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뫼 혁신 전환의 ‘진짜’ 비결

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황세원
LAB2050
12 min readDec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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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뫼 시 혁신 전환을 이끈 일마 리팔루 전 시장. ‘터닝 토르소’ 전망대에서 구 조선소 부지를 내려다보며 개발 현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어떻게 유망한 산업을 찾아내느냐고요? 그런 토론은 가장 피해야 할 종류입니다. 누구도 그 답을 알 수 없습니다.”

120년간 도시를 떠받쳤던 조선소가 문을 닫고 실업률이 22%까지 치솟았지만 20년 후인 2007년에는 유엔환경계획(UNEP)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된 도시, 1990년대부터 친환경·생명과학·IT 산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해 성공한 도시. 스웨덴 말뫼(Malmö) 시의 일마 리팔루(Ilmar Reepalus·74) 전 시장을 지난 10월 17일 만났다.

1994년부터 19년간 말뫼의 혁신 전환을 이끌었던 그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그 당시에 미래지향적 산업을 알아보고 선택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답했다.

“우리의 목표는 ‘젊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 도시 전체를 시험대(testbed)로 내놓았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삶 전체를 고려하는 개발

“그는 유럽에서 제일 바쁜 사람입니다.” 리팔루 전 시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수소문 했을 때, 말뫼 시청에서 일했던 한 스웨덴인은 이렇게 말했다. 산업 쇠락을 고민하는 전 세계 국가들이 그에게서 조언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겨우 인터뷰 약속을 했지만 전날 오후까지도 만날 장소를 전달받지 못 했다. 그러다 온 연락이 “터닝 토르소(Turning Torso) 앞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말뫼 시 혁신 전환의 상징 ‘터닝 토르소’

터닝 토르소는 한때 코쿰스(Kockoms) 조선소가 위치했던 말뫼 서쪽 항만 지구에 서 있는 54층 건물이다.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동안 건물이 90도 회전하는 독특한 건축 기법, 100%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점 때문에 ‘혁신 도시’ 말뫼의 상징이 됐다.

건물 바로 아래서 아찔하게 솟은 외양을 감상하고 있는데 리팔루 전 시장이 전기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익숙한 듯 거치대에 자전거를 묶더니 바로 건물 꼭대기 층 전망대로 안내했다. 유명한 건물이긴 하지만 아파트와 사무실로 이뤄져 있기에 내부를 이용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 리팔루 전 시장은 “저와 인연이 있는 건물이니까, 이렇게 가끔 이용할 수 있어요.”하면서 코를 찡긋 해보였다.

사방이 보이도록 탁 트인 54층에서 그는 전 조선소 부지가 어떻게 개발돼 왔는지를 설명했다. 재생에너지와 지열을 이용해서 에너지를 100% 공급하는 주거단지가 5년마다 한 필지씩 들어서고 있는데 아직도 남은 터가 꽤 됐다.

이런 식으로 개발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한꺼번에 개발하면 동시에 비슷한 연령대가 이주해 오기 때문에 보육시설, 교육기관, 노인 돌봄 시설 등이 계속 모자라게 된다.”고 설명했다. 지금 당장의 주거 형태만이 아니라 여기서 살아갈 사람들의 삶 전체를 고려하는 개발이었다.

‘다른 공장 세우자’는 시도, 철저한 실패

그밖에도 말뫼 시와 기업들이 절반씩 부담해서 세운 창업보육센터 ‘미디어 에볼루션 시티’, 도시 중심 가장 번화한 자리에 서 있는 ‘말뫼 대학’과 ‘말뫼 라이브 콘서트 하우스’ 등을 설명하던 리팔루 전 시장은 한 지점을 가리키며 “저곳이 코쿰스 크레인이 서 있던 곳”이라고 했다. 지금은 한국의 울산에 서 있는 일명 ‘골리앗 크레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 크레인이 2002년 현대중공업에 단돈 1달러에 팔려 해체됐을 때 말뫼 시민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한국 사람들은 ‘말뫼의 눈물’이라는 말로 이 도시를 기억한다고 전하자 그는 “나도 알고 있다.”면서 웃었다.

구 ‘코쿰스’ 조선소의 선박 건조 도크 자리. 말뫼 시에서 구 산업의 흔적은 이곳밖에 없다.

