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은 줄어든다는데 왜 내 여가시간은 늘지 않을까

여가시간에도 국가간 성별 불평등이 있다

이원재(LEE, Wonjae)
LAB2050
8 min readMay 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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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데이터를 통해 분석할 주제는 ‘여가시간’이다. 우리는 쉬기 위해서 버는 것일까, 아니면 벌기 위해 쉬는 것일까? 어쩌면 이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기준이다.

벌기 위해 쉬는 나라와 쉬기 위해 버는 나라

개발도상국 국민들에게 인생이란 열심히 일해서 무언가를 생산하며 먹고 사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생산을 좀 더 잘 하기 위해 여가시간을 갖고 ‘재충전’을 한다.

반면 선진국 국민들에게 인생이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여가시간에 하는 것인데, 그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둔다.

그렇게 따지면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이다. 또한 독특한 자원이다. 돈과 비교하면 그렇다.

돈은 시작부터 불평등하다. 부자는 돈이 많다. 가난한 자는 돈이 없다. 가진 사람은 주식으로, 부동산으로, 가상자산으로 옮겨다니며 시장에서 부를 점점 더 키운다. 못가진 사람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 가진 돈을 소모하고 다시 먹거리를 구하러 시장에 나선다.

시간은 시작부터 평등하다. 세계 최고의 부자에게도 가장 가난한 이에게도 똑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진다. 돈을 쌓아둔 사람이라도 시간을 쌓아두지는 못하고, 돈이 없는 사람이라도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있다. 그 시간을 잘 사용하면 돈 부자 부럽지 않은 ‘시간 부자’로 살 수도 있다.

문제는 모든 시간이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가진 시간은 필수시간, 의무시간, 여가시간으로 나뉜다. 필수시간에는 수면, 식사 등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 포함된다. 의무시간에는 유급노동, 무급노동, 학습시간 등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시간이 포함된다.

이 두 가지 시간을 빼면 여가시간이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시간이다. 여가시간이 많을수록 시간 부자가 된다. 시간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시간을 줄여야 여가시간이 늘어나는데, 필수시간은 매우 개인적이라 사회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결과적으로 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의무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그 사회 시민의 여가시간이 결정된다.

기술과 경제 성장은 인간을 이런 의무 시간의 굴레에서 점차 해방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의무시간은 줄어들고 여가시간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선진국일수록 여가시간이 길다.

기업에서는 자동화가 유급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여가시간을 늘렸다. 주 7일 노동, 하루 12시간 노동이 주 5일, 하루 8시간으로 줄었다. 주당 35시간 노동제인 나라도 있다.

가정에서는 기계의 도입이 무급 가사돌봄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여가시간을 늘렸다. 세탁기와 청소기 같은 도구의 도입은 가사돌봄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복지국가도 큰 역할을 했다. 노동 및 복지제도 강화가 의무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늘렸다.

하지만 모두가 골고루 그 여가시간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다.

국가별 격차와 성별 격차

첫째, 나라별 격차가 있다.

핀란드 노르웨이 벨기에처럼 북부 유럽 복지국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넉넉한 여가시간을 누린다. 미국 영국 일본 등의 국가는 상대적으로 여가시간이 작다.

우리나라 여가시간은 경제 수준에 비해 작은 편이다. 북유럽이나 영미권보다 크게 작고, 터키나 그리스 같은 나라보다도 작다. 한국보다 여가시간이 작은 주요 국가는 중국 인도 멕시코 같은 나라들이다. 우리나라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곳들이다.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가시간은 오히려 줄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통계청 생활시간조사 결과, 2004년 하루 평균 5시간 9분이던 19세 이상 성인 여가시간은 2019년 4시간 50분으로 줄었다.

둘째, 성별 격차가 있다.

대부분 국가에서 남성의 여가시간이 여성보다 길다. 여성이 무급 가사돌봄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남유럽과 인도는 남녀간 여가시간 격차가 매우 크다. 이탈리아는 여성 여가시간이 남성보다 1시간 25분 작고, 스페인은 1시간 3분 작으며, 인도는 1시간 2분 작다. 영미권과 미국 남성은 여성보다 일평균 여가시간이 40분 많고, 독일 남성은 30분 많으며, 스웨덴 남성은 32분 많다.

