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실패’ 보고서, 제인스빌

황세원(LAB2050 연구실장)

황세원
LAB2050
11 min readJul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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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utterstock.com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이 일을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걸.”

평생직장일 줄 알았던 GM 자동차 공장이 1년 내에 문을 닫는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 동료 몇몇은 눈물을 떨궜지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실업수당과 해고 위로금이 당분간 생계를 지탱해 줄 테니 이제라도 ‘좀 더 즐길만한’ 일을 찾아보자고,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얼핏 우리나라 상황인가 싶지만 이는 미국 위스콘신 주 소도시 제인스빌에서 2008년 GM 공장이 폐쇄된 이후 5년간의 상황을 기록한 책 ‘제인스빌(Janesville-An American Story)의 한 대목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자 에이미 골드스타인이 쓴 이 책은 제조업 일자리가 겨우 지탱하던 미국 러스트 벨트 도시들이 산업 변화의 격랑 속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여러 실존인물들을 통해 다각도로 보여준다.

GM 군산 공장 폐쇄, 끝이 아니다

우리나라 군산에서도 GM 자동차 공장이 지난 5월 말 공식 폐쇄됐다. 이로 인한 실직자가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1만 명 이상이다. 총 취업자 수가 12만 명 수준인 군산시 입장에서는 물론 국가 차원에서 봐도 심각한 위기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군산만의 문제도, GM이라는 기업만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GM은 2010년 이후에만 스웨덴, 벨기에, 독일, 캐나다, 러시아, 인도네시아, 호주에서 공장을 폐쇄했다.

내연기관 자동차가 전기차, 자율주행차로 대체되는 흐름에 ‘스마트 공장’으로의 전환 흐름까지 맞물려서 기존의 대공장 생산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자동차 산업만의 문제도 아니다. 기술과 산업의 빠른 변화 속에서 어떤 기업이 사라질지, 혹은 완전 자동화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GM 생산라인으로 대표되는, 고학력과 고숙련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임금 수준이 높았던 대규모의 조직화 된 생산직 일자리들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1995년 펴낸 <노동의 종말>에서 이미 “1세기 이내에 시장 부문의 대량 노동은 사실상 세계의 모든 산업 국가들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공지능(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을 목도하고 있는 2018년의 우리로서는 실제 진행은 더 빠르다고 느낄 수 있다.

보조금도 소용 없는 산업 변동, 해법은?

이런 상황, 즉 기술 및 산업 변화로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을 두고 제시되는 해법은 대부분 ‘교육’ 측면이다. 다음 세대를 ‘창의적인 인재’로 키우고, 노동자들은 재훈련을 통해 이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런 해법이 유효할까? 다음 세대는 차치하고, 기존 노동자들을 재훈련, 재취업 시킨다는 아이디어는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 책 ‘제인스빌’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실제 사례를 취재한 보고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인스빌의 결과는 ‘실패’다. 5년여 동안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노동자 재교육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 한 것이다.

책 ‘제인스빌’ 표지 이미지

1919년 이래 지역 경제를 떠받쳐 온 GM 공장이 완전히 문을 닫고, 5,000여 명의 ‘중산층’ 가장들이 실업자가 된 것은 인구 63,000명 도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위에 말한 남자, 13년간 일한 GM 제 1생산라인에서 정년을 맞으리라 의심치 않았던, 세 아이를 둔 가장 제라드 휘태커가 실업을 목전에 두고도 희망을 가졌던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해고자 재교육’은 디트로이트 등 러스트 벨트 도시들의 쇠락을 경험한 미국 정부가 강하게 미는 정책이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동의하는 거의 유일한 경제 정책이기도 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여러 차례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산업적으로 생명력이 다 한 생산 시스템의 숨을 연장하는 데 예산을 쓰기 보다는 노동자들을 재훈련 시켜서 다른 일자리로 옮겨가게 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한 때 GM의 신차 모델 유치 경쟁에서 위스콘신 주의 라이벌이었던, 그리고 최종 승자였던 미시건 주의 상황을 보면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미시건 주는 10억 달러라는 파격적 인센티브 패키지를 제안해 신차 ‘소닉’ 공정을 따냈다.

