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사각지대를 진정 없애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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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min readSep 18, 2019

[IDEA2050_014]

윤형중 (LAB2050 연구원)

출처: 셔텨스톡

한국의 공론장은 뜨겁고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지난 한 달 간은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임명을 둘러싼 논란이 다른 이슈들을 압도했지만, 그 전엔 한일 간의 역사와 경제 갈등이 화제였다. 그 외에도 분양가상한제, 파생 금융상품의 불완전판매 등이 화제였고, 그 와중에 북한은 단거리 발사체를 쏘아올렸다.

이 뉴스들만큼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 기간에 중요한 소식이 하나 더 있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지난 9월 7일부로 제정된지 20주년을 맞이했고, 정부는 이를 기념해 이 제도의 보완대책을 내놓았다. 이 제도의 20주년이 주목 받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지난 20년간 국민의 최저 수준의 생활을 보장하며 나름의 역할을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뚜렷이 확인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국가에서 굶주려 죽은 사람들

#1. 지난 7월,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아파트에서 40대 여성과 6세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이미 사망 두 달 정도로 보였고, 집 안에 식료품이 없던 것으로 보아 굶주림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찰은 추정했다.

#2. 지난 9월 1일엔 서울 강서구에서 병을 앓던 88살의 노모와 중증 지체장애를 가진 50대 남성이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와 형을 간병하다 살해했을 가능성이 떠올랐는데, 그는 이틀 후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3. 9월 4일엔 대전 중구 한 아파트에서 일가족 네 명이 사망했다. 경찰 수사 결과를 종합하면 40대 남성이 아내와 두 자녀를 죽인 뒤 아파트에서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머니에는 사채로 채무가 많고 사기를 당해 경제적 문제로 힘들다, 가족들이 집에 숨져 있으니 시신을 수습해 달라는 메모가 들어 있었다.

#4. 지난 5월 의정부에서도 남편이 아내와 10대 딸을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 있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억대의 빚에 시달렸고,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던 가정이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들만 추려도 이렇다. 이 비극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이 비극들을 막는데 무력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비극을 사전에 예방하기에도 여전히 미진하다는 점이다.

현실의 비극에 무력했던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 일단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려면 해당자가 스스로 신청을 해야하고, 소득 인정액과 부양의무자라는 두 가지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소득이나 재산의 소득 환산액 등을 반영한 소득인정액은 중위소득(모든 가구를 소득 순으로 순위를 매길 때, 정 가운데에 있는 가구의 소득)의 30% 선이 기준이 된다. 2019년 기준으로 1인 가구 51만2102원, 2인 가구 87만1958원, 3인 가구 112만8010원이다. 소득이 없는 경우 이 액수만큼 생계급여가 지급되고, 이보다 적게 벌 경우 정부가 나머지 액수를 채워준다. 부양의무자는 ‘수급권자의 1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다. 수급권자에게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의무자가 부양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경우에만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제도 곳곳의 빈틈이 사각지대 방치

앞의 사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이 기준들은 비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봉천동 사건의 경우 탈북민 출신인 엄마 한씨는 한동안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지원을 받다가 2010년부터 아르바이트로 소득이 생기자 수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올해 1월 남편과 이혼한 뒤론 사망할 때까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전에 수급한 적이 있으므로 분명 제도를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신청하지 않았을까. 한씨는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신청할 마음을 접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혼을 했어도 전 남편은 아들의 1촌 직계혈족으로 부양의무자다.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씨가 생계급여를 신청하러 주민센터를 찾았지만 공무원에게 ‘남편과의 이혼 확인서를 받아오라’는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한씨가 주민센터에 제출해야 할 문서는 ‘가족 관계 해체 사유서’ 혹은 ‘부양의무자 금융 정보 제공 동의서’다. 가족 관계가 언제부터 어떤 사유로 해체됐는지 최대한 자세하게 기술해서 심사를 받거나, 혹은 부양의무자가 부양할 형편이 안 된단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전 남편에게 개인정보 제공 등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한씨의 남편은 중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이었다. 게다가 이 모자가 살았던 지역의 구청은 가족관계해체사유서에 ‘서류 내용이 사실이 아니면 법적 책임을 함께 지겠다’는 제3의 보증인 서명까지 받게 했다. 결과적으로 한씨는 어떠한 수급 신청도 하지 않았다.

쉽게 예단할 수 없지만 담당 공무에게 실제로 냉대를 받았다면 그것도 수급 신청을 포기한 이유일 수 있다.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빈곤사회연대와 한국도시연구소가 기초생활수급자 8명을 심층 인터뷰해 올해 3월 발간한 보고서 ‘공공부조의 신청 및 이용과정에서 나타나는 빈곤의 형벌화 조치연구’를 보면 수급신청자들은 지나치게 많은 서류를 요구 받고, 죄인 취급이나 냉대를 받는 불쾌한 경험이 많다고 토로했다.

