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세대 정책실험실 ‘LAB2050’은 기술혁명 시대의 공포를 희망으로 바꿀 담대한 계획을 함께 세워보고자 합니다.

이원재 LAB2050 대표

LAB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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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in readFeb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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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remy/Shutterstock.com

기술변화로 고용불안이 커지고 있습니다. 가장 우수한 인재들은 불안을 피해 공공부문과 건물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도전과 혁신은 사라지고, 불평등은 커져만 갑니다.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부조리를 넘어서는 담대한 상상이 가능해집니다. LAB2050은 디스토피아에 대한 공포를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으로 바꿀 계획을 세우려고 합니다.

정규직 vs 비정규직, 비정규직 vs 로봇

2017년 11월 23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대강당 앞에는 이날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정경쟁!’, ‘기회의 평등 Yes, 결과의 평등 No’ 같은 구호가 붙었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방안 공청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본사 직원이 1200여명, 외주 용역 노동자가 9천여명인 구조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이후 첫 일정으로 이 곳을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원칙을 발표했다. 공사는 정부 방침대로 정규직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 방안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본사 직원들의 반발은 거셌다. 공청회에서 연구자들이 800명~4500명을 본사 직원으로 직접고용하는 안을 발표하자, 객석에서는 고성과 야유가 터져나왔다. 특히 이미 일하고 있는 이들을 공개채용을 거치지 않고 본사에 입사시켜야 한다는 안이 나올 때 가장 반발이 컸다.

이유는 단순했다.

‘공개채용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공사 본사에 입사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젊은 직원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불공정한 입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고시촌에서 여러 해 동안 공무원 시험, 공사 시험 준비를 했던 과거를 거론하며 분노했다. 수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사에 입사한 과정의 어려움을 읍소했다. 현장의 공감은 뜨거웠다.

대강당 500여 좌석의 절반에는 정규직화가 되기를 열망하는 용역 노동자들이 앉아 있었다. 이중에는 청소 담당 직원들도, 보안검색 담당 직원들도 있었다. 발언 때마다 강당 절반에는 함성과 탄식이 오갔다.

2018년 1월 18일.

인천공항 제 2터미널이 열린 이날, 터미널 한 구석에 ‘로봇카페’가 들어섰다.

스마트폰 앱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을 하면, 로봇팔이 긴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들고 얼음을 먼저 받는다. 그리고는 잔을 커피머신에 놓고 아메리카노 추출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는 얼음 위에 따른 커피를 주문자에게 전달한다.

로봇팔 혼자 모든 작업을 처리한다. 주문 받는 캐시어도, 커피 만드는 바리스타도 당연히 없다. 자영업자가, ‘아르바이트생’이 하던 일이다.

다날이 만들어 내놓은 로봇카페가 인천공항에 처음 설치된 것이다. 2미터 남짓한 유리 부스가 그 로봇이 차지한 공간 전부다. 노동자들 사이에 안전한 일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진 그 자리에, 불안정 노동을 대체할 로봇이 들어섰다.

인천공항 로봇카페의 아메리카노는 한 잔에 2천원이다.

인천공항공사 외주용역 직원들의 본사 정규직화 논의가 한창인 가운데, 공항 한켠에는 로봇이 24시간 운영하는 무인카페가 들어섰다. 우리 사회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줄어드는 사람의 자리, 커지는 갈등

인천공항에서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은 우리 사회의 오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켠에서는 기술변화로 일자리가 줄어든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분명한 고용 감소 현상이 나타난다. 일자리의 즉각적인 감소가 아닐지라도, 생산현장에서 일거리의 감소가 일어나면서 고용 불안이 커진다.

한국고용정보원의 보고서 ‘기술변화의 고용영향분석’(2016)을 보자. 스마트 기술의 영향으로 2025년이 되면 단순노무직은 91%가 고용영향을 받는다. 판매종사자는 77%가, 기능원 은 68% 정도가 고위험 직군에 속한다.

단순한 직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들이 가장 대체위험이 높다. 이들 대부분이 지금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외주용역으로, 계약직으로 일한다. 전반적인 대체위험도 높지만, 직종 간 양극화도 심각하다. 이들에게 불안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그러니 노동자들 사이 불안과 갈등도 점점 심해진다. 안정적 일자리를 이미 가졌더라도 배려할 여유 따위는 부리기 어렵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러니 목청 높여 공정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안정적 일자리에 새로 진입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취업준비생, 비정규직, 프리랜서, 자영업자, 파트타이머들에게는 점점 더 긴 고통의 시간이 다가온다.

고임금과 정년과 연금까지 보장된 공무원, 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직업적 이상향이 등장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한 ‘건물주’는 새로운 신분으로 격상된다. 21세기, 새로운 신분사회가 열린다. 안정성이 부족해지니 더 안정적인 곳으로 몰려가고, 노동의 몫이 적어질 듯하니 자본을 가지려 몰려가는 현상이다.

혁신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는 줄고 위험은 커진다. 도전하는 이들이 주는 것은 어쩌면 합리적이다.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의 등장

지금 한국사회에 벌어지는 일은 어쩌면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이다. 기계를 파괴하는 대신, 기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는 현상. 사람의 몫이 적어지고, 적어지는 몫을 놓고 다투기 시작하면 당연히 나타나게 되는 아귀지옥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되고 있는지를 보면 이런 현상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국경제에서 임금소득자가 차지하는 몫은 점점 줄고, 자본소득자의 몫은 늘어나고 있다.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소득자가 차지하는 몫은 빠르게 커진다. 건물주나 기업 소유주가 여기 속해 있을 것이다.

