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자리’의 맥락에서 본 조국 후보 자격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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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in readAug 28, 2019

[IDEA2050_013]

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출처: 셔텨스톡

“경제 성장이 정체될 때, ‘좋은 일자리’는 어디에서 생길까?”

2019년 8월, 한국 사회는 대혼란에 빠져 있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딸의 입시 관련 의혹은 한일간의 경제 및 정치 갈등보다도, 북한이 새로 개발했다고 자랑하는 무기보다도, 미중 무역 분쟁보다도 훨씬 더 큰 관심을 받고 있으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딸이 대학에 합격하고,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가는 과정에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유명인이었던 아버지의 위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느냐 아니냐가 이번 사안의 가장 큰 쟁점이다. 그와 동시에 ‘한국 사회는 과연 공정한가?’,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가?’, ‘진보 세력의 엘리트들도 이 계급이 굳어지는 데 일조해 왔는가?’라는 의구심이 커지면서 또다른 국면을 만들고 있다.

그런 한편, 이 논란을 또다른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의 좋은 일자리의 기준’에 대해 연구해 온 관점에서 보면, 이 일은 한국 사회에 ‘좋은 일자리’가 얼마나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지, 그 때문에 사람들의 불안감과 조바심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수십 년 동안 성장하던 경제가 정체될 때, 수십 년 동안 ‘좋은 일자리’로 통했던 기업들이 흔들리면서 고용을 줄여나갈 때, 새로운 분야에서 ‘좋은 일자리’들이 쉽사리 생겨나지 않을 때 사회가 어떤 혼란을 겪게 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세계 여러 나라가 겪는 문제를 한국이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일자리가 생기는 시대, 줄어드는 시대

경제가 성장하고, 산업과 기업이 커져갈 때는 일자리들이 계속 생겨난다. 조직 내에서 직군 간의 이동도 비교적 자유롭고, 능력에 따라 발탁되어 더 높은 자리로 가는 일도 적지 않게 생긴다. 사환, 알바생 등으로 입사해서 정직원이 되거나, 고졸 사원이 일정한 시험을 거쳐서 대졸 사원의 직군으로 옮겨가는 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임원까지 승진하는 일도 가능했다.

그런 기회들이 충분할 때는 부유층이 유별나게 자녀 교육을 시키는 것도, 특수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를 통해 자녀들을 더 성공시키려고 하는 시도들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불법만 아니라면 말이다. 한국은 가족 중심의 네트워크 문화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른 사람이 집안 친척이나 지인을 적당한 자리에 소개해 주는 것은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채용비리 문제로 국회의원, 검사장, 은행장, 기업 임원들이 수사를 받고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는 일이 잇따른 것도 되짚어 보면 그 전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다. 사실 2000년대쯤만 되돌아 봐도, 부모가 국회의원이나 금융지주 회장에게 청탁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기업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지도 않았다. 외국 유학을 한 뒤에 관리자급으로 바로 들어가거나, 아예 적당한 사업을 차려서 대표가 되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어떻게든 기업 신입사원으로 넣으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좋은 일자리’였던 대기업들은 점점 더 고용의 문을 좁히고 있고, 그럴수록 입사자의 적격성을 감시하는 시선도 강해지고 있다. 출처:셔텨스톡

그도 그럴 것이, 한 때는 매년 100여명까지도 신입사원을 뽑았던 기업 그룹 대규모 공채들이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공채를 해도 10명 정도 뽑을까 말까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교수 추천, 지인 추천 등의 경로들도 없어졌다. 신규 입사자가 적다 보니 어떻게 취업했는지, 적격한 사람인지에 대해 감시하는 시선도 강해졌다.

그에 따라 기업 공채 입사자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의 희소성과 상대적 지위는 높아졌다. 따져 보면 부유층 자제에게는 부모가 주는 용돈 만큼의 월급도 못 받는 일자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희소성이 커지는 만큼 이 자리들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일자리가 갈수록 축소된다는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지금 자녀들을 밀어넣지 않으면 더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생길 만도 하다. 그 결과가 최근 불거진 채용 비리 사건들인 것이다.