그러나 2011년 생산이 시작되고 보니 노동자의 40%는 시급이 기존(시간당 28달러)의 절반에 불과했다. 비슷한 공정임에도 시급 10달러를 주는 라인도 생겨났다. 시급 10~14달러는 ‘GM을 제외한’ 지역 일자리들 임금과 같은 수준이다. 경영의 주도권은 GM에 있었고 업황에 따라 언제든 다시 공장을 닫을 수 있었으므로 10억 달러를 부담한 주 정부라 해도 이런 변화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재교육에 올인한 결과는 ‘실패’

따라서, 제인스빌 지역이 ‘직업 전환 교육’에 집중한 것은 현명한, 미래지향적인 선택일 수 있었다. 공장이 멈추고 얼마 안 돼 지역 내 직업 센터와 블랙호크 단과대학의 협력으로 해고자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들이 시작됐다. 연방정부에서 300만 달러를 보조받은 덕분에 해고 노동자들은 학비는 물론, 왕복 주유비, 실습 교재비까지도 지원받았다. 즉, 돈 한 푼 없이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을 무작정 강의실로 밀어 넣은 것도 아니었다. 직업 센터는 노동자 개인의 적성과 학습 능력, 선호하는 학습 스타일, 사교성까지 측정해서 가장 적합한 직업군과 전공을 추천했다. 단과대는 88개 강의를 신설하고 강사를 대거 채용했다. 컴퓨터를 못 쓰는(심지어 켤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별도 과정도 있었다.

그래도 강의를 못 따라가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매주 20시간까지 개인강사가 추가수업을 해줬다. 학생뿐 아니라 강사들을 위한 심리상담 과정도 운영했다. 이런 추가 지원에만 학생 1인당 1만 달러 가까이가 들어갔다.

여기까지 들으면, 제인스빌은 대량실업 위기의 다른 도시들에 귀감이 될 만한 ‘재훈련’ 모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고 노동자 상당수는 학업을 중도 포기했다. 공부에 익숙지 않은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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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예전 수준만큼 벌지 못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재교육을 성공적으로 마치건 아니건 GM 시절만큼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애초부터 이 지역에 GM 조립라인만큼 돈을 주는 일자리는 없었다. 그 소득을 믿고 모기지대출을 받아 마련한 주택, 상대적으로 여유롭던 ‘중산층’(middle-class)의 생활수준은 지역의 다른 어떤 일자리로도 지탱될 수 없었다.

지역 정부와 지도층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신산업 유치와 창업 지원에도 적극 나섰다. 그러나 그 자체의 성과도 미미했을 뿐 아니라 몇 백 개 만들어진 신규 일자리들은 외부 전문 인력에 돌아가거나, 많아야 시급 15~16달러를 주는 수준이었다.

책에는 저자가 위스콘신 대학 조사 센터와 함께 실시한 주민 설문조사 결과도 수록돼 있다. 그에 따르면 직업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안 받은 사람보다 고용 비율이 높아지지 않았으며, 정규직으로 더 취업한 것도 아니었다.

2008년 이래 직업을 바꾼 사람 중 절반 이상의 소득이 이전보다 떨어졌다. 직업훈련을 받은 사람의 소득 하락률은 안 받은 사람보다 더 컸다. GM 해고자들이 받던 높은 임금과 비교한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직업훈련’에 들어간 사회적 비용과 개인들의 노력을 감안하면 허망할 정도의 결과다.

이런 현실을 일찍 깨달은 GM 출신 가장들은 학교를 떠나 ‘GM 집시’가 됐다. 차로 4~8시간 걸리는 도시의 GM 공장에서 일하면서 주말에만 집에 오는 삶을 택한 것이다. 그 공장은 자신이 정년을 맞을 때까지 버티기만 바라면서 말이다.

가족들과 떨어져 살기 싫었던 제라드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지만 학교도 2주 만에 그만뒀다. 어차피 공부해 봐야 이전만큼 벌 수 없다면 당장 취업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후로 지역의 플라스틱 제조 공장, 교도소, 연료 회사 등을 전전했지만 소득은 시간당 10달러 근처에 머물렀다. 줄어든 소득을 메우기 위해 아내와 고교생 두 딸, 중학생 아들까지 파트타임 노동에 뛰어들었다. 공공부조 혜택은 받지 못 했다. 겉으로는 가구소득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라드의 해고 시점에 고교생이던 두 딸은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했지만 중학생이던 아들은 고교 졸업 직후 군에 입대했다는 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해고’가 없었을 경우 이 가정이 누렸을 삶, 꾸었던 꿈은 크게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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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단 한 번’일 때의 부작용

재교육이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던 두 번째 이유는, 교육을 잘 이수하는 것과 새 직장에 적응하는 건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GM 공장에 카시트를 납품하는 하청공장에서 일하던 크리스티 베이어와 바브 본은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찾겠다는 목적의식, 자신들의 성향, 재취업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블랙호크의 ‘형사행정’(The Criminal Justice System) 전공을 택했다.

