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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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6 · 13 min read

[코리아단번도약포럼 후기]공공·벤처·소셜·비영리 분야서 참석해 ‘南 자본과 北 저임금 노동력’이란 도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전모델 모색

서울 명동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하는 대화모임이 열렸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북미간 담판을 하루 앞둔 2월 26일, 세계인의 이목은 북미의 지도자가 모인 베트남 하노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밤, 비록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지만 서울 명동의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도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하는 혁신가들이 모였습니다.

물론 아직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녹록치 않습니다. 기대가 컸던 북미간의 정상회담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결렬됐고, 한반도엔 여전히 정전협정이 유효합니다. 하지만 남과 북의 정상이 한 해에 세 차례나 만나고, 북미가 만나 새로운 질서를 논의하는 전례없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사실입니다.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미래를 설계하는 혁신가들이 달라지는 한반도의 상황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습니다.

평화가 깃든 한반도에서는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그동안 숱하게 회자되던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저임금 노동력과 풍부한 지하자원이 결합한 ‘발전모델’이 과연 미래에도 유효할까 등의 질문들을 던져보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 지난해 10월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로 ‘코리아단번도약네트워크 준비모임’입니다. LAB2050도 이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총 8명이 4개월 동안 2주에 한번씩 아침을 함께 먹으며 토론을 했는데요. 이원재 LAB2050 대표, 조정훈 아주대 통일연구소장, 양동수 더함 대표, 강현숙 사단법인 코드 이사, 류현정 조선비즈 선임기자, 김보라 아주통일연구소 연구원, 이희숙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 조승민 글랜스 대표가 이들입니다.

‘코리아단번도약네트워크 준비모임’이 그동안 논의한 내용들을 정리해 발표하고, 더 넓게 의견을 듣고 함께할 이들을 찾기 위해 각계의 혁신가들을 초대해 ‘코리아단번도약포럼’을 열었습니다.

강현숙 사단법인 코드 이사의 사회로 코리아단번도약포럼이 시작됐습니다.

여기서 생소한 용어가 하나 등장하죠? 바로 ‘단번도약’입니다. 이 자리에 초대된 분들도 이 용어가 생소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조정훈 아주대 통일연구소장의 ‘왜 한반도 단번도약을 이야기하는가’라는 주제의 강연으로 포럼이 시작됐습니다.

조 소장은 단번도약(leapfrogging)의 개념을 ‘한 사회의 생산시스템이 전통적인 사회발전단계를 뛰어넘어 가장 높은 수준의 시스템으로 단숨에 전환되도록 유도하는 사회발전 전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정의는 이원재 LAB2050 대표가 제안한 것인데요. 아직 이 개념의 내용을 더 채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단번도약’이냐구요. 사실 이 용어는 북한의 미디어에서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2001년 1월 7일 로동신문의 정론(사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오물쪼물 떧어 맞추고 남의 꼬리를 따라가는 식으로서가 아니라 단번에 세계최상의 것을 큼직큼직하게 들여앉히자는 것이 우리의 배심이다…우리는 단번도약의 때를 이미 맛보았다. 인공위성 ‘광명성1호’의 탄생도 그것이었고 토지정리의 천지개벽도 그것이었다.”

북한은 경제재제가 풀리면 과학기술로 단번에 경제개발을 이룩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리아단번도약네트워크 준비모임은 북한이 주창한 ‘단번도약’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한에서 지배적 담론이었던 ‘남의 기술과 자본, 북의 저임금 노동력이 결합된 경제발전 모델’을 재탕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의 양극화,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가격 폭등, 낮은 행복수준 등 북한에 앞서 경제발전을 도모했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문제점들을 답습하지도 않으면서 중소기업, 스타트업, 사회적경제, 소셜벤처 등 다양한 그룹이 참여하는 협력모델을 만들어 북이 단번에 도약하고, 남에도 윈윈이 되는 새로운 ‘혁신 모델’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단번도약’을 내걸었습니다.

조정훈 아주대 통일연구소장이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

아무리 남북관계가 해빙의 분위기를 타고 있다 해도, 모두가 이 사안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관심이 있어도 이 교류에 소외될 것이라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조 소장은 현실부터 짚었습니다.