이를 담당 공무원들의 인성 문제로 취급할 수는 없다. 구조적 문제를 봐야 한다. 구청, 주민센터의 사회복지 공무원들은 과로로 신음하고 있다. 전병주 충북대 교수의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의 직무스트레스가 직무만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보면, 2013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사회복지 공무원은 혼자 기초노령연금 1119명, 장애인 1039명, 양육수당 447건, 일반보육료 517세대, 유아학비보조 385세대를 전담했고, 동료와 함께 기초생활수급자 2045세대를 관장했다. 이런 상황에 몰린 사회복지 공무원에게 친절을 요구하고, 사각지대 발굴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빅데이터 기반 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도 무용지물

정부는 2개월 단위로 단전/단수/가스공급 차단/건강보험료 체납 등 29종의 데이터를 수집해 위기가구를 발굴하지만 빅데이터망에 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출처: 셔텨스톡

그렇다면 수급 신청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사정에 있어도 죽음에 이를 때까지 발견될 수 없는 것일까.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로 한국의 복지 시스템은 ‘신청주의’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수급자를 발굴하는 ‘발굴주의’로 바뀌었다. ‘사회보장급여의 이용·제공 및 수급권자 발굴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발굴을 정부와 지자체의 역할로 부여했다. 그로 인해 2015년 도입된 시스템이 ‘사회복지통합관리망’(행복e음)이다.

정부는 2개월 단위로 단전·단수·가스공급 차단, 건강보험료 체납 등 29종의 데이터를 수집해 위기 가구를 발굴하지만, 이 시스템도 봉천동 모자에겐 무용했다. 한씨는 발견 당시까지 16개월이나 월세와 전기요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지난해 10월 관악구에 전입신고를 하며 아동수당을 신청한 적도 있었지만 정부의 빅데이터망에 걸리지 않았다. 그가 사는 곳이 데이터 수집 대상이 아닌 재개발 임대아파트였고, 전기료도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한꺼번에 걷어 한국전력에 지급해 연체가 통보되지 않았다. 사회복지통합관리망과는 별도로 영유아 건강검진, 예방접종 실시 여부 등으로 위기 아동을 추려내는 ‘e아동행복지원시스템’도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앞의 사건들 중 9월 초 강서구에서 사망한 가족은 생계급여 뿐 아니라 기초연금, 국민연금과 장애인연금 등을 수급 받았지만, 실제 수급액 총액은 3인 가구 최저생계비에 못 미쳤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부양의무자인 둘째 아들의 과거 소득으로 인해 생계급여가 일부 삭감됐다. 그런 둘째 아들마저도 올해 들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형과 어머니를 돌보느라 일을 할 수 없었다. 의정부와 대전 일가족의 비극에선 이들이 수급 대상이었는지를 확인할 만한 정확한 정보는 없으나, 적어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이들이 가진 빚과 생활고에 무력했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주년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미진한 보완책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지속적으로 개선했다. 특히 사각지대를 만드는 주범인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화해왔다. 지난 10일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20주년을 기념해 여러 개선 대책이 한꺼번에 발표됐다. 제도가 생긴 이래 최초로 부양의무자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대상(수급자가 중증 장애인인 경우)을 정했다는 점이 눈에 띄고, 수급자가 일을 해 소득이 생겨도 수급액이 덜 깎이는 ‘근로소득 공제’가 신설되기도 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인 ‘사각지대’와 ‘복지함정’에 대처하는 대안들이지만, 완벽한 해결책이라기 보단 미세조정을 하는 정책에 가깝다.

지난 4월 30일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20주년을 기념하며 ‘기초생활보장 제도 발전방안’ 심포지엄이 열렸다.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홈페이지

