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은 혁신을 촉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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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min readMar 14, 2018

최영준 (LAB2050 연구위원장,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한국사회는 혁신과 거리가 먼 환경이다. 자율과 자유, 행복, 그리고 그 결과인 창의성과 인지적 다양성까지 상당히 낮다. 고용이 불안정한 데다 직장문화는 수직적이고 억압적이다. 직장을 나가도 가족에 의존하지 않으면 당장 대책이 없다. 그러니 부조리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며, 때로는 숙련과 지식을 활용하는 것보다 권위에 복종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 혁신이 일어나려면 숨을 고르며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안정성이 혁신을 촉진하게 되는 이유다.

우리 모두 혁신에 목말라 있다. © Alohaflaminggo Shutterstock.com

혁신에 목마른 사회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는 혁신을 설명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해 내는 것(getting new things done)’이라고 했다. 기존에 존재하는 무언가들을 조합하여 기존의 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things’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이 때 핵심적인 것이 기업가정신이다.

산업사회를 벗어나 저성장을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탈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그리고 디지털 기반의 지식경제사회로 이행하게 되면서 혁신은 너무도 목마른 사회적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다. 단순히 산업적인 측면에서 혁신만 아니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혁신(social innovation) 역시 주목 받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더 많은 혁신을 창출하며, 어떤 사회적 요인이 혁신을 만들어낼까?

혁신에 관해 가장 많이 논의된 요인은 인지적 다양성과 창의성이다. 이 연구들은 다양성과 창의성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고, 창의성의 기반은 행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MacLeod (1973)와 Gasper (2004)의 연구에서는 행복한 개인일수록 그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문제에 대해 창의적인 해결책을 잘 만들어 내며,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개인들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저항이 강함을 보여준다.

또한,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행복은 삶의 역량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역량은 개인이 가치를 두고 있는 행위나 상태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기회의 집합으로 정의된다(Robeyns, 2005). 정리하면, 인지적 다양성과 창의성이 혁신을 불러오는데, 행복이 중요한 기반이 되며,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역량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소득수준에 따른 3학년 수학성적과 발명가의 탄생 관계 (주황색: 부모 소득 상위 20%, 파란색: 부모 소득 하위 80%) © Lost Einsteins Innovation and Opportunity in America

잃어버린 아인슈타인을 찾아서

혁신에 대한 다른 연구들은 혁신가들의 삶의 안정성과 부를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최근에 해외언론에서 ‘Lost Einsteins(Bell et al, 2017)’이라고 알려지며 주목을 받았던 연구는,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적 삶을 누린 이들이 혁신가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음을 보여준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어릴 때 똑같이 수학성적이 좋았어도 경제적 상황이 좋았던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추후 혁신가가 될 확률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심지어 부유층 아이들은 어릴 때 수학 성적이 좋지 못했어도 혁신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저소득층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젠더 차이에 따른 관계를 보여주는 아래 그림도 거의 유사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만일 이 저소득층 아이들이나 여성들도 모두 ‘아인슈타인의 후예’가 되었다면 미국은 더욱 혁신이 넘쳐나게 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성별에 따른 3학년 수학성적과 발명가의 탄생 관계 (주황색: 여성, 파란색: 남성) © Lost Einsteins Innovation and Opportunity in America

국가적 차원에서 바라본 혁신

행복과 역량, 그리고 삶의 경제적 안정성 등은 개인 차원에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국가마다 행복 수준에 차이가 있고, 역량 수준의 차이가 있으며, 경제적 안정성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이 요소들 간에서는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다양한 연구들에서 암시한 바 있다.

개인의 행복, 역량,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회의 혁신 수준이 다르게 나타난다. 대체로 북유럽이나 스위스 등의 국가들에서 행복지표, 혁신지표, 역량지표, 복지/안정/평등 지표 등 각 지표가 유사한 수준(상위랭크)으로 나타난다.

