이를 위한 안전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꽤 안정적인 직장에 10년 이상 다니고 있지만 역시 불안하다는 참가자는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자녀 교육을 과도하게 시키고, 거기 돈이 드는 만큼 지금 직장이 힘들어도 놓을 수 없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고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젊은 세대들이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에 결혼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도 제시했다.

‘직장 안’ 안정성보단 ‘직장 밖’ 안정성을

© Unusual Suspect Festival Seoul

참가자들에게 “ 우리는 이 사회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일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OOOO 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문장에서 빈 칸을 채울 답을 함께 찾아보자고 하자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들이 나왔다.

여럿이 답한 것 하나가 ‘주거 안정성’이었다. 한 참가자는 “서울 기준으로 1억 원 안 되는 돈으로 평생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내 집을 가질 수만 있다면 직장을 자주 옮기더라도 크게 불안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도 “주거. 돌봄, 교육에 대해서 개인이 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도록 사회적인 지원이 있다면 덜 불안하겠다.”고 했다.

또다른 참가자는 “공유주택, 쉐어하우스에 관심이 많은데 금전적인 측면보다는 공동체 때문”이라면서 “공동체 속에서 살 수 있어야 안전하고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더 구체적으로 “1인당 월 100만원의 최저생계비가 보장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당장 실업률에 연연하는 정책이 아니라, 개인들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도록 도와주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드론 창업 과정처럼 유행하는 키워드에만 자원이 쏠리는 직업훈련은 실제로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꼬집기도 했다.

정부가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를 기준으로 안정성을 판단해 보고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어차피 지금은 가장 한 명이 가족을 부양할 수도 없잖아요?”

© Unusual Suspect Festival Seoul

다양한 내용들이 전방위로 나온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특징이 있다. 직장 안에서의 안정성, 즉 해고를 어렵게 하거나 정규직이 늘어나야 한다는 등의 의견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직장 또는 직업을 잃은 뒤에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IMF 외환위기 이후의 경험으로 “직장의 안정성이란 어차피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모두가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대신 필요한 것은 직장 밖에서의 안정성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성, 사회적 안전망이 있다면 일하는 동안에도 덜 불안할 수 있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할 때도 한결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이날 참가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일하던 직장이, 산업이 사라졌어도 생활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는 호주, 스웨덴의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총 2시간으로 예정됐던 시간이 끝났어도 대화가 끝나지 않은 테이블도 있었다. 한참 더 할 이야기가 남았다는 몇 명은 인근의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낯선 사람들끼리라도 이렇게 생각을 나누고,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덜 불안하려는, 어떻게든 ‘안정성’을 조금이라도 찾아보려는 노력들로 보이기도 했다.

LAB2050의 ‘일자리 지형변화 연구’의 전체 결과는 11월 14일 ‘좋은노동포럼#1_한국판 러스트벨트의 시작, 고용위기의 시그널을 읽다’에서 공개됐다. 노동자 인터뷰를 비롯한 더 자세한 내용들도 계속해서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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