“저는 2016년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세계은행에서 북한과 같은 저개발국을 발전시키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때 한국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 북한의 발전전략에 대한 질문을 하면 천편일률적으로 이런 답변을 내놨습니다. ‘대한민국처럼 성공한 나라가 어디있냐. 그 성공모델을 북한에 이식하면 된다’였습니다. 요즘 한반도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1960~1970년대 주로 활동하시던 분들은 내심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해왔던 것들을 북한에 전수해주겠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정작 대한민국에서 ‘혁신’을 주제로 매일매일 도전하고 있는 분들은 북한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청년들을 만나 남북 관계를 얘기하면 바로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을 바라봅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 청년들은 남북 관계를, 통일을 자기 의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청년들에겐 남북교류가 위기입니다. 북한의 청년들이 시급 1000원으로 일할 수 있다면 기업이 누구를 고용할까요.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들은 남북교류가 대기업 위주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한반도에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아 남북의 교류가 활성화되면, 그 이후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사람들이 가장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조 소장은 북의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북한도 새로운 기술과 산업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일례로 평양 인근의 은정 첨단기술개발구엔 국가과학원에 속한 130여개 연구소가 자리잡았고, 연구원의 숫자만 10만 명에 달합니다. 북한에도 자체 개발 운영체제(OS)로 구동되는 스마트폰이 400~500만대가 보급됐고, 인공지능과 관련된 발표된 논문도 있으며 스마트폰으로 금융거래 등이 가능한 핀테크 앱도 있다는 소개도 덧붙였습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 못지 않게 양극화의 심화도 북한 사회의 문제입니다. 평양 중심부의 집값은 양강도 주택의 3530여배가 된다고 합니다.

남과 북의 현실을 감안하면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중국과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기 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시장경제를 도입했습니다. 남한 내에서도 남북 교류가 ‘퍼주기’라는 프레임에 갇혀 이념논쟁이 격화되는 단골 소재였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사회혁신, 첨단기술이 맞물린 새로운 발전 모델이 필요합니다.

조정훈 소장은 세 가지 과제를 제시하며 발표를 마무리했습니다. 그 과제들은 1) 단번도약의 개념 체계화, 2) 단번도약 과제의 발굴과 지원 및 집행, 3) 단번도약을 위한 협력네트워크 구축 입니다. 연간 계획으론 상반기 제주, 하반기 평양에서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연말엔 논의된 내용을 모아 단행본을 출간하겠단 내용도 있습니다.

발표 뒤 토론은 이원재 LAB2050 대표의 사회로 진행됐습니다.

이원재 LAB2050 대표가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이원재 대표는 발표 내용에 대한 소감, 자기 분야와의 접점, 단번도약의 아이디어 등을 얘기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최근 북한에서 스마트시티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던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발언을 했습니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스마트시티의 핵심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데이터화해서 그것을 도시민들에게 서비스로 제공하는 것이고, 스마트시티의 구현이 어려운 이유는 현행 법 규제 때문인데요. 그래서 아예 북한에서 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겠단 이야기를 지난 6개월간 했습니다. 스마트시티로 북한 주민들의 삶을 높이자는 것이죠. 그런데 북한 정부에게 그 모든 데이터가 가면 다른 방식으로 쓰일 수 있단 우려도 있습니다. 또 스마트시티를 한 두개 구축해도, 그 도시들이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데요. 처음부터 큰 도시에 스마트시티를 구축하기 보다는 원산이나 해주 정도 규모의 도시에 스마트시티를 구축한 뒤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것이 남북경협으로 해볼 만한 사업입니다.”

이어 정 교수는 남북 과학기술 교류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사실 북한은 과학기술 교류를 원하는데, 아직 우리 쪽에서 어느 정도로 우리의 것을 열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나마 유일한 과학기술 교류가 북한 과기대를 지원한 것이었는데, 그것도 지난 10년간 끊겼습니다. 거기서 수업해 본 분들의 말로는 북한 학생들이 정말 스폰지처럼 흡수한다고 하고, 밤에 그룹 스터디를 하는 등 열띠게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대학 차원에서 학문적 교류를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스마트시티 등 구체적인 도시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을 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던 지난해 4월부터 스타트업이 할 수 있는 대북사업에 대한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

