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이 부장보다 유능하다는 역설

LAB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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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in readApr 24, 2019

[IDEA2050_004]

반가운(LAB2050 연구자문위원,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

출처 : 셔터스톡

세계인의 이목이 모아졌던 알파고와 이세돌 바둑기사의 대국에서 다소 조명을 받지 못했던 인물이 있었다.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이세돌 기사의 앞에 앉아 알파고가 지시하는 대로 바둑돌을 옮겼던 아자황이다. 그는 아마 6단의 바둑 실력을 가졌지만 알파고의 지시대로 바둑을 두기만 했다.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일을 했던 그의 모습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했다.

‘일’이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여러가지다.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일을 하면서 많은 이들은 스스로 발전하고 직업인으로의 성장을 꿈꾼다. 하지만 정작 취직하고서 수년이 지난 뒤에 ‘나는 분명 성실히 일하고 있는데 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모되고 있을까’, ‘나는 왜 그동안 받아온 교육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을까’라고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은 영혼 없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아자황’의 사례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에는 수많은 ‘아자황’이 있다. ‘아자황’의 모습에서 오늘의 나를 발견하고, 내일의 나일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이 사회를 사는 구성원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통계로 드러나는 한국 노동시장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예외적으로 특징적인 모습들을 여럿 보이고 있다. 통계를 해석하면 이런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취업자의 역량이 비취업자보다 뒤떨어지는 예외적인 국가이다.’
‘한국인들은 나이가 들면서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정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심하다.’
‘학력과 고용률 사이엔 상관관계가 있지만, 능력과 고용률 사이엔 상관관계가 떨어진다.’

이런 결론들을 종합하면 우리 사회가 그동안 청년들에게 해온 조언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구직 중인 청년들에게 ‘역량을 키우거나 눈높이를 낮추라’고 해왔다.

직업교육에 투자해도 효과 떨어지는 이유

이런 조언의 배경엔 전통적인 경제이론이 있다.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터와 일을 원하는 구직자 사이에 ‘미스매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려면 노동의 공급자(구직자) 입장에선 수요에 맞게 능력을 키우거나 원하는 근로조건 보다 낮은 수준이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시장에선 역량을 키운다고 취업을 하는 것이 아닐 수 있고, 취업한 이후엔 오히려 역량이 퇴화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제기하는 근거는 국제성인역량조사(PIACC : Program for International Assessment of Adult Competencies)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직접 주관해 진행한 이 조사는 총 24개국, 16~65세의 성인 15만 7,000명을 상대로 했으며 한국인은 6,667명이 참여했다. 2008년에 시작돼 2010년 예비조사가 실시됐고, 실제 조사는 2011년 하반기와 2012년상반기에 수행됐다.

PIACC이 측정한 ‘언어능력’과 고용률 간의 관계를 분석하면 여러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특별히 언어능력을 주목해서 본 이유가 있다. OECD(2013, The Survey of Adult Skills : Reader’s Companion, OECD Publishing)에서 정의하는 언어능력은 ‘사회참여, 개인의 목표달성, 개인의 지식과 잠재력이 개발을 위해 문서화된 글을 이해, 평가, 활용 소통하는 능력’이고, PIACC이 측정한 언어능력은 단순한 ‘읽기’ 능력이 아니라 인지적인 역량을 종합 평가하는 ‘핵심정보처리능력’이다.

즉 무언가를 학습하며 이해하며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이는 특정 기업에만 필요한 특수한 능력이 아닌, 일반적인 인지능력이자 기본 역량에 가깝다. 이런 역량은 개인이 특정 기업에서 직무를 습득하는 데 사용되고, 빠른 기술변화와 산업 구조조정에서 개인이 대응하는 데에도 활용된다. 따라서 개인에겐 일종의 안전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 PIACC의 언어능력 조사 결과 점수별 분포는 표1과 같다.

표 1. PIACC 언어능력 수준별 분포 비율

우선 한국 성인의 인지적 역량을 나이대별로 살펴보면 중 ·고등 교육기(10대 후반~20대 초반)에는 다른 나라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나, 30대 이후엔 OECD 국가의 평균에 못 미친다.