주목할 점은, 그 채용 비리 사건의 입사 당사자들의 자격 조건은 애매한 정도일 뿐 얼토당토 않은 수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정도 자격을 만드는 데까지도 부모의 많은 자원과 여러 사람의 노력이 투입됐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모두가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한국

조국 후보의 가족은 변화해 온 시대의 맥락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조 후보 자신은 학교 선후배 동기들이 전부 뛰어들었을 사법고시를 뒤로 하고 박사학위를 따서 20대 후반에 교수가 됐다. 아무리 사법고시 패스를 최고로 치는 한국 사회라지만 그의 동창들 중에는 집안이 받쳐주지 않아서 학문의 꿈을 접고 고시생이 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조국 후보는 좋은 집안에 태어난 덕에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우아하게 걸어가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에 비해서, 그의 딸은 부모의 재력과 지위와 네트워크를 통해 의학전문대학원생이라는 지위를 획득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우아하게만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기껏 가진 자원들을 남들과 같은 경로의 자격 획득 과정에 모두 갈아넣어 왔고 많은 시간과 노력도 투입한 것 같은데도 아직 원하는 자격을 획득하지도 못 한 상태다.

한국 사람들은 그 ‘자격 획득 과정’이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은 시도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데 분노하고 있다. 평소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발언과 행동을 해 온 조국 후보였기에 더 실망하는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그저 모두가 이 사회 구조에 짓눌려 있는 중이다.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좋은 일자리’라는 자원을 놓고 한국 사회 전체가 쟁투를 벌이고 있으며, 모두가 불안해 하고 불만족스럽다.

부유층이든 아니든 모두가 사회 구조에 짓눌려 불안해하고 불만족스럽다. 정보가 부족한 보통 사람들은 자식들을 열심히 밀어넣어도 나쁜 일자리로밖에 못 보내기도 한다. 출처: 셔텨스톡

LAB2050에서는 지난해부터 제조업 도시들의 고용위기를 연구해 왔다. (지역별 고용위기 시그널과 위기 대응 모델) 군산, 거제, 창원 등 조선, 자동차 산업이 경제를 떠받치던 도시들에서는 바로 이 산업의 대기업 공장들이 ‘좋은 일자리’이고 희소한 자원이었다.

산업이 잘 나갈 때는 여기서도 지인 추천, 가족 추천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제는 그 기회가 닫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 년간 정규직으로 사람을 뽑지 않는 공장들이 부지기수다. 2018년 5월 군산 GM 자동차 공장이 폐쇄된 것은 지역에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자녀들에게 목표로 삼으라고 가르쳤던 ‘좋은 일자리’ 수천 개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지역의 특성화 고등학교에서는 자동차 산업, 조선업 취업을 목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비정규직, 파견직이어도 일단은 학생들을, 자녀들을 진입시키려 하기도 한다. 기회가 확장되던 경제 성장기의 경험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다른 길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이렇게 정보가 부족한 보통 사람들, 특히 지방 도시 부모들은 불안감으로 나서서 자식들을 열심히 밀어 넣어도 나쁜일자리로밖에 못 보내기도 한다.

부모들이 주려는 ‘좋은 일자리’, 청년들도 좋을까?

자녀들에게 목표로 삼으라고 가르쳤던 ‘좋은 일자리’들은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 성장기의 경험이 유효하다고 믿는 부모들은 자식들을 나쁜 일자리들로 밀어넣기도 한다. 출처: 셔텨스톡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사실 하나가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또다른 변화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인가?’라는 인식의 변화다. 부모 세대가 조바심을 내고, 모든 자원을 쏟아부으면서 자녀에게 주고자 했던 ‘좋은 일자리’는 사실 현재의 한국 청년들에게는 그리 좋은 일자리가 아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면 여전히 한국 청년들도 큰 조직, 고용이 안정된 직군으로의 취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것은 한국의 사회 제도가 대기업에서 장기근속을 해야만 각종 사회보험의 혜택을 볼 수 있고, 적정한 임금과 처우를 누릴 수 있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사를 해 보면, 청년들은 일자리에 대해 자율성, 소통, 재미, 성장 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2015년에 한국여성민우회가 20~30대 여성 20명을 집중 인터뷰한 결과를 보면 인터뷰 대상자들은 공통적으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일자리’를 중요하게 여겼고, 같은 업무를 하는데도 직군에 따라 처우를 달리 하는 식의 차별적 환경을 가장 견딜 수 없어 했다.

