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공연과 게임 기술이 만난 미래형 극장 실험, RSC Dream
영국의 로얄 세익스피어 컴퍼니(이하 RSC)의 공연 ‘Dream’이 지난 3월 20일 막을 내렸다.
막을 내렸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50분(30분 공연/20분 Q&A) 간의 라이브 온라인 가상 공연이었다. 비대면 시대를 맞아 누구보다 극장과 공연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142년 전통의 세계적 극단의 이 시도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통적인 매체나 장르가 새로운 기술적 시도를 할 때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다.
왜 우리는 이 실험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왜라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의’를 다시 내려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공연’, ‘무대’란 무엇인가? ‘연극’은 또 무엇인가?
코로나 이후로 공연계에서 앞다투어 시도한 것은 오프라인 공연 장소에서의 실연 그 자체를 영상화한 것과 라이브 스트리밍 방식으로 송출을 시도한 것이었다. 즉, 온라인으로 접점을 만들고, 2차적 저작물을 만들어냈다. 단순히 디지털로 옮겨오는 작업은 회당 몇 백명 몇 천명이 최대인 공연을 몇 만명 이상이 보게 만드는 의미 있는 숫자들을 만들어 냈지만, 전통적 관객은 종종 외면했다. 편안하게 누워서 클로즈업 된 배우를 보는 환희도 잠깐, 고도로 집중되어 무대를 장악하던 배우들의 살아있는 카리스마와 숨죽여 보던 몰입의 순간이 주는 현장감을 그리워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무대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무엇이 다음의 무대가 될 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 중 일부 창작을 멈추지 않는 새로운 아티스트들은 앞다투어 도구와 매체로서의 디지털 실험을 하였고, 현장의 관객이 아닌, 라이브로 접속된 관객과 댓글 속에 존재하는 관객, 디지털 데이터로 남아 있는 관객을 향했다. 유튜브와 트위터로 공연 라이브를 하고 줌으로 워크샵을 열고, 게임 속에서 공연을 시도하고, 클럽하우스를 활용해 라이브를 하는 팀도 등장했다. 이 때 많은 난관에 부딪혔던 단체들과 예술가들의 시행 착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예술 실험이 되어 예술의 스펙트럼을 확장했을 지도 모른다. ‘무대’와 ‘공연’에 대한 정의와 질문이 다양한 해석과 토론의 장을 만들어 내고 있는 가운데, 또 하나의 실험이 추가 되었다. 기술의 최 끝단과 고전 중의 고전이 만났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대 전환기를 맞은 것은 비단 공연예술계만은 아니었지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홍수 속에서 차분히 시간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변환의 종착점에 있는 ‘기술’이 가리키는 ‘방향성’은 무엇인가. 이 달라진 환경에서의 ‘커뮤니케이션(대화)’는 어떻게 다른가. 문제의 해결은 ‘정의’를 새롭게 하는 것,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라 말하는 이 ‘기술 실험’을 들여다 보자.
모든 것이 가상으로 렌더링 되는 연극, 게임이 된 연극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은 숲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존재들의 힘에 인간이 감동받고 마법의 생명체가 인간을 배우는 변신극이다. 기술이 가장 최첨단으로 사용되었어도 셰익스피어의 상상력보다 덜 강력하다고 할 만큼 4대 희극 중 최고라 불리는 대표작이다.
이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 ‘DREAM’은 RSC 와 맨체스터 국제 페스티벌(Manchester International Festival), ‘트리허거(Treehugger)’와 ‘동물의 눈으로(In the Eyes of the Animal)와 같은 환경 소재를 예술적으로 승화한 VR 작품으로 알려진 마시멜로우 레이저 피스트(Marshmallow Laser Feast), 런던의 대표적인 관혁악단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Philharmonia Orchestra) 등이 함께 제작한 R&D 프로젝트다. 영국 정부의 아낌 없는 지원을 받은 지원작이자, 공연계가 게임엔진을 활용하여 새로운 시도를 하도록 장려하는 에픽 메가그랜트 지원작이기도 하다.
출연진은 센서가 부착된 라이크라(Lycra) 모션 캡처 수트를 입고 영국의 남부 포츠머스에 별도로 마련된 7m x 7m 스튜디오에서 라이브로 공연을 했다. 카메라가 무려 47대가 동원되었다. 영화, 게임, VR에 주로 활용되던 에픽게임즈의 언리얼 엔진을 통해 만들어진 숲 속을 극중 캐릭터가 달리거나 움직이면, 그 들의 모든 것이 숲 속의 요정이 장난치는 듯한 형태로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실시간 디지털로 전환되어 나타났다.
