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제조업, ‘아빠’뿐 아니라 ‘자녀’의 현실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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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in readMay 8, 2019

[IDEA2050_005]

양승훈(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저자)

대우조선해양이 위치한 거제도의 옥포조선소. 2017.5.16, 출처 : 셔터스톡

조선업계는 2015년부터 3년여 동안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대우조선해양 한 곳에만 7조 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이 때 공적자금 집행의 조건은 ‘뼈를 깎는 고통분담’이었다. 노동자를 해고하는 ‘인적 구조조정’이 국가 재정 투입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5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조선업 구조조정이 의미하는 바가 큰 것은 단지 없어진 일자리의 숫자 때문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건실히 살아갈 수 있던 모델’의 붕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더 성장할 수 없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이로써 수출주도 성장을 이루겠다는 약속인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에게 건실한 직장을 제공하여 생계 부양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가난한 환경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한 젊은이들도 국가나 기업이 만든 직업훈련소에 ‘입소’해서 용접이나 기계조립을 배우면 남동임해공업단지에 위치한 회사들에 취업할 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성장과 제조업의 성공이 맞물리면서 이들에게는 “나의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근근히 생활하는 정도가 아니다. 대학을 나와 고시에 합격하거나 전문직이 된 사람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꽤 괜찮은 급여를 받으면서 해외여행도 다니고 집도 넓히며 4인 가족 정도는 여유롭게 건사할 수 있는 수준은 됐다.

한국의 제조업, 특히 중화학공업은 약간의 부침을 제외하면 2010년대까지 성장을 지속했다. 2000년대 초반쯤에는 중국 경제의 급속한 발전 덕분에 최고로 ‘좋은 시절’을 구가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 한국은 1인당 GDP 3만 달러를 돌파하며 선진국이 됐다. 지금 겪는 제조업의 위기는 어쩌면 선진국의 문턱에서 처음 경험하는 성장통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선진국을 추격하던 시기의 과제와는 다르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고, 주력 산업의 주도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있는 상황에 처했을 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다. 또한 ‘무엇’의 범위도 예전보다 커졌고 그 내용도 복잡해졌다.

‘평범한 사람들’ 모델에 근원적 질문을 할 때

제조업 전환기는 ‘많이 배우지 않아도 취업이 되고, 열심히만 일하면 그럭저럭 잘 살 수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시대’의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쉬지 않고 달려오던 것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숙련의 의미 변화, 고학력자의 비중 확대, 그리고 지역별 격차이다.

하나씩 살펴보면 먼저, ‘숙련의 의미 변화’는 다시 말해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동의 가치가 점차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제조업의 대표 기업, 현대자동차만 봐도 그렇다. 현대자동차는 그동안 노동자들의 숙련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조립공정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전진해 왔다.(조형제, <현대자동차의 기민한 생산 방식>, 한울, 2016) 그리고 그 목표는 이제 거의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최근, 2017~2025년까지 정규직 노동자가 17,500명 정년퇴직할 것이기 때문에 그 만큼의 인력충원을 요구했다. 사측은 그만큼 신규채용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정부나 시민사회가 압박을 하면 어느 정도는 채용할 수도 있겠지만 ‘생색내기’ 수준을 넘지 않을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공정 자동화율은 세계 최고다. 미숙련·저숙련 노동자가 투입되더라도 공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회사는 인건비라는 고정비를 줄이는 선택에 기울기 쉽다. ‘손끝 숙련’이 중요하다는 조선산업의 경우도 50% 가까운 생산공정이 사내 하청에게 넘어갔다. 주요 공정의 숙련을 유지하기 위해 정규직을 뽑기는 뽑는다지만, 공정에서 노동자 개인의 숙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해서 줄어들 것이다. 생산성의 향상 방안은 관록 있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손끝이 아니라 공대를 나온 생산기술 엔지니어와 설계 엔지니어의 시뮬레이션에서 나오고 있다.

