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행복을 찾는 데 필요한 조건과 자유안정성

구교준 ·최영준 ·이관후 ·이원재

* LAB2050 ‘자유안정성 혁명: 행복하고 혁신적인 대한민국을 위한 제안’ 보고서의 온라인 버전입니다. 주석, 참고문헌 등은 PDF 버전(다운로드)마지막 포스트(링크)에 표기하였습니다.

2. 진정한 행복을 찾는 데 필요한 조건

앞의 글에서 지난 반 세기 동안 대한민국 사회를 압도했던 가치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도성장기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이었던 국가주의, 경제 성장 우선주의는 더 이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며, 그 자체도 지속되기도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우선주의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국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성장이라는 신화를 넘어서 새로운 국가 비전을 고민해야 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서 4만 달러 시대로 발전하는 것이 과거 국가의 목표였다면, 국민 대다수가 절대 빈곤의 상황에서 벗어난 지금은 ‘보다 질 좋은 3만 달러 시대’를 만드는 것을 국가의 목표로 삼을 만하다. 국가의 경제 성장에서 개인의 행복으로, 공동체의 목표를 전환할 때가 됐다.

국가의 성장에서 개인의 행복으로, 우리 공동체의 목표를 전환할 때가 됐다.

행복이라는 가치를 한국 사회에 구현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 보자. 우선 행복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행복 연구자들은 행복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쾌락으로서의(hedonic) 행복과 자기실현적(eudaimonic) 행복이 그것이다(Ryan & Deci, 2001). 쾌락으로서의 행복은 주관적 안녕(subjective well-being)이라고도 표현되는데 우리가 흔히 느끼는 육체적 정신적 쾌락을 의미한다. 심리학에서는 삶에 대한 만족감 혹은 긍정적인 감정 등으로도 표현한다 (Diener, 1984).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대표되는 벤덤의 공리주의나 이를 바탕으로 한 고전경제학의 ‘효용극대화’ 원리도 바로 쾌락으로서의 행복에 기반을 두고 있다 (Posner, 1979).

이에 반해 자기실현적 행복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두며, 가치의 구현을 통해 실현된다. 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일시적인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기도 한다. 단기적으로는 고통을 느껴도 장기적으로는 더 높은 만족감을 느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대 심리학과 경제학은 모두 자기실현적 행복에 주목한다. 현대 심리학의 자기결정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은 행복의 요체가 단순 쾌락이 아닌 자기실현을 통한 만족감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현대 경제학의 역량이론(capability theory)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한 가치 추구를 삶의 질 논의의 핵심으로 본다.

행복을 이처럼 쾌락적 성격과 자기실현적 성격으로 구분하는 것은 삶의 질과 관련한 국가와 사회의 비전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다. 똑같이 행복이라고 불리지만 둘은 매우 상이한 성격을 가지며, 한 국가의 자원이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더 많이 흘러가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모습과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행복 각각의 메커니즘을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우선 쾌락으로서의 행복을 살펴보면, 그 원천은 열망(aspiration)이다. 열망이란 ‘개인이 원하는 상태와 현재의 상태의 차이를 메우고자 하는 욕구’로 정의되는데, 이러한 차이가 메워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흔히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Kahneman, 1999). 예를 들면 새 자동차를 구매하고 싶은 열망이 채워질 때 느끼는 행복감이 그에 해당한다. 문제는 열망이 충족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쾌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는 점이다. 새로 구매한 자동차에 대한 감동은 몇 달 혹은 심지어는 몇 주 만에 식어버린다. 이를 적응(adaptation)이라고 한다. 새로운 상태에 적응한 개인은 또 다른 열망을 만들어 내고 지속적으로 이러한 열망을 추구하는 쳇바퀴효과(treadmill effects)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행복 기제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어렵다. 절대 소득이 상당 수준 높아져도 거기에 금방 익숙해져서 더 높은 소득과 소비를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의 열망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메커니즘이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라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적으로 늘어난 소득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 한다. 따라서 쾌락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지속적인 행복을 느끼기 어렵고 때론 그로 인해 불행해지기도 한다.