그림 1. 연령별 인지적 역량수준

나이가 들수록 가파르게 인지적 역량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는 학령기 이후에는 평생학습의 기회가 적다는 점, 일터에서 개인의 역량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점 때문일 수 있다. 또는지나친 경쟁환경, 시간부족 등으로 ‘여유’가 없다는 점이 원인일 수도 있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개인이 경험하는 압박감과 결핍감은 인지능력을 상당 수준 저하시킨다.

한국의 경우 정부나 기업 등 어느 조직을 막론하고 의사결정권이 나이와 직급에 따라 위계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나이가 들수록 인지적 역량이 떨어지는 문제는 조직 전체의 생산성에 직결될 수 있다. 물론 PIACC의 조사대상이 직무 경험으로 축적되는 특수한 능력이 아닌, 일반적인 ‘인지적 역량’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나이가 들수록 그 능력이 떨어지는 현상이 보인다. 문제는 나이에 따른 역량의 격차가 OECD 국가들 중에서 한국이 가장 심각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거시적인 경제 상황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앞서 언급했듯 ‘인지적 역량’은 개인에게 일종의 안전망이다. ‘학습 역량’이 있는 실업자는 ‘직업교육훈련’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적자본으로 볼 때 한국에서는 이런 가능성이 적은 편이다. 기업들이 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단행한다면 40~50대가 주된 대상인데, 사실상 이들은 재훈련의 학습비용은 높고 그 효과는 가장 작은 사람들이다.

“취업하려면 눈높이 낮춰라”는 조언은 틀렸다

인지적 역량은 일터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된다. 생산성을 높이고, 때로는 혁신으로 이어지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은 취업자의 인지적 역량도 예외적으로 낮은 국가다. 한국의 만15세~65세가 해당되는 생산가능인구의 인지적 역량은 OECD 평균과 비슷하다. 하지만 취업자의 인지적 역량은 국제 수준에서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그림 2. 생산가능인구 역량수준 국제비교

특히 눈여겨 볼 통계가 있는데, 취업자의 언어역량 평균점수(271.9점)가 생산가능인구의 평균점수(272.6점)에 미치지 못하는 예외적인 국가가 한국이라는 점이다. 한국보다 평균점수가 낮은 국가들도 취업자가 생산가능인구보다 높은 경향이 있지만, 한국만 그 경향에서도 벗어났다. 이는 역량이 낮은 집단이 높은 집단에 비해 노동시장에 더 많이 진입하고, 원래 역량이 높았던 인적자본이 일터에 들어간 이후 빠르게 퇴화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림 3. 취업자 역량수준 국제비교

이는 청년과 여성 집단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비율이 낮고, 일터에서 역량을 활용할 기회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 고르게 작용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취업자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낮고, 일을 할수록 나이가 들수록 역량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한국의 노동시장을 필자는 이전의 연구를 통해 ‘저스킬균형’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은 교육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국가다. 그렇다면 역량 수준이 높으면 취업을 잘 하고, 소득도 많을까. 통계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저역량자(언어능력 1수준 이하 및 1수준)와 고역량자의 고용률을 국제비교하면 한국은 역량 수준이 낮은 집단의 고용률이 67.0%로 OECD 국가 21개국 가운데 두 번째로 높지만, 고역량자의 고용률은 63.2%로 21개국 중 최하위다. 고역량자의 고용률이 낮은 이유는 취업 이외 진학 등 다른 대안을 선택하거나, 고역량자가 취업할 만한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림 4. 역량 수준별 고용률 국제 비교

고용률과 학력, 역량수준과의 상관관계도 인상적이다. OECD 국가들은 평균적으로 학력, 역량수준과 고용률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었다. 학력이 높을수록, 역량이 뛰어날수록 고용률이 증가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학력과 고용률의 상관관계는 있으나, 역량과 고용률 사이의 상관관계는 없었다. 이는 인지적 역량이 고용률에 영향을 주지 않고, 고역량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부족한 탓일 수 있다.