그에게 한국의 조선업의 위기와 한국 GM 자동차가 문을 닫은 군산시의 상황 등을 설명했다. “도시 경제를 지탱하던 산업이 흔들릴 때 노동자와 주민들은 ‘어떻게든 이 산업이 더 유지되게 해 달라’고 요청하게 마련인데 1990년대에 말뫼 시는 어떻게 혁신 산업으로의 전환을 결정했느냐?”고 물었다.

“한국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면서 그는 “우리도 기존 산업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조선업 위기를 어떻게든 넘겨보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배를 주문하기도 하고, 정부의 지분을 늘려가던 끝에 모든 조선업체들이 정부 소유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선소를 폐쇄할 수밖에 없자 정부는 SAAB에 구 조선소 부지 일부를 단돈 1크로네에 제공하면서까지 자동차 공장을 유치했다.

그러나 GM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SAAB는 채 3년이 안 돼 공장 문을 닫았다. 이미 임금 경쟁력을 잃은 상황에서 자동차 산업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리팔루 전 시장이 당선되기 2년 전 일이었다.

“말뫼의 당시 이미지는 실업자의 도시, 우울한 회색 도시였습니다. 그대로 갔다면 쇠락 도시가 됐겠지요. 다행히 몇몇 시도가 철저하게 실패했기 때문인지 ‘또 다른 산업을 끌어오자’는 주장보다는 ‘아예 다른 시도를 해 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졌습니다.”

다리와 대학 ‘건설’이 전환 비결일까?

그가 시장이 되고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말뫼를 잇는 ‘외레순드’(Øresund) 대교 건설을 마무리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뫼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말뫼 모델이 언급될 때는 이 두 가지 사업이 단기 일자리 생성을 위한 토건 사업인 것처럼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리팔루 전 시장은 “두 사업의 포인트는 말뫼 시에 사람들이 와서 살고 싶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일마 리팔루 전 말뫼 시장

외레순드 대교는 말뫼 시 차원의 사업이 아니고 1991년 스웨덴과 덴마크 정부 간의 협력에 따라 시작된 국책 사업이었다. 이 다리 건설이 말뫼 시민들의 숙원이긴 했다. 말뫼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기차로 5시간 걸리는 외진 도시다. 그러나 10㎞ 남짓의 외레순드 해협만 건너면 북유럽의 중심 도시인 덴마크 코펜하겐이다. 따라서 다리 건설 하나로 말뫼 시가 북유럽 중심 구역에 포함될 수 있었다.

다만 걱정은 있었다. 코펜하겐의 시민들이 말뫼 시로 넘어와서 주거, 소비를 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말뫼 인구가 코펜하겐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말뫼 시가 ‘실업자 도시’이자 황폐한 ‘회색 도시’인 상황에서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았다. 때문에 사업을 신속히 추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스웨덴 정부도 입장을 정하기 어려웠다.

이 사업의 등을 떠밀어 속도를 내게 한 것은 1994년 들어선 말뫼 사회민주당 정부, 그리고 리팔루 전 시장이었다. 이 다리의 완공이 말뫼 시의 ‘긍정적인 변화’(positive change)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다리가 개통되면 코펜하겐 시민들이 말뫼로 넘어와 살고 싶도록 도시를 변화시키겠다.”는 정책 방향을 잡았다.

그런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그 비전은 시민 대표들과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를 통해서 정했다. ‘말뫼가 어떤 이미지의 도시였으면 좋겠는지’에 대해 몇 달 동안 토론을 벌인 것이다. 마침 1992년 리우 환경 회의 직후였기 때문에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컸고, 특히 청년 세대의 높은 지지를 받아 ‘친환경 도시’라는 비전이 채택됐다.

“최고의 지속가능발전 도시로 간다”

도시 비전의 구체적 내용은 2000년까지 계속 채워져 ‘Malmö 2000’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발표됐다. “2020년까지 지속가능발전 측면에서 최고의 도시를 만든다.”는 목표, 기존의 노동집약적 산업을 탈피해 신재생에너지, IT, 바이오 등 첨단 산업 중심의 지식도시(Knowledge City)로 전환한다는 비전을 담고 있다.

그 결과, 2000년 7월 지상구간 8㎞, 해저구간 5㎞의 외레순드 대교가 개통됐고, 말뫼 인구가 코펜하겐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말뫼와 코펜하겐은 매일 두 도시를 오가는 통근자 수가 2만 명이 넘을 정도로 가까운 도시가 됐고, 같은 경제구역으로 묶여 북유럽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경제활동이 활발한 ‘외레순드 구역’으로 일컬어지게 됐다.