상위 10% 고임금자의 몫도 점차 커진다. 대체로 대기업과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속해 있을 것이다.

반면 임금소득자(상위 10% 제외)의 몫은 추세적으로 줄어든다. 스스로 고용된 사업자인 자영업자의 몫은 벼랑에서 떨어지듯 추락한다.

상위 10% 임금소득자의 분배 몫도 어느 순간 이후 이 몫도 정체된다. 일하는 이들의 몫은 상대적으로 줄고, 자산을 소유한 이들의 몫은 계속 늘어났다.

이 숫자만 보면, 한국사회에서 평균적 임금소득자나 자영업자의 길 대신 상위 10% 임금소득자에 속할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자격증에 목을 매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를 넘어 건물주가 되어 자본소득으로 살아가 보겠다는 생각은 더욱 합리적인 선택이다.

기술혁신과 디지털 전환은 분명 생산성을 높이고 부의 크기를 키웠다.

그런데 그 혁신은 불안을 키우고, 분배구조를 악화시켰다.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대신, 법과 제도가 신분을 보장하는 자리로만 향하게 만든다.

무언가 분명히 잘못되었다. 기술혁신은 분명히 부를 키운다. 불안이 같이 커질 이유는 없다.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나온 잘못된 결과다.

혁신의 성과를 잘 거두어 골고루 분배할 수 있다면, 오히려 불안은 더 줄어들 수 있다.

생계 고통이 줄어든다면, 인간은 더 자유롭게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기술혁신의 성과가 사회에 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한 데 있다.

대안의 갈래들

기술은 21세기를 넘어 다음 세기로 이미 넘어가고 있는데, 기업/고용/복지 같은 제도 틀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특히 생산의 결실을 임금으로 나누어주고,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족의 도움으로 살게 하고, 그것도 못하는 사람들만 국가가 복지로 도와주겠다는 과거 분배구조가 문제의 중심에 있다.

몇 갈래의 대안이 이미 나와 논의되고 있다.

기술을 막거나 지연시켜 사람이 할 일을 지속시키는 방법이 있다.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주장이다.

국가가 직접 고용주가 되어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방법도 있다. 앤서니 앳킨슨의 주장이기도 하며,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유산이기도 하다.

두 대안 모두 인간에게 지시-통제가 있는 고용관계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자율성을 발휘해 가치있는 삶을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간 행태에 대한 비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시장만능주의론도 있다. 국가가 신의 자리에 서는 대신,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시장이 신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논리다. 사실 파산한 신자유주의의 한 변형일 뿐이다.

기술지체론이나 국가고용주론이나 시장만능주의론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변화에 대응하는 근본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해법도 아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믿음이 없는 해법들이다.

사람은 정말 통제받지 않으면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없는 존재일까? 무엇이 가치있는 일인지를 국가나 기업 대신 개인이 신념에 따라 정하면서도 좋은 공동체를 유지할 수는 없을까? 생계 고통이 없다면 사람들은 정말로 인생을 낭비하고 말게 될까?

인류는 지금까지 스스로 이룩한 경제적 부와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발적 시민사회를 유지하면서도 한 단계 높은 기술과 생산력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기술혁신을 포용하는 사회혁신에서 그 대안을 찾아보려 한다.

담대한 상상

인간에게는 변화의 능력이 있다. 이 변화의 시기에 잘 대응하면, 개인의 자유와 삶의 질이 한 단계 높아지는 사회를 열어갈 수 있다.

일자리가 사라진 시대, 불안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담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새로운 유토피아 계획이 필요한 때다.

새로운 분배체제는 새로운 상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기존 분배체계는 근로소득이 있는 피고용인을 전제로 한다. 고용시스템 안에서 생산에 기여한 사람을 중심으로 사회적 보호시스템이 짜여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기술변화는 고용 없는 사회를 불러온다. 따라서 일자리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분배체계의 구상이 필요하다. 고용되지 않은 이들에게도 소득이 분배되는 체계를 짜야 한다.

또 임금노동자로 고용되지 않고도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일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과거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하던 일들의 상당부분을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체하면, 인간은 오히려 더 가치있는 일을 찾아나설 수 있다. 비영리 활동의 가치, 여가와 놀이의 가치, 돌봄과 환경을 가치를 새롭게 부여하고, 이를 담을 구조를 고안해야 한다.

새로운 분배체계와 노동 구조를 실제로 구현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확산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시민들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움직일 수 있다. 그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만들어내는 변화가 사회혁신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분배체계와 가치관이, 기술혁신뿐 아니라 사회혁신을 촉진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리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새로운 사회 계약이 필요하다.

LAB2050의 질문: 새로운 사회 계약

19세기에 인류가 그랬듯, 새로운 사회계약을 써낼 수 있다면 우리는 20세기 복지국가의 번영을 넘어서는 한 차원 높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불평등이 심화하고 경직된 데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로 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가 합의한 20세기의 가치를 오히려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인류는 ‘개인의 자유’라는 거대한 가치를 발견했고 이를 정치와 사회와 경제 영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경제적 자기결정권 같은 중요한 개념으로 구체화해 실현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세기 말에는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로까지 승화시키고,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라는 인류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실질적 자유를 키우는 새로운 사회 계약은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사회에 설득해야 할까?

다음 세대 정책실험실 ‘LAB2050’이 세상에 첫 발을 디디며 품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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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정책실험실 Policy Lab for Next Gene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