그림 5. 학력, 역량, 고용, 임금의 관계-한국과 OECD 평균 비교

PIACC이 제공하는 여러 역량활용 지표를 활용해 필자가 구축한 ‘직장에서의 역량활용’ 지수를 만들어보았다. 그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직장에서의 역량활용 수준이 가장 낮은 국가다. 저역량자의 역량활용 수준은 가장 낮고, 고역량자의 경우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낮다. PIACC은 국제표준직업분류에 따라 응답한 개인의 직종을 전문직, 준전문 사무직, 준전문 생산직, 단순 노무직으로 분류하는데, 전체 직종에서 전문직이 차지하는 비중도 한국이 가장 낮았다.

그림6. 직장에서 스킬활용 수준과 성인의 직종에서 전문직이 차지하는 비율 국제비교

의미 있게 일하게 하는 것이 혁신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아자황의 사례는 현재가 아닌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더욱 상징적이다. 알파고가 인공지능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아자황의 존재는 ‘미래에 인간은 어떻게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진다.

위계적 일터 문화, 적대적 노사관계를 가진 기업이 상당수인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도울 것인가, 아니면 인간은 대체되거나 인공지능을 보조하는 존재로 전락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대표적이다.

노동시장이 안고 있는 문제와 변화하는 사회상을 감안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혁신’의 의미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일터에서의 ‘혁신’은 주로 이익과 효율성에 맞춰져 있었다. 혁신의 과정에서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산업화 시대에 인간의 노동은 컨베이어벨트에 맞게 재편됐다. 인간은 기계를 돕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의 경우엔 인간의 노동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필자가 제안하는 ‘혁신’의 개념은 ‘인간이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초기 인터넷 검색엔진이 경쟁하던 시기에 야후와 구글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검색 작업을 정의했다. 야후는 웹페이지를 카테고리별로 분류하였고, 구글은 많이 인용된 웹페이지 순으로 상단부터 나열되는 방식을 채택했다. 야후의 방식은 사람이 직접 웹페이지를 하나하나 분류해야 했고, 구글에선 직원이 하는 일이 알고리즘의 개발이었다.

개발한 알고리즘은 자동으로 웹페이지를 긁어 와서 데이터베이스에 모아두고, 키워드에 따라 자동으로 검색 결과를 나열했다. 사용자로선 두 방식의 차이가 크게 느끼지 못할 순 있지만, 내부 직원에게는 반복적인 일을 할 것인가, 창의적인 일을 할 것인가의 차이였다. 기술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노동을 수행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최근 택시 호출앱이 등장하면서 과거에 승객이 많은 지역을 빼곡히 알고, 동선을 잘 짜는 기사의 능력이 의미 없어졌고, 그저 호출앱이 시키는대로 일을 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는 과도기적 현상일 수도 있으나, 기술 변화가 노동의 성격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산업사회는 학령기에는 학습만, 성인기에는 일만, 노령기에는 여가만 누리는 분절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학습, 일, 여가가 전생애에 걸쳐 균형 있게 배분될 수 있도록 국가와 기업의 역할 변화가 필요하다. 국가는 개인에게 안정을 주며 학령기가 아니어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확충하고, 기업은 위계적인 기업문화를 바꿔 직원들이 역량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일터는 역량을 키우고 발휘하는 곳이란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서두에 언급한 아자황의 진면목을 주목할 필요도 있다. 바둑 대국에선 알파고의 하수인 역할을 해온 아자황은 바둑에서도 아마 6단의 실력자지만, 본업은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알파고의 설계자 중의 한 명이다. 아자황은 단순한 대리기사가 아닌, 자신이 설계한 알파고를 테스트한 것이었다. 이 사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이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조건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아자황은 단순한 대리기사가 아니었고, 설계자로서 알파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핵심 인물이었다. 결국 일의 의미를 구성하는 중요한 조건은 사람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아닐까.

반가운 LAB2050 연구자문위원과 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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