이에 비해 자기실현적 행복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통해 실현된다. 따라서 상대적인 비교나 적응 현상으로부터 훨씬 자유롭다. 예를 들어 과시적 소비를 위해 명품을 구매해 얻는 쾌감은 주변 사람들의 명품 소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반면 내 취향에 따라 음악을 듣고 콘서트에 가는 데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음악을 얼마나 듣는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적 행복은 쾌락적 행복에 비해 훨씬 오랫동안 지속된다. 또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행복을 느끼는 순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을 갖게 한다. 사회적인 가치를 위해, 혹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봉사하는 활동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쾌락적 행복은 상대적 성격이 강하고 자기실현적 행복은 절대적 성격이 강하다.

대한민국의 행복 수준이 소득에 비해 낮은 것은 애초에 소득 분배가 평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조차 쾌락적 행복을 추구하는 데 머물 뿐 자기실현적 행복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원인은 개인의 자유로운 가치 추구를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적 안전 장치의 부재다. 자유로운 가치 추구가 가능한 환경은 자기실현적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쾌락을 넘어선 자기실현적 행복으로 지향점을 옮겨야 한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경제 및 사회 발전의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실현적 행복 추구가 가능하게끔 사회 제도를 획기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쾌락을 넘어선 자기실현적 행복으로 가치의 좌표를 이동해야 한다.

자기실현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쾌락적 행복에 경도된 우리의 현재 모습을 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행복 수준이 소득에 비해 낮은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강한 비교 성향은 쾌락적 행복 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삶에서 상대히 많은 자원이 돈과 지위 등, 외부적으로 쉽게 관찰 가능한 과시적인 부분에 투입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에서 기인한다(Kim & Ohtake, 2014). 내 소득의 절대값이 얼마인지 보다 이웃이나 친구와 비교해서 어느 정도인지에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자녀의 성적 자체 보다는 반에서, 전교에서 몇 등인지 더 궁금해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강한 비교 성향은 물질에 대한 관심과 집착으로 이어진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이 사회를 지배해 온 성장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자원이 쾌락적 행복으로 흘러가는 더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기실현적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자기실현적 행복 추구를 위해서는 개인이 자유롭게 다양한 삶의 의미를 설정하고 그에 따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돼야 한다. 예를 들어 소득수준과 관계 없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생계 걱정 없이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는 직업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이를 뒷받침하는 안전 장치로서의 제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기제다. 후자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자유로운 선택도 기대하기 어렵다. 삶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자기 가치에 부합하는 자기실현적 삶을 추구하기 어렵고, 사회의 자원 대부분은 쾌락적 행복을 향해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근본적 가치 체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 연구는 새로운 가치로 개인의 자기실현적 행복을, 이를 위해 국가가 개인에게 제공해야 하는 기반으로 자유와 안정을 제안하고자 한다. 자기실현적 행복을 수레에 비유한다면, 이 수레는 개인의 자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안정이라는 두 개의 바퀴가 받쳐줘야 움직일 수 있다. 이 연구는 그 두 가치를 합쳐서 ‘자유안정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국가가 개인에게 제공해야 하는 삶의 기반으로 자유안정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자유안정성’이라고 할 때의 ‘자유’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구에서는 18세기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강조된 ‘의지(will)’의 자유에 더해서 19세기 복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능력(capacity)’과 ‘조건(condition)’에서의 자유 개념이 출현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비의 자유란 무의미하고, 보행이 어려운 장애인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우며, 학교가 없는 곳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 개념은 20세기 이후 많은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에서도 ‘기회의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로 자리 잡았다. 물론 기회의 평등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것인가는 각 사회의 경제적 능력 및 윤리적,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유가 형식적인 구호에 머물지 않고 실질성을 가지려면 일정한 수준에서 평등성과 안정성이 구현되어야 한다. 즉, 문화적, 제도적 기반이 형성된 곳에서야 개인은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지난 200년 동안 자유 개념은 해방으로서의 자유(liberation)뿐 아니라 구현해야 할 것으로의 자유(liberty)로서도 동시에 검토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가 ‘해방’으로의 의미에 그쳤고 각 개인의 자유를 새롭게 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각 개인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일단 모든 종류의 ‘앙시앙 레짐’(구체제)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해방 자체는 공백과 진공의 상태일 뿐 아직 진정한 자유가 주어진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Arendt, 1963).