사실 핵심적인 대안은 이미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이 약속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유승민 당시 바른정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도 같은 공약을 밝혔었다. 또,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4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년도에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 계획(2021~23년)을 짠다. 내년도에는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이 계획의 로드맵에 부양의무자 기준 전면 폐지를 담겠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지 않은가. 자기 부모를 안 돌보는 게 현실인데, 그것을 우리가 자꾸 묵과하고 자녀가 돌봐라, 형제가 돌봐라 얘기하는 건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제도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정확하게 진단돼 있었다. 어려운 처지임에도 복지 수혜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크고, 복지 수혜자들의 자활 의지를 떨어뜨린다는 복지함정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현장의 사회복지사와 활동가들, 학계의 전문가들도 공통적으로 지적해 온 문제점이기도 하다. 매년 제도도 사각지대를 줄이고 근로의욕을 높이는 방향으로 손질됐다. 하지만 사각지대와 복지함정의 문제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자격 기준인 ‘소득인정액’과 ‘부양의무자’와 직결돼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사각지대와 복지함정이란 두 가지 문제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사각지대를 좁히면 필연적으로 복지 불신과 복지함정은 커진다.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되면 부자의 자녀도, 자녀가 부자인 부모도 수급자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수급을 못 받는 자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수 있다. 점점 민감해지는 공정에 대한 감수성에도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부양의무자 기준 완화 혹은 폐지로 새롭게 편입되는 수급자들도 수급자격 유지를 위해 근로의욕이 떨어지는 복지함정에 빠질 수 있다. 복지함정은 국민들에게 증세를 거부하게 만들고, 이는 복지 재정이 제한되는 결과로 되돌아온다.

신뢰를 내재한 정책을 설계해야 할 시점

복지 사각지대가 문제란 지적은오래됐는데도 해결은 지지부진한 편이다. 복지 불신의 벽을 뚫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출처: 셔텨스톡

현존하는 최상의 복지국가인 북유럽 국가들은 포용적인 공적 부조를 통해 복지 사각지대를 거의 해소했다. 부작용을 감수하고도 사각지대를 해소하겠단 연대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복지함정의 문제는 여전했다. 잘 알려진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이 복지함정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일까. 하나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해 사각지대를 해소하면서도 복지 신뢰를 높이기 위해 부정수급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복지 확대와 행정비용 증가라는 이중적인 부담 때문에 현실가능성이 낮다. 두 번째 선택지는 관리감독을 지금의 수준을 유지하되 사각지대를 줄이는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처럼 정부에 대한 신뢰와 취약계층과의 연대 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정책이다. 아직 우리 사회에 이런 신뢰와 연대가 자리잡았는지는 의문이다. 또 두 선택지 모두 가족이 부자인 사람이 수급하는 것을 막을 순 없다.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선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해야 하지만, 복지 불신을 자초할까봐 저항이 거세다. 그렇다고 이 기준을 놔두자니 꼭 필요한 이들이 지원을 받지 못해 비극적인 사건이 반복된다. 이 상황을 계속 방치할 순 없지 않을까.

그래서 제안하는 또 하나의 선택지는 기초생활보장제도와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을 병행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흔히 한정된 재원을 꼭 필요한 이들이 아닌 모두에게 분배하는 제도로 오해되지만, 세금을 거두고 모두에게 나누는 재분배 체계 전반의 변화를 의미한다. 특히 단순하고 누진적인 소득세제로 세금을 더 거두고, 그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세금 인상의 부정적인 효과는 제한적이면서 복지 사각지대는 확실히 없앨 수 있다.

세금제도를 복잡하게 하는 비과세·감면 제도를 정비하면 모두가 세금을 더 내지만, 특히 많이 벌수록 세금을 더 많이 내는 누진적 성격이 뚜렷해진다. 이렇게 되면 일부의 고소득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소득계층은 더 내는 세금보다 많은 기본소득을 받는다. 이들에겐 세금 인상으로 인한 부정적인 효과가 없는 셈이다. 세금 인상으로 인한 근로나 경제활동의 의욕이 저하되는 효과는 일부 고소득층에 제한된다. 대신 모두가 기본소득을 받기 때문에 복지 사각지대는 확실히 없어진다. 세제와 복지 양면에서 행정비용도 상당히 줄어든다. 더군다나 복지함정의 우려도 상당 부분 덜 수 있다. 일해서 번 소득만큼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생계급여는 삭감되지만, 기본소득은 근로소득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0만원의 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기존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차액만큼 생계급여를 받지만, 근로소득이 생겨도 생계급여만 깎일 뿐 기본소득 금액 30만원은 그대로 유지돼 추가 소득이 된다. 기본소득의 경우엔 부정수급을 받는다거나, 부자인 가족이 도와줄 수 있는데도 지원을 받는다는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모두가 소득에 따라 누진적으로 세금을 더 내고, 모두가 똑같은 기본소득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기본소득제가 가능하려면 여러 과제가 남는다. 기본소득 금액을 얼마로 할 것인지,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세제 개편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과연 복지불신을 뚫고 복지를 확대하는 것보다 어려울까. 이제는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라고 본다. 다음 대선에서도 여러 후보들이 앞다퉈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공약하고, 같은 장면이 그 다음 선거에서도 반복되면 안 되지 않을까. 아마도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그 기간 동안 무수한 비극들이 되풀이 될 것이다. 이제는 불신할 필요가 없는, 신뢰를 내재화한 정책을 설계할 때다.

윤형중 LAB2050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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