말뫼 대학. 도심 한 가운데, 말뫼 중앙역 인근에 위치해 있다.

말뫼 대학을 세운 것도 일반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말뫼에서 16㎞ 거리에 이미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룬드(Lund) 대학이 있었기에 스웨덴 내에서는 “말뫼에 대학이 왜 필요하냐?”는 시선이 강했다. 그러나 말뫼 시는 ‘청년들이 살고 싶은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고 실험할 곳이 꼭 있어야 한다는 판단 하에 대학 설립을 강행했다. 건물도 중앙역 바로 옆, 도시에서 교통이 가장 좋은 곳에 지었다. 시민들의 삶과 대학이 어우러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말뫼의 ‘친환경 도시’ 전환에 협력할 연구자들을 끌어올 수 있도록 친환경 분야 우수한 연구에 수여하는 상을 제정했다. 그러자 관련 연구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어서 생명공학, IT, 미디어 등 신산업 전문가들도 들어왔다.

리팔루 전 시장은 “중요한 것은 말뫼 대학이 설립 초기부터 기존 연구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신진 연구자들로 교수진을 구성했고, 전공을 넘어선 협업이 자유롭도록 했다는 것”이라면서 “그러다보니 새로 떠오르는 산업의 연구자들이 말뫼 대학에 계속 지원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연구하러 온 전문가들이 말뫼를 떠나지 않고 계속 여기서 사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이 도시에서 공부만 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정착해서 계속 살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나고, 신산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뫼 시는 이들을 위해서 도시를 정비하고, 사회안전망을 잘 다듬어 나가는 데 주력했습니다.”

구 조선소 부지에 세워진 ‘미디어 레볼루션 시티’. 미디어 등 신산업 업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간이다.

변화 상황에서 ‘사회 안전망’의 중요성

‘사회 안전망’은 한국과 스웨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리팔루 전 시장도 스웨덴이 높은 복지 수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저항이 덜했다는 데 동의했다.

조선업 노동자들에게 코쿰스 조선소가 평생 일하고픈 안정적인 직장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직장을 잃었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수준이 추락하거나 자녀들의 꿈이 쪼그라드는 일은 없었다.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 학비까지 무료이고, 한 직장에 근속한 사람이건 아니건 의료비, 실업보험, 노후연금 혜택을 거의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나라, 스웨덴이기 때문이다.

말뫼 시는 그에 더해서, 갑작스레 늘어난 실업자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세심한 지원을 했다. 예를 들어서 공영주택에 살던 노동자들이 일시적으로 월세를 못 내서 더 나쁜 주거환경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살고 있는 집을 스스로 수리하는 사람들에게 월세 일부를 감면해 줬다.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행정 부서 및 예산 항목 간에 칸막이 문제가 심각한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적 신뢰가 변화의 저항을 줄인다

말뫼가 한국 상황과 다른 또 한 가지는 고용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도 정부와 기업 경영자, 노동자들 사이에 불신과 갈등이 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리팔루 전 시장을 만나기 이틀 전에 인터뷰 한, 당시 코쿰스 조선소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욘-에릭 울손(89) 씨는 “정부도, 조선소 경영진도 위기를 헤쳐 나가 보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노동자들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울손 씨 자신이 노동조합 대표 자격으로 이사회 일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잘 알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신뢰 덕분에 조선소 폐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크지 않았고, 말뫼 시도 ‘혁신 전환’으로 빠르게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리팔루 전 시장에게 “당신이 지금 산업 및 고용위기를 맞은 한국 군산시의 시장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물어봤다. 군산시에 대학은 있는지, 서울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다른 제조업은 얼마나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했는데 그 핵심은 앞서 설명한 말뫼의 전환 목표와 일맥상통했다.

일마 리팔루 말뫼 전 시장. 인터뷰를 장소로 전기 자전거를 타고 왔다.

“어떤 산업을 끌어올지 고민하지 마십시오. 젊은 세대가 몰려와서 공부하고 일하고 잘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드세요. 젊은이들이 무엇이건 실험하고 시도할 수 있는 ‘시험대’(testbed)로 도시를 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시민들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보와 결정 과정들에 시민들이 쉽게 접근하고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우리가 이 변화의 주체’라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그 변화가 단지 이 도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지구를 위해 유익한 방향이라면 시민들에게는 자부심과 강력한 정체성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변화의 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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