한국의 남녀 격차는 28분으로, 영미권과 비슷하며, 경제수준에 견주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북유럽의 노르웨이와 오세아니아의 뉴질랜드에서는 남녀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여가시간의 남녀 격차는 주로 무급 가사 돌봄 노동 때문에 주로 생긴다. 대부분 국가에서 남성의 노동시간이 여성보다 더 길다. 그러나 여성의 가사 돌봄 노동시간은 남성보다 더욱 많이 길다.

무급 가사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 몰린다면, 여가시간 총량이 늘어나더라도 성별 격차는 커질 수 있다. 대부분 국가에서 여전히 이런 현상은 이어지고 있다.

여가시간의 국가간 및 성별 격차는 우선 복지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복지규모가 크고 보편성이 높은 국가일수록 여가시간 총량이 많다. 또한 가족에게 먼저 부양책임을 지우는 국가일수록 여가시간 성별격차가 크고, 국가가 개인을 직접 책임지는 국가일수록 성별 격차가 작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경우 가족 중심 선별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있는데, 여가시간 성별 격차가 크다. 북유럽 국가들은 개인 중심 보편 복지제도가 중심인데, 격차가 상대적으로 작다.

물론 관행도 무시할 수 없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복지제도는 ‘남성은 바깥 일, 여성은 집안 일’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강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아직 복지국가가 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인도의 경우도 문화가 격차의 중요한 원인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제도와 관행이 맞물려 격차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노동시간 주는데 왜 여가시간은 늘지 않을까

유급 노동시간은 매우 길지만 줄어드는 추세다. 제도적 변화도 크다. 2004년 이후 주 5일제가 단계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토요일에는 출근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 이를 계기로 전체 유급노동시간은 줄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체 유급노동시간이 줄어드는 속도는 느리다. 복지가 부족해서다. 실업급여, 국민연금, 기초연금 등의 복지제도는 이제 막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서 집 한 채라도 마련해 두지 않으면, 실업자나 노인이 되었을 때 패가망신한다는 공포가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좀 더 일해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한국 남성은 오랫동안 가계 경제를 혼자 책임지는 구조 안에 놓여 있었다. 국가는 기업을, 기업은 가장을, 가장은 가족을 부양하는 체계 안에서 가장 노릇을 요구받아서다. 무급 가사돌봄노동을 면제받는 문화의 혜택을 받았지만, 대신 직장에서 장시간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최근 자동화와 제도 변화 등으로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장시간 노동 관행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만성적인 여가시간 부족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촉진하는 정책을 펼쳤다. 고학력 여성도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학습시간과 유급노동시간 등의 ‘의무시간’은 상대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무급 가사돌봄노동시간은 그만큼 줄어들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무급 가사돌봄노동시간도 줄고는 있으나,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최근 20여년간 한국 여성은 의무시간에 속하는 학습시간과 유급노동시간이 늘어나는데, 가사 돌봄노동시간은 크게 줄지 않는 상황에 놓였을 가능성이 높다.

남성과 여성 모두,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나라에 비해 작은 여가시간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다.

여가시간을 분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통계청에서 하는 생활시간조사 데이터를 살펴보는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평일과 주말을 구분해 24시간을 시간표처럼 기입하도록 하는 조사다.

이 조사는 ‘여가시간이 얼마냐’를 묻는 주관적 설문보다 정확하다. 필수시간 의무시간 여가시간의 비율도 알수 있고, 요일별 변화도 볼 수 있으며, 국제 표준을 따르고 있어 다른 나라와 비교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5년에 한 번씩 2만9천여명을 조사한다.

아래 그래프는 각 국가별로 통계작성기관에서 실시한 생활시간조사 결과를 모아둔 것이다. 같은 해 데이터를 모을 수 없어서, 2010년대에 실시한 것을 모아두었다. 한국의 가장 최근 생활시간조사는 2019년에 있었지만, 다른 국가와 비교가능하게 만든 16~64세 자료가 정리되지 않아 2014년 조사 결과를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생활시간조사를 5년에 한 번밖에 실행하지 않는다. 매달 유급노동을 조사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와 대조적이다. 1년에 한 차례 실시하는 미국 같은 나라와도 대조적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일터에서 겪는 노동문제에는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이고 정책대응도 하지만, 무급 가사 돌봄 노동 중 겪는 문제에는 정책적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장 코로나19 이후 가족 내 돌봄시간은 극적으로 변화했을 텐데, 이를 파악할 데이터는 2025년까지 기다려야 나온다. 우리가 가사 돌봄노동을 얼마나 푸대접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좋은 데이터 없이는 좋은 분석도 좋은 대안도 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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