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한 분배 대안, 정책 실험으로 찾자

한국판 기본소득 실험을 위해, 분배혁신랩을 시작합니다

김현아 (LAB2050 기획실장) · 이원재 (LAB2050 대표)

“지난 12년간 KTX승무원 복직을 위해 투쟁하신 승무원 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마땅히 복직을 시키는게 맞는 정책이지만, 공정한 시험을 통해 입사해야할 코레일 6급 사무직에 임용을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결정이라 생각하며, 승무원 외의 코레일 일반 사무직으로의 채용은 정정당당하게 일반채용자와 경쟁하여 채용될 수 있도록 시정해 주시길 청원합니다.”

해고 뒤 12년 동안의 싸움 끝에 다시 정규직 채용이 결정된 KTX 승무원들의 소식이 알려진 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입니다. ‘수백대 1이 넘는 경쟁률의 시험을 통해 입사해야 할 자리를 그들이 차지하면 수험생들의 기회를 빼앗으니 정규직 채용을 철회해 달라’는 요지였습니다.

KTX 노동자들이 청춘을 바치고 목숨을 잃기까지 한 싸움 끝에 겨우 돌아간 자리인데, ‘공정성’을 앞세운 이런 청원은 참 서운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한 자리라도 더 남아 있으면 좋을 ‘정규직 일자리’에 대한 청년들의 열망과 예민한 반응도 이해가 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이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희소한 자원이 된 ‘ 안정된 일자리’

연일 언론에서 ‘고용 쇼크’를 질타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정부는 올해 취업자 수 증가폭을 32만 명에서 18만 명으로 대폭 하향 조정했습니다. 단순노무직에 뛰어든 청년 비중이 2004년 집계 이래 최대치라는 기사도 눈에 들어옵니다.

정부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저소득층 일자리·소득 지원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근로장려세제(EITC)로 3조 8천억 원을 투입하고, 청년층에게는 월 50만 원의 구직 활동 지원금을 주겠다는 등의 대책입니다.

실제로 일자리, 특히 고임금과 안정성까지 갖춘 1차 노동 시장의 ‘안정된 일자리’는 이제 희소한 자원이 됐습니다. 고학력자가 넘쳐나는 청년 세대가 그 희소한 일자리를 놓고 다투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경제 성장률은 낮아지고, 우리 사회 고용의 주요 축이던 제조업 대기업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임금도 높고 안정성도 높은 일자리를 많이 만든다는 것, 말처럼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고성장 시대 패러다임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

우리 사회의 분배는 절대적으로 임금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좋은 직장 들어가서 기업이 주는 높은 월급을 받으며 정년까지 다니는 게 삶의 안정성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임금을 통한 소득 분배와 그에 따른 낙수 효과에 기대를 거는 과거의 성장 패러다임은 통하지 않습니다. 정규직/고임금/좋은 근로조건을 보장하는 1차 노동 시장의 진입로가 ‘저성장 시대’에는 넓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임금이 높은 일자리가 일부 늘어난다고 해도, 그 돈은 일부 안정된 일자리가 있는 1차 노동 시장에 갇힌 채, 전체에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저임금에 고용 불안까지 겪어야 하는 2차 노동 시장은 더 위태로워집니다. 밀려난 미취업자들은 파트타임, 일용직을 찾아가게 됩니다.

기업이 돈 벌게만 해주면 그 돈이 자동으로 전체 노동자들에게 흘러가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시장 임금을 통해 분배 정의가 이뤄지는 경제 시스템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새로운 분배 구조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 한국: 한국은행(경제성장률), 세계: IMF(GDP, constant prices)

분배 정책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동안 새로운 분배 체계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 되곤 했습니다. 하나는 기술 진보에 따른 고용의 변화, ‘노동 없는 미래’가 올 것이라는 전망 하에 대안적인 분배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불확실성과 임금 불평등이 심한 현실에서, 다음 세대가 미래를 준비할 시간적, 정신적 여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경제적 안정을 뒷받침해 주어야 미래 일(work)의 변화, 기술 변화에 적응하고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술혁신에 따라 기존 노동이 대체된다면, 우리는 낡고 반복적인 일을 내려놓고 미래 사회에 필요한 새롭고 보람 있는 일을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또 생계 걱정을 덜 하게 되어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을 찾아 행복한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기처럼 보이지만, 충분히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참담합니다. 청년 세대만 봐도, 30세 미만 가구주의 절반 가량이 빚을 안고 사회에 나옵니다. 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빚까지 갚아나가야 하는 현실에서 미래를 준비할 시간과 마음의 여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삶의 안정성을 찾고 여유를 갖고 자유롭게 일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합니다. 분배 정책 대안을 서둘러 찾아야 합니다.

더 담대한 대안, 더 신중한 실험

이제 더 담대하게 새로운 분 배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때 입니다. 한국의 기존 사회보장 제도는 노동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고용된 사람들에게 유리한 사회 보험이 중심에 있습니다. 공적부조는 취약 계층을 보호하는 최저 안전망으로 짜여졌습니다.

지금은 이 두 축으로 이뤄진 분배 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포괄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보다 보편적인 분배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합니다.

유럽 복지국가들에서 분배 시스템 대안으로 기본소득 정책을 검토하는 것도 같은 고민 때문입니다. 핀란드와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 기본소득 실험에 전세계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분배 시스템을 찾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맞는 분배 시스템을 짜는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산업화와 사회 정책 발전의 정도가 다르고, 분배와 노동 윤리에 대한 규범이 저마다 다릅니다. 복지국가 발전 수준, 기존 사회보장 제도와의 정합성, 시민들의 인식 등을 고려한 한국형 분배 혁신 시나리오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실험’이라는 방식으로 신중하게 접근해야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에서 아직까지 규모있는 기본소득 정책 실험이 진행된 사례는 없었습니다. ‘정책 실험(Policy Experiment)’은 보편적 소득을 지급받는 실험 집단과 그렇지 않은 통제 집단을 최소 1,000명 이상 샘플로 두고, 최소 1~2년간 정기급여를 제공한 뒤, 대상자들의 실행 과정, 태도에 대한 효과, 행위에 대한 효과, 제도적 변화나 정책 변화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엄밀한 실험을 거친 뒤 정책 효과를 검증하는, ‘증거 기반 정책’이라고도 합니다(Guy Standing, 2017, Basic Income, 안효상 역, 2018, 『기본소득,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창비. 343–358.).

한국판 기본소득 실험을 위해, 분배혁신랩을 시작합니다

LAB2050은 올 하반기부터 ‘분배혁신랩’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 랩에서는 정책 실험을 통해 단순한 일자리 정책을 넘어서는 분배 대안을 찾아내려 합니다.

첫 과제는 한국에서 실시할 수 있는 기본소득 정책 실험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7월 중순 연구에 착수하고, 설계 과정에서 시민사회, 학계, 정책 입안자들과 토론해 나가며, 연말에는 정책 실험 설계안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이 설계안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기본소득 정책 실험을 시도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설계할 예정입니다. 새로운 분배 제도를 고민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먼저 정책 실험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판 기본소득 실험 설계 연구가 분배 혁신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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