국내 9대 조선소에서 하청 노동자의 고용규모가 2002년을 기점으로 직영 노동자보다 커졌고, 그 이후로 줄곧 압도하는 수준으로 많아졌다. 출처 :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중요한 지점은 보통 사람들의 인적 구성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대학 진학률이 20%가 되지 않던 시절, 공고나 상고를 나와 곧바로 일터로 가던 사람들이 또래의 70%를 차지했기에 ‘보통 사람들’이라는 대표성도 가졌다. 이제는 다르다. 1970년대생들 중 50%가 대학에 갔다. 1980년대생들부터는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었다.

고등교육의 보편화는 한국만의 ‘지독한 교육열’의 산물이 아니라 전지구적 현상이다. 제조업 선진국이자 직업교육의 선구자인 독일의 대학진학률도 50%에 육박한다. 이제 대학 졸업자가 ‘보통 사람들’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런 전환은 제조업 도시를 놓고 보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다. 현장 생산직이 아니라 대졸 엔지니어, 사무직이 ‘보통 사람들’이 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중요한 전환점은 지리적 불균등의 심화다. 기존 산업도시들의 위상이 낮아진 것은 생산 자체보다는 연구개발과 설계, 생산계획이라는 선행 과정이 중시되면서부터다. ‘탑 티어’(Top-Tier·일류) 엔지니어들은 수도권의 R&D 센터, 엔지니어링 센터에서의 근무를 선호한다. 현장 근무를 하더라도 일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들은 가능하면 제조거점을 수도권에 두려고 한다. SK 하이닉스는 최근 반도체 생산 공장조차 구미가 아니라 수도권 용인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반도체 산업은 분명 제조업인데도 어느 순간부터 ‘지식기반산업’이라고 불리고 있다.

고용 위기 지역에는 ‘자녀들’도 산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제조업 도시의 미래를 고민한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앞서 말한 ‘보통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 지방의 대학을 나와서 현장을 끼고 일하는 엔지니어나 사무직들이 다수가 그들이다. <6~25등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썼던 칼럼에서 “대학입시에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가지 못하지만 대학은 진학하는 수험생들이고, 대기업에는 가지 못해도 중소기업의 대부분을 채우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었다.

조선소로 치자면 서울 출신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들이 대거 이직을 해서 구멍 난 업무를 떠받치고 있는 지방대 출신의 엔지니어들이다. 지방대학 공대를 나와 기자재를 제작하는 1차부터 N차 하청업체까지 해당되는 중견·중소에서 일하는 기업 엔지니어들이다. 대학 입시 단계에서는 일정한 한계와 포기를 경험했지만, 그래도 예전 세대 노동자들처럼 단순한 숙련으로는 먹고 살 수 없음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이들이다.

‘혁신 성장을 위한 산업 고도화’를 한다면서 그 필수 요건을 ‘우수한 이공계 연구개발 인력 양성’이라고만 말하면 진짜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다. 우수한 인력의 ‘지리적 분배’의 문제 말이다. 우수한 연구자, 엔지니어들이 수도권에서만 일하려고 하고, 기업도 그에 맞춰 수도권에 핵심 공정을 집중시키는 문제는 지역 도시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심각하지만 이를 타개할 정책적 대안은 잘 보이지 않는다.

거제 옥포조선소의 뒤편엔 아파트와 주거단지가 있다. 이 곳엔 노동자이거나 실직자인 ‘아빠들’도 있지만, 이들의 ‘자녀들’인 젊은 세대도 있다. 출처 : 셔터스톡

또다른 문제는, 지역 산업도시 문제를 ‘아빠들’의 고용 문제로만 보는 것이다. 대량 실업이 발생한 산업도시를 고용위기지역 또는 산업위기특별지역으로 지정하고서 특별 편성한 정부 예산을 내려보내 노동자 재교육, 노동시장 재진입 등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현재 정부의 대표적인, 거의 유일한 고용 위기 대책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실직자들의 ‘자녀들’ 또는 자녀 세대인 젊은 인력들에 대한 대책은 들어있지 않다.