해방이 자유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의 재조직화가 필요하다. 아렌트는 개인들에게 공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를 규정한 헌법을 수립하고 이를 실제로 구현해야 이런 재조직화가 이뤄진다고 봤다.

이러한 자유 개념은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 지난 30년간 충분히 논의되지 못 했다. 시장의 자유, 혹은 시장에서 경쟁할 자유에만 집중한 탓이다. 애초에 시장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그것을 통해 인간에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시장이 지나친 경쟁에 매몰되어 인간의 자유를 왜곡하고 제한하게 된다면 본래의 중요한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Sen, 2000).

민주화 이후 한국에는 시장이라는 해방의 자유가 주어지기는 했지만, 시장이 빚어내는 불평등이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끼치는 영향을 통제할 장치가 부족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국민은 시장이 강요한 자유 이외에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잃어버렸다. 질이 낮은 일자리를 거부할 자유, 보수가 적거나 불안정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자유, 새로운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기 위해 잠시 쉴 수 있는 자유, 원하는 형태의 가정을 꾸릴 자유 같은 것들은 행복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한국인 대부분이 누리지 못 하고 있다. 제도가 없어서 잃어버린 자유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유와 안정이라는 가치는 성장 패러다임의 변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 경제의 과거 패러다임에서 성장은 ‘투입 중심’의 성장으로만 여겨졌다. 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생산 활동에 투입함으로써 이뤄낸 것이 산업화 시대의 성장이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한국 경제는 산업화를 이룬 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역할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의 성장은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혁신 성장’이어야 한다. 이는 최근 경제학의 성장 이론의 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신성장이론을 제시한 롬머(Romer, 1994)는 노동과 자본 투입에만 의존한 성장은 한계생산체감의 법칙에 직면하여 언젠가는 성장의 벽에 부딪히게 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이 수반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으로 한국 사회의 성장은 노동과 자본 투입 중심의 성장이 아닌 4차 산업혁명의 조류에 올라탄 혁신 성장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혁신’은 이제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중 하나다.

그렇다면 자유와 안정이라는 가치는 어떻게 혁신과 연결될 수 있을까? ‘혁신’ 개념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는 슘페터(Schumpeter, 1947)에 의하면 혁신이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무언가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전혀 새로운 것일 수도 있지만 현재 존재하는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재조합해서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혁신의 역사를 살펴보면 후자에 해당하는 혁신이 훨씬 많다. 때문에 슘페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혁신의 요체를 ‘기존의 지식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조합 활용해서 새로운 시장 기회를 만들어가는 재조합형 탐구’(recombinant search)라고 정의한다(Schumpeter, 1934).

자유와 안정은 다음의 두 가지 메커니즘을 통해 재조합형 탐구로서의 혁신에 기여할 수 있다.