희망제작소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20~30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좋은 일의 요건은 ‘업무 자체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가’와 ‘업무 또는 조직에서 배울 점이 있는가’였다. (희망제작소: 좋은 일의 새로운 기준)

이런 가치관을 가진 청년들에게는 수십 년 된 대기업의 조직 문화는 답답할 뿐이다. 부모들은 “다니다 보면 익숙해 지고, 승진해서 높은 자리에 가면 자율성과 권한이 커진다.”고 설득하지만 자녀들은 그렇게 오래 한 조직에 다니는 것 자체를 낭비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떤 변화가 가장 필요할까? 실리콘 밸리 기업들의 근무 환경이 좋은 것은 그 일자리를 만든 사람들이 젊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기존에 있는 일자리들에 청년들을 맞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내기 쉽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성장이 정체되고 있는데, 기존의 산업들도 휘청거리는데 청년들이 어떻게 일자리를 새로 만드느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청년 창업 지원 정책들이 적지 않지만 아직 큰 성과가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수십 년 전 만든 일자리들이 더 낫다는 주장은 해 봐야 공허하기만 할 뿐이다. 어차피 이 일자리들은 줄어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일자리들이 나아 보이는 것은 사회 제도가 거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각자 좋은 일 찾아내도록 안정성을 주자

작은 기업에서 일해도, 몇 년 단위로 다른 일을 시도해도, 프리랜서로 일해도, 사회가 보장하는 일정 수준의 안정성은 누릴 수 있다면 어떨까?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과 4대 보험의 적용에 차별이 없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작은 기업에서도 노사 간에 수평적 소통 구조가 보장된다면 어떨까? 대기업처럼 강력한 노동조합이 없어도 일하는 조건과 환경을 개선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자녀 교육을 위해 안달하고 조바심 내는 사람들, 갖은 자원을 동원해서 무리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저 연민을 느낄 뿐, 분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최근 한국 사회 곳곳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이 맥락에서 생각해 봄직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는 기본소득은 개인당 월 30만~50만원 수준으로, 노동 임금을 대체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복지사회가 보장해 주는 복지 최저선을 보완해 줄 정도는 된다. 사람들이 각자 원하는 좋은 일을 찾아서 더 탐색하고, 더 시도할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시도는 비슷한 위기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진행 중이다. 기업에 대한 개인의 의존도가 높다는 측면에서, 제조업 일자리들이 빠르게 무너진다는 측면에서도 한국과 가장 비슷한 미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대선 의제로까지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 좋은 예다.

사회학자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한국을 ’선망국’(先亡國)이라고 지칭했다. 발전 단계에서는 선진국들의 뒤를 쫓아갔지만, 위기를 겪는 데 있어서는 한참 앞서 가고 있다는 의미다. 선망국으로서 위기에 직접 부닥쳐서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면 인류를 위해 긍정적인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대혼란은 겉으로만 보면 사회 고위 인사의 자격에 대한 것이지만, 크게 보면 수십 년 된 사회의 구조가 바뀌기 직전의 혼란일 수도 있다.

이럴 때 정치인들에게, 사회 지도층에게 국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불안감에 굴복해서 자기 자식만 챙기는 게 아니라 모두가 더 나은 길을 찾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정부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세대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부응하게 된다면, 생각보다 빨리 희망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번 혼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 안에는 엄청난 역동성이 있기 때문이다.

LAB2050 황세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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