지역 노동자의 학습이 숙련이 되고 혁신이 되려면?

제조업 전환기를 맞은 제조업 국가 한국에 지금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배움과 성장에 대한 질문, 그리고 대책 마련이다. 지방을 떠나려는 탑 티어 엔지니어를 붙드는 정책도 필요하지만 지방에서 계속 살아갈, 그 지역 대학을 나오고 저숙련 상태로 일하고 있는 엔지니어들을 위한 대책이 더욱 중요하다. 이들이 숙련도를 축적하고, 일정한 삶의 질을 누리면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할 방안이 필요한 것이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강조돼 온 ‘지역별 산·학·연(triple helix) 클러스터’는 이 측면에서 볼 때 의미 있는 대안이다. 다만 보통 사람들, 그리고 ‘자녀 세대’의 관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구체적인 방향 세 가지를 제안한다면, 첫째는 지방 분공장에서 일해 온 생산직 ‘아빠’들이 더욱 숙련도를 높여가며 일하거나 다른 직장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평생교육 및 재교육, 노동시장 재진입 체제를 만들고 재정비 해야 한다. 숙련은 이제 한 작업장 안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정도가 아니라 공학지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업을 고도화 하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독일의 높아진 대학 진학률 중 많은 부분이 생산직 노동자들이 지역 공과대학으로 진학하는 경향 때문이다.

이런 평생교육, 재교육이 노동자 개개인의 노력 및 비용 부담으로만 이뤄져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의 학습 결과가 현장에 원활하게 반영되기 위해서라도 기업들의 참여는 꼭 필요하다. 즉, 제조업 기업과 노동자들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학습-숙련-혁신의 사이클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쌓여 온 갈등적 노사관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방식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합의점을 국가, 기업, 산별노조, 지역사회의 관계 안에서 찾아야 한다.

두 번째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대학 체제가 필요하다. 지방대학들이 단지 서울 소재 대학의 이류, 삼류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교육의 장이자 제조업 종사자들의 재교육을 위한 장으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러려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투자가 모두 필요하다. 대학 구조개혁평가를 이런 전환의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

희망은 ‘평범한 사람들의 혁신 역량’에 있다

마지막으로, 산업도시 단위를 넘어선 좀 더 큰 스케일의 두툼한 산·학·연 클러스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거제, 포항, 창원과 같은 도시의 경우 단일 제조업, 단일 기업에 대한 의존을 당장 줄이기는 어렵다. 장기적으로 산업도시가 가져온 산업적 이점을 고도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도시 재활성화가 진행되는 것이 낫다.

예컨대 조선산업이라면 선박 수주를 받지 못 해 건조를 못 하는 동안에는 해외 기자재 수출 준비를 하면서 생태계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이를 위해 지역 거점의 연구중심대학과 정부출연연구원의 역할이 중요하다. 공동연구를 위해 현업의 실무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더 촘촘하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개별 산업도시마다 이런 인프라를 만들 수는 없으므로 광역권이 잘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년 완공예정인 부산 부전역~마산역 구간의 경전철처럼 지역을 촘촘하게 잇는 교통망을 늘리는 것도 좋은 시도라 할 수 있다. 경영상 한계에 처한 사업체들을 지방 또는 중앙 정부가 매입해서 산·학·연 공동 기술개발을 위한 테스트베드, 실습공간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정리하자면, 지역균형발전과 제조업의 혁신성장을 원한다면 ‘시선의 전환’이 먼저 필요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두툼한 산∙학∙연 연결망을 통해 혁신 역량을 길러낼 수 있다면, 이 역량으로 기존 산업을 효과적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

평범한 ‘자녀’ 세대들이 일과 배움을 통해 성장하고, 태어나 자라온 지역에서 일정한 삶의 질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동력이 다시 산업 생태계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면? 한국은 새롭게 진화한 ‘제조업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산업정책/엔지니어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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