첫째, 최근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행복과 같은 긍정적 심리자본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보다 수용적인 개인을 만든다. 행복감은 개인의 인지적 다양성을 높일 수 있고, 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다(Carr, 2011; Fredrickson & Losada, 2005). 자유와 안정은 개인의 행복에 기여하고, 행복한 개인은 창의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발휘해서 혁신에 기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최근 경영학 분야의 연구는 안정이 혁신에 미치는 영향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는 기회추구형 기업가의 창업 활동에 대한 최근 연구를 보면, 기존에 근무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을 시작한 경우보다 창업 아이디어가 상당한 수준까지 실현될 때까지 원래의 직장을 유지하다 창업한 경우 성공 확률이 훨씬 높았다(Raffiee & Feng, 2014). 이는 ‘위험 회피’(risk hedging)의 결과로 설명된다. 다니던 직장을 유지하는 경우에는 창업 실패로 인한 경제적 손실의 위험이 덜하기 때문에 그만둔 경우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정과 혁신의 관계도 이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진 사회는에서는 창업 실패로 인해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적다. 따라서 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시도가 가능해진다. 효과적 복지제도를 구축하는 것은 기업 경쟁력, 경제 성장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전히 ‘경제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경제 성장’을 최종 목표로 두고 다른 가치를 조절해 온 과거의 가치체계는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 앞으로는 경제 성장을 논하더라도 국민의 삶의 질, 즉 행복을 먼저 고려해야 하며, 특히 자기실현적 행복을 가장 우선하는 가치이자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패러다임 전환’이란 바로 이런 의미다.

정리하면, 자기실현적 행복의 기본 전제는 자유와 안정이다. 삶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가치 실현을 위한 자유로운 선택을 하며, 이러한 자유를 통해 자기실현적 행복을 경험한다.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에서 개인은 비로소 창의성과 모험성을 발휘한다. 자유와 안정은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고, 행복한 개인은 혁신을 가져오며, 혁신을 통해 성장이 이루어지고, 이는 다시 사회적 투자를 통해 안정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사이클이 형성되는 것이다.

3. 새로운 사회패러다임으로서의 ‘자유안정성’

이 연구는 한국 사회가 새롭게 추구해야 할 사회시스템을 ‘자유안정성 모델’으로 제안한다. 이는 유럽에서 시도된 유연안정성(flexicurity) 모델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이다.

자유안정성(freecurity)은 자유(freedom)와 안정성(security)를 결합한 것이다. 자유안정성 모델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생계의 안정성을 국가가 제도를 통해 구현해야 할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이 때 개인의 자유는 ‘정치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단계를 넘어선다. 노동 시장에서 유연하게 일자리를 선택할 자유를 얻는 단계도 넘어선다. 유급이든 무급이든 자기실현적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작업과 활동을 선택하고, 그런 일을 스스로 조직할 자유를 가지는 단계까지를 일컫는다.

앞에서 국가의 가치를 경제 성장에서 ‘개인의 자기실현적 행복’으로 가치를 전환하자고 제안했는데, 그 첫 걸음이 제도적 기반 마련이다. 제도가 갖춰진다고 바로 가치가 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적 기반 없이 가치가 구현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자유와 안정이라는 두 가지 가치에 대한 제도적 기반이 다 턱없이 부족하다. 때문에 사회 곳곳에 경직성과 불안정성이 자리잡고 있다. 안정된 일터일수록 경직성이 높다. 또, 안정된 일터일수록 꽉 짜여진 체계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억누른다. 공공 부문 일터, 대기업 정규직 직장들이 대표적이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 그런 직장을 벗어나면 직접적으로 생계를 위협받는 불안정성 속으로 내쳐지게 된다. 따라서 능력 있는 개인들은 안정성을 최고의 기준으로 두고 직장을 선택하며, 한 번 들어가면 이직을 쉽게 선택하지 못 한다. 한 번 불안정한 직장으로 진입한 개인들은 안정적인 쪽으로 이동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노동 시장은 이렇게 두 개로 갈라져 있고, 그에 따라 사회도 양극화됐다. 성벽 안은 지나치게 안정적이어서 혁신적 시도를 할 수 없게 경직돼 있고, 성 밖은 지나치게 불안해 혁신적 시도를 할 수 없는 형국이다.