“전 남북 경협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남북 경협 모델이었던 개성공단에도 아이폰, 아이패드 하나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남북교류라면 스타트업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만일 북한이 중국 수준의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언어도 통하는 혁신생태계가 만들어지면 유의미하겠지만, 그런 상황이 언제쯤 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벤처기업(소셜벤처)인 루트임팩트의 허재형 대표는 처음엔 이 모임에 왜 초대됐는지 아리송했다며 발언을 시작했고, 곧이어 자본주의의 기본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허재형 루트임팩트 대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기업이 존재하는 제1의 이유는 주주이익의 극대화였습니다. 이로 인해 의도하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양극화가 생기고 분배격차가 심화됐습니다. 우리가 단번도약을 꿈꾼다면 처음부터 주주의 이익 뿐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이 균형적으로 달성되는 그런 철학이 바탕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날 모임에는 사회적경제를 추구하는 기관들에서도 다수 참석했습니다. 이은애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은 ‘시민들의 삶을 지키는 발전방식으로 사회적경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은애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 북한이 참고할 만한 사례 중에 쿠바가 있습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봉쇄를 당한 뒤에 시민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경제방식으로 사회적경제가 굉장히 효과적으로 작동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을 정리해서 상반기엔 남한에서 토론회를 개최하고, 가을에는 평양에서 그런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컨퍼런스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날 행사에 나온 의견들이 다양했습니다.

“우리는 20세기에 통일하는 나라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과학기술과 사회혁신을 결합하는 상상력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 윤종록 전 미래부 차관

“저개발국을 돕는 국제기구 안에서도 인권활동가와 개발활동가들이 서로 반목하고 협력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인권증진에 기반한 경제개발을 추구하는 사회혁신가들이 있습니다. 그런 혁신가를 지원하기 위해 아쇼카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북한에서도 우리가 합의한 가치를 실행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셜 무브먼트를 어떻게 촉진할 것인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혜영 아쇼카한국 대표

“저개발국의 발전 방식에 있어 지역 주민들이 배제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대단지 리조트를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해도 큰 자본이 돈을 벌고, 지역 주민들의 빈곤한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단번도약 전략엔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습니다.” — 변형석 사회적기업협의회 대표

“관련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요. 북한의 저임금 효과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모임에서 새로운 발전 방안을 제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 배수현 공공그라운드 대표

“우리가 만드는 단번도약 전략을 함께 실행할 북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염두에 뒀으면 좋겠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 같은 정책이 취지가 좋았어도 당사자인 북한이 불쾌하게 받아들여진 전례가 있습니다. 단번도약의 가능성이 크게 느껴지는 분야는 기존의 경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기반체계입니다. 한국의 건강보험 시스템이 미국보다 좋은 이유도 만들어질 당시에 이해관계자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회보장시스템을 비롯해 에너지, 통신, 교통, 금융 등의 분야에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 윤형중 LAB2050 연구원

이날 모임을 준비한 일원이자 모임 공간을 제공한 양동수 더함 대표는 “여기 계신 분들은 한반도의 상황이 변하고 있고, 그 변화가 자신들에게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우리의 상상이 공상에 그치지 않으려면 함께 고민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일에 함께 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발표를 맡은 조정훈 소장은 사전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마무리 발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이런 논의를 한다고, 북한 당국이나 주민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논의의 파급력이 예상보다 강할 수 있습니다. 또 대한민국은 1년 뒤를 모르는 사회입니다.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봇물 터질 때 방향성을 잃고 급류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급류에 타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LAB2050은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상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또한 코리아단번도약네트워크의 출범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이와 관련해 좋은 의견을 주실 분들도 환영합니다.


  • 코리아단번도약포럼에 참석해 주신 분들

이은애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정선애 서울시 혁신기획관
윤종록 전 미래부 차관
김돈정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
윤종수 광장 변호사(사단법인 코드 이사장)
김희옥 크리킨디센터장
한상엽 소풍 대표
허재형 루트임팩트 대표
주준형 쏘카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강정수 메디아티 대표
배수현 공공그라운드 대표
조성도 슬로워크 이사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변형석 사회적기업협의회 대표
이혜영 아쇼카한국 대표
김광욱 아시아재단 대표
김형주 GE코리아 프로젝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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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er, LAB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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