구교준, 최영준, 박일주(2017)의 연구에서는 역량의 핵심을 복지로 보고 복지, 보건, 교육이 혁신에 미치는 영향을 인구 만명당 특허 건수를 종속변수로 하여 연구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공공복지지출의 효과가 R&D지출과 함께 혁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혁신을 위한 조건은 좋지 않다.

한국을 생각해보자. 한국은 혁신을 위한 조건이 여러모로 좋지 않다. 한국의 행복수준은 Happy Planet Index나 삶의 만족도 척도 등 다양한 국제비교에서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굳이 이러한 척도를 들지 않아도 OECD 국가 중 출산율이 제일 낮고, 자살률은 제일 높으며, 건강이 제일 좋지 않다고 응답하는 국가이고, 제일 오래 일하고, 남녀 간의 임금격차가 월등이 제일 높은 국가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을까? 2012년 World Value Survey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이 조사 중 1) 얼마나 본인의 업무가 창의적인지, 반복적인지를 묻는 질문과 2) 본인의 업무가 얼마나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국제비교 결과를 보면 한국은 창의적이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은 국가이다. 업무가 창의적이지 않고 반복적인 것과 독립성이 부족한 것은 자율성이 없고 권위적인 직장문화 속에서 지시와 매뉴얼에 의해 움직이는 한국의 직장문화를 잘 보여준다.

독립적 노동과 창조적 노동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박사과정 윤성열

PIAAC(Programme for the International Assessment of Adult Competencies) 자료를 활용하여 인적자본 감가상각률을 계산한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반가운 박사에 따르면 한국은 여타 OECD 국가들과 달리 고용을 하게 될 경우 실업에 있는 사람들보다 감가상각률이 더 높다. 즉, 일을 할수록 숙련도가 더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결과는 기술혁명, 소위 4차산업혁명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Goos et al. (2014) 등의 연구는 미래에 사라지게 될 일자리의 핵심적 특징이 창의적이지 않고 반복된 일자리라는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창의적이지 않고, 일할수록 숙련이 급속히 낮아지는 한국의 노동시장은 미래에 취약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Goos et. al. 2014). 반면에 가장 두터운 복지와 유연한 노동시장을 가지고 있는 네델란드와 스웨덴은 창의적 노동에 대한 응답이 가장 높다.

혁신보다 안정을 갈망하는 사회

행복하지 않고 불안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안정만(혹은 한방!)을 갈구한다. 2017년 사회조사에서 중학생, 고등학생 모두에서 최고 선호하는 직업이 공무원이었으며, 대학생은 공기업이 공무원보다 좀 더 높지만, 둘을 합하면 거의 50%에 육박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들어간 이 직업 역시 반복적이며 종속적이기(대부분의 공무원 직무의 경우) 때문에 개인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 문과는 공무원 이과는 과학자보다 의사를 선호하는 불안정성 사회, 혹은 (가상화폐 열풍처럼) ‘한방’을 통해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회에서 혁신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은 새로운 분배체계에서 시작한다.
한국사회는 자율과 자유, 행복, 그리고 그 결과인 창의성과 인지적 다양성까지 상당히 낮기 때문에 혁신을 위한 좋은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개인의 창의가 발휘될 수 있는 자율적 환경이 부재하고, 수직적이고 억압적인 노동 환경 그리고 그런 직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존재한다.

내 노동을 상품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 혹은 가족에 의존하지 않으면 당장 대책이 없는 환경에서는 내가 부조리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며, 때로는 내 숙련과 지식을 활용하는 것보다 더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그나마 안정성을 더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반복적이고 종속적인 개인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노동시장에서 잠시 벗어나도 숨을 고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탈상품화’ 제도 그리고 가족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막아주는 ‘탈가족화’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두텁고 새로운 사회보장제도 그리고 이들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사회투자제도가 있다면 안정된 개인은 더 이상 안정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행복하고 혁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혁신 사회와 혁신 없는 사회의 구조 비교