이런 구도를 개혁하려면 개인에게 자유와 안정성 두 가지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사회 모델이 필요하다. 그와 관련해 가장 주목받아 온 모델은 유연안정성(flexicurity) 모델로, 네덜란드 및 북유럽 국가들이 20세기 후반부터 발전시켜 왔다. 유연안정성은 유연성(flexibility)와 안정성(security)를 결합시킨 개념이다. 개인과 고용주에게 노동 및고용과 관련해 더 많은 선택의 자유를 준다는 점에서 유연성을, 국가가 분배를 통해 삶의 기반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안정성을 강조한다. 최근에는 독일이 ‘노동 4.0’이라는 국가 전략을 통해 미래 산업구조에 발맞춘 노동의 재구조화를 꾀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유연안정성 모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주의깊게 봐야 할 점은 네덜란드 및 북유럽 국가에는 한국과 달리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시간제 근로와 계약직, 한시적 근로가 상당히 높은 비중으로 존재하기는 한다. 네덜란드의 경우 시간제 근로의 비중이 전체의 35%를 넘는다. 그러나 한국처럼 양쪽이 단절된 이중구조 하에서의 구분은 아니다. 보편적 사회보장 제도가 받쳐주기 때문에 고용형태와 관계 없이 누구나 상당한 수준의 삶의 안정성을 누릴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유럽의 유연안정성 모델 역시 비판받는 부분이 있다. 첫째, 유연성이 개인의 관점이 아닌 고용주의 관점에서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고용주의 이해 뿐 아니라 개인에게 자유로운 시간의 선택 및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많은 경우 고용주의 관점에서 효율성을 증가시키고, 해고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측면에서 ‘유연성’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둘째, 유연성이 성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유럽에서도 시간제나 계약직에 여성들이 많으며, 남성들은 되도록 ‘지속 계약’(permanent contract) 하에 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이 ‘유연성’의 강조로 인해 심해진 것이다. 셋째, 유연성이 불평등과 불안정성의 증가를 초래했다. 유연한 고용의 대상이 된 이들이 충분한 임금을 얻지 못하고 그 부족분 만큼 복지에 기대게 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 빈곤(working poor)’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유연안정성은 우리가 추구할 이상적 모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연구는 유연안정성 모델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자유안정성 모델을 제안한다. 유연안정성 모델이 노동 시장 내에서 유급노동의 ‘유연성’만을 강조한 것이라면, 자유안정성 모델에서는 노동(labour) 뿐 아니라 무급 노동 및 사회 혁신과 관련된 다양한 작업(work)과 활동(action)을 선택할 ‘자유’를 포괄한다. 한나 아렌트가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한 것처럼, 생계 수단으로의 노동(labour), 창조 활동으로서의 작업(work), 정치 및 사회 참여 활동으로의 활동(action)을 포함해서 원하는 일을 할 자유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미래에는 전통적 유급 노동과 그밖의 형태의 ‘일’ 간의 구분이 점차 흐려질 것이다. 개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도 기존 노동과는 다른 형태들까지로 점점 다양해질 것이다. 때문에 노동 시장 안으로만 개인의 ‘일’을 한정하지 않고,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자신의 일과 삶을 구성하고 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유안정성 모델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물론 한국에 자유안정성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노동 환경에서는 무엇보다도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필수적이다. 4대 보험 등 사회보장제도와 관련해서도 정규직, 비정규직 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지속 계약’ 하에 고용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차별 받지 않고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도 개인의 삶에 충분한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들이 원치 않는 일, 부당한 대접을 받는 일터를 거부할 수 있어야만 노동 시장의 경직성이 낮아질 수있다. 경제적 안정과 그에 따른 여유를 가진다면 개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과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주위의 평가나 비교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자기실현적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음 글 읽기: Part 3. 변화를 위한 제안: 국가가 개인에게 ‘안정’을 분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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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소개 및 목차

Part 1. 성공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나라, 대한민국

Part 2. 행복을 찾는 데 필요한 조건과 자유안정성

Part 3. 변화를 위한 제안: 국가가 개인에게 ‘안정’을 분배하자

Part 4. 변화를 위한 제안: 선택의 자유를 늘리자

Part 5. 변화를 위한 제안: 미래를 준비하자

Part 6. 국가의 자리 새로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