둘은 강사들과 인턴십 기관 담당자에게 ‘지금까지 겪은 가장 훌륭한 학생’이라는 평을 받았고 졸업과 거의 동시에 각각 인근의 교정 시설에 교도관으로 취업했다. 소득은 이전보다 다소 줄었지만 안정적이고 전문적 일자리였기에 이들의 사연은 “해고 노동자도 좋은 일을 찾을 수 있다.”는 성공 스토리로 지역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그 다음 스토리가 더 있다. 둘 다 2년여 만에 교도관을 그만둔 것이다. 특히 크리스티의 삶은 비극이 되고 만다. 그 어머니는 “딸은 하나의 직업을 잃은 뒤에 겨우 잡은 직업을 또 잃을지 모른다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기회여도 ‘단 한 번만’ 주어지며, 실패하면 다른 기회가 없다고 할 때는 부담감과 불안이라는 변수가 생겨난다. 막 해고된 노동자들에게는 특히 더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성공사례가 주는 교훈

이렇게 제인스빌의 거의 모든 시도가 ‘실패’한 과정을 낱낱이 읽고 나서, 그것이 2013년까지의 상황이었으며 5년이 더 흘렀다는 것을 상기하면 아연해진다.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우연히 얼마 전 제인스빌 인근에 2014년까지 살았던 사람을 만났다. 그에 따르면 제인스빌은 2014년에 이미 ‘한 때 멀쩡했을’ 상가와 주택들 상당수가 창문이 깨진 채로 방치된, 쇠락한 러스트 벨트 도시의 전형이었다.

그렇게 보면 ‘제인스빌’ 이야기는 과거의 것이지만 최근 GM 공장 폐쇄를 처음 경험한 우리에게는 미래의 이야기다. 어떻게든 현재 일자리를 더 유지하도록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할 것인가,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직업 훈련에 예산을 투입할 것인가, 신기술 산업을 유치할 것인가 등등, 지금 우리가 고려 중인 거의 모든 대책들에 대해서 미래로부터, 또 과거로부터 동시에 날아온 ‘실패 가능성 높음’ 보고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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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제인스빌’의 거의 유일한 성공 스토리에서 실마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교도관을 2년 만에 그만뒀다는 바브 이야기다. 다행히 그에게는 가족들의 지지와 인내를 통한 ‘두 번째 기회’와 ‘안전망’이 있었기에 공부를 더 해서 학사학위를 따고 발달장애 성인을 돕는 커뮤니티 매니저가 됐다. 바브는 “돌아보면, 공장 폐쇄는 나에게 일어난 최고의 일이었다.”고 했다. 이 계기로 새로운 도전을 했으며, ‘행복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신념도 생겼기 때문이라고.

지원하려면 숫자가 아니라 ‘삶’을 봐야

이 하나의 사례로 분명한 교훈을 도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한 사람이, 한 가정이 새로운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고, 이들을 ‘지원’한다면 긴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인스빌’이 보여준 5년(에필로그까지 합치면 7년)의 시간도 충분치 않았으니 더 장기적이어야 할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 겨우 1년이나 2년 후에 고용률, 재취업률 등이 높아진 수치를 받아보고자 접근한다면 얼마를 쓰든 지원 대상자들의 실제 삶과는 별로 상관없는 전시행정, 탁상행정 사업이 될 것이라고, ‘제인스빌’은 냉정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5월 말 전북대학교에서 열린 토론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GM 군산 공장 폐쇄의 대책 마련을 위해 열렸던 이 자리에서 한 공무원은 2018년 정부 추경으로 진행한다는 24개 대책을 소개했다.

1년짜리 직업전환 교육, 2년짜리 창업 공간 조성사업이 그나마 관련 있어 보이는 사업이었다. 2013년부터 해온 새만금 동서도로 건설사업이 포함돼 있는가 하면 ‘홀로그램 체험존 조성, ’근대역사문화 상설공연 운영‘ 등 도무지 연관성을 알 수 없는 사업들까지 망라돼 있었다.

군산에서 온 한 청중이 큰 소리로 물었다. “이 중에서 장기적 대책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자신 있는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추경 액수는 무려 1조9650억 원이었다.

· 매경이코노미 1966호 [Global] 섹션에 게재된 글입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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