원작을 그대로 구성한 것이 아닌, 요정의 이야기로 초점을 맞추어 30분간의 극으로 축소된 ‘Dream’ 속에서 주인공 ‘퍽(Puck)’ 은 자갈과 돌로 구성된 디지털 아바타로 등장했다. 다른 요정들은 거미줄, 흙, 뿌리, 나뭇잎으로 등장해 더 없이 창의적이었다. 모바일과 웹을 통해 관람하려고 ‘접속’한 관객들은 ‘시각적 환기’를 통해 극의 매력을 극대화하여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무대 위의 배우가 몰입한 그 에너지와 표정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마치 영화 ‘아바타’에서 보던 환상의 세계가 재창조된 듯한 비주얼의 향연에 감탄하고 즐거워 할 수 있었다.
싱어송 라이터인 닉 케이브(Nick Cave)의 내레이션이 숲의 목소리를 맡았고, 이 목소리는 사전 녹음된 것이었다. 라이브 캡처와 게임 기술로 완성된 이 공연에서 스토리텔링은 사실상 가장 후순위였다. 낙엽으로 만들어진 날개 등 아트웍과 시각적 환상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뛰어나고 화려한 물리적 무대에서 느껴지던 스케일감을 느낄 수 없는 아쉬움이 존재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시도되지 못했지만, 배우가 HMD를 끼고 경험한 가상세계를 관객들도 체험할 수 있는 VR 버전이 있었다면, 함께 환상의 숲을 유영하며 압도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극장과 무대 예술이, 게임 엔진으로 렌더링된 이미지들을 만나 미학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기술이 숨어야 하는 새로운 시도, 경계의 목소리
이 공연이 촬영된 스튜디오엔 거대한 LED 스크린을 설치하여 공연하는 배우가 디지털 아바타로 어떻게 변형되는 지를 바로 볼 수 있게 하였다. 실제 스튜디오에서 라이브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공연의 시작과 중간, 스튜디오의 실시간 현장을 비추는 카메라로 교차되기도 하였다. 이는 영화와 드라마, 라이브 공연 등에 쓰이고 있는 버추얼 스튜디오(Virtual Studio) 혹은 XR스튜디오 와 유사한 구조였지만, 이들은 실제 배우가 배우의 얼굴로 등장하는 형태가 아닌 실시간 모션 캡처를 통해 다른 캐릭터로 치환되어 등장하면서 환상성을 더욱 부가하였다. 음악 역시 인터랙티브 음악 툴인 Gestrument 를 사용하여 사전 녹음된 오케스트라 트랙과 인터랙티브 음악을 만들어 더욱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하나, 필자는 이번에 미처 활용하지 못했다.
온라인에서도 극장의 로비처럼 대기 공간을 마련하고, 백스테이지 투어처럼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과 제작진을 만나는 Q&A 시간이 이어졌다. 웹사이트 역시 게임의 맵처럼 구성하고 사전에 참여방법과 캐스팅 등을 볼 수 있으며, 전세계에서 몇 명의 관객이 참여하는지 접속자 수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하면서, ‘장소의 공유’가 아닌 ‘시간의 공유’를 통해 극장이 주던 공동체적 경험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실시간 피드백을 열어놓은 창구는 없었다. 스트리밍 채널을 통해 익숙하게 보던 뜨거운 관객 반응을 통한 재미는 배제되면서 오히려 진지하게 관람을 유도한 듯 했다.
‘반딧불(Fireflies)’라는 독특한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은 바로 관객이었다. 공연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지만, Audience Plus Ticket 10파운드를 내게 되면 인터랙션이 가능했다. 극의 중간, 화면이 두 개로 나뉘어 지면서 인터랙션 창이 열린다. 관객을 참여시키기 위한 것의 일환으로 트랙패드나 손가락을 활용하면 반딧불을 움직여 조명을 바꿀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빛을 보면서 관객의 에너지를 배우도 느끼며 반응하여 연기하도록 설계한 것이었다. 무대와 관객 개인의 인터랙션 영역을 조명 제어 부분로 한정한 것은 보다 ‘몰입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한 이들에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여러 청중이 한꺼번에 동시에 상호작용하는 것은 어려웠기에 이 부분을 상상의 영역에 있게 둔 것도 다소 아쉽다.