시민사회와 공공영역은 함께 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을 안정화시키는 더 두터운 복지와 공공의 지원은 시민사회를 구축(crowding-out)하고 사회적 혁신을 저해할 것인가? 최근 기부와 자원봉사의 국제비교연구로 논문을 쓴 박소현 박사의 연구를 보면 일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공공복지수준과 기부/자원봉사 수준에 대한 국제비교 자료를 보면 우리처럼 둘 다 낮은 국가도 있고, 미국처럼 공공복지는 낮지만 민간기부는 높은 국가도 있다. 하지만, 네델란드나 스웨덴처럼 공공복지수준이 높으면서도 기부/자원봉사 역시 높은 국가들이 존재한다. 즉, 어떠한 제도를 가지고 있고, 어떠한 사회경제체제를 구성하고 있는가의 문제이지, 단순히 강한 시민사회와 더 두터운 공공영역 간의 trade-off 문제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이슈를 확장하면 제도가 어떻게 시민들의 가치와 규범을 형성하여 행동하게 하는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시민의 현재 의식과 행동이 제도를 만들지만 제도를 한번 만들면 제도가 그 구성원의 가치와 규범을 형성시켜 행동하게 한다.

왜 큰 정부이자 많은 세금을 내는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국가에서 공공부문 감축에 대한 지지가 낮고, 작은 정부를 가지고 있는 미국, 일본, 한국에서 증세나 공공부문 확장에 대한 지지가 낮은가? 이와 관련해서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복지/조세 제도가 더 상호주의적이고 연대성이 높은 가치를 생산한다는 Mau(2004)의 연구결과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산업 및 사회 혁신을 가져올 분권화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큰 중앙정부가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 논의할 점은 많다. 스웨덴에 사회조사를 보면 평등(56%)이나 권력(6%), 사랑(70%), 가족안정(78%)보다 자유(freedom, 81%)를 더 높은 궁극적 가치로 보고 있다. 실제 스웨덴 사회의 공공부문 운영원리를 보면 분권화와 함께 직접 운영하고 행정하는 이들의 재량을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매우 강한 중앙화 구조에서 재량보다는 매뉴얼대로 쫓아서 실행하고 평가를 받는 체계와 스웨덴 구조는 상당히 다르다. 분권화는 단순히 정부 내 분권화를 넘어서 안정화된 개인이 시장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지하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럴 때 산업 및 사회 혁신을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에 대한 확장은 공공부문의 양적 확대를 넘어서 질적인 체질개선을 포함한다. 분권화된 구조에서, 즉 재량과 권한을 가지고 있고, 자율성이 있는 공동체가 가능해져야 개인의 정치적 효능감이 높아지고, 자신의 삶과 주변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창의적 개인이 활발한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이 두렵지 않으며, 그 시작은 새로운 분배체계로 개인에게 ‘안정’을 주는 것이다.

안정성이 높아진다면 더 많은 아인슈타인이 탄생하지 않을까? © Andrew Rybalko Shutterstock.com

*본 글은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구교준교수님과의 대화와 잡담에 많은 영향을 받은 글임. 또한, 2017년도 한국행정학회 동계학술대회 발표문(구교준, 최영준, 박일주 ‘혁신과 복지국가’ — 역량 중심 복지에 대한 연구)에 부분적으로 기반하고 있음.

참고문헌

Bell, A. M., Chetty, R., Jaravel, X., Petkova, N., & Van Reenen, J. (2017). Who Becomes an Inventor in America? The Importance of Exposure to Innovation (No. w24062).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Goos, Maarten., Manning, Alan. & Salomons, Anna (2014). Explaining job polarization: routine biased technological change and offshoring. American Economic Review 104(8). 2509–2526.
Larsen, C. A. (2008). The institutional logic of welfare attitudes: How welfare regimes influence public support.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41(2), 145–168.
Mau, S. (2004). Welfare regimes and the norms of social exchange. Current Sociology, 52(1), 53–74.
MacLeod, G. A. (1973). Does creativity lead to happiness and more enjoyment of life? Journal of Creative Behavior, 7, 227–230.
Robeyns, I. (2005). The capability approach: A theoretical survey. Journal of human Development, 6, 9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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