배우의 예술인 연극에서 배우가 숨고 기술이 앞서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충분히 사전 제작될 수 있는 비주얼과 움직임의 표현도 실시간으로 배우의 기여를 통해 만들어내려고 했다는 점과, 사전 100번 이상의 테스트 과정을 통해 함께 만들어가면서 과정 속에서의 배우의 탐험을 이끌어낸 점은 고무적이다. 또한 라이브로 시도되면서 배우들의 즉흥적 연기를 열어주게 되었는데, 주인공이 된 배우 퍽은 HMD를 끼고 연기하면서, 숲 속의 세계를 직접 보면서 자유롭게 탐험하면서 즉흥성을 부여하였고, 우리는 엔진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퍽을 인카메라 방식으로 볼 수 있었다.
RSC는 관객을 대면할 수 없는 전염병의 시대를 맞아 멀리 원격으로 존재하는 ‘청중/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만큼 가깝지 않고 더 멀어진 온라인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큰 고민이었기에, 단순 영상화가 아닌 관객을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게임 속으로 직접 들어가기도 하고, 3차원 물리적 공간의 재현을 위해 가상세계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는 비대면이라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현실을 즉시하고 다음을 빠르게 모색한 결과다. 새로운 기술 결합을 모색하는 일을 하는 이의 관점에서 결과물을 보면서 과정의 어려움이 어떤 것이었을지 추측되고도 남았을 정도였지만, 처음 만난 관객은 과연 이 공연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남는다.
공연장에서 전달하던 ‘현장감’은 본래 3차원의 가상현실 무대로 구성되었다면 내가 그곳에 있다는 ‘실재감’ 혹은 ‘현존감’으로 치환되었겠지만, 신체적 체험이 사라진 체 온라인으로 전세계에서 동시에 접속하여 실시간으로 보고 즐기는 라이브니스(Liveness)가 강조된 느낌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관객들간의 상호작용은 배제되었다. 이미 포트나이트나 로블록스와 같은 게임 속에서 대중음악 공연이 열리는 시대가 되었다. 사라진 무대와 멀어진 관객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숙명이 아니었을까?
미래의 관객에게 다가가는 방법
전통의 예술단체가 새로운 기술을 포용하며 고전 중의 고전을 창의적으로 재탄생시킨 것은 어제 오늘 만의 일은 아니다. 새로운 시도는 늘 뜨거운 논쟁의 불씨를 지폈지만, 그 영향력은 계속 되었다. 2010년엔 ‘로미오와 줄리엣’을 ‘Such Tweet Sorrow’란 트위터를 통해 극을 전달하려 했을 때도 새로운 시도는 칭찬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13년엔 이미 구글과도 협력하여 ‘한여름 밤의 꿈’ 라이브 스트리밍을 시도한바 있었고 그 때도 RSC는 셰익스피어의 가장 사랑받는 연극이 인터넷을 통해 경험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 모색하는 시도라 말한 바 있다. 당시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3천만명에게 도달할 수 있었고.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창조하고 싶었던 RSC는 그때만 해도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결합하여 시도했었다.
2016년에도 ‘템페스트’라는 작품을 통해 라이브 공연을 캡처하여 게임엔진으로 제작한바 있다. 이 때는 인텔과 협력하여 폐이셜 캡처(Facial Capture)를 진행했으며, 13만 6천명의 관객에게 도달했고 전세계 124개국에서 관람했다고 RSC는 전하고 있다.
실제로 ‘Dream’ 공연 역시 회당 초반엔 5천~7천명이 관람하면서 3일만에 전세계에서 2만명이 넘는 관객이 보았고, 공연 후에 열린 Q&A 시간에서 25%는 처음 본 관객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주로 움직임이 많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는 연극을 대체하기 보다 무용극에 가깝다는 평이 있었고, 어떤 이는 인형극에 가깝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배우가 실제로 등장하는 것이 아닌 모션 캡처를 통해 가상화 되면서, 표정보다는 움직임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배우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무브먼트 디렉터가 프러덕션에서 중요하게 역할을 했다. 또한 여기에 드라마터그가 있어서 연극에서 탄생된 정체성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위해 극이 갖고 있는 DNA 만을 추출하여 매체 혹은 기술의 특성에 맞게 새롭게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세계관의 확장이자 디지털의 무대에서 새로운 관객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Dream’ 온라인 공연은 그들의 메이킹 영상에서도 계속되어 언급되는 ‘World(세계)’ 즉,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한 ‘세계’로 관객을 데려갔다. 다음 단계로는 그 세계 속에서 배우와 호흡하고, 다른 청중과 만나는 일이 남았다.
결국 이 모든 실험은 관객과 청중을 향한다. 종국엔 새로운 관객을 만나고 보다 많은 관객이 예술과 예술단체와 만날 수 있도록 장려하기 위한 것의 일환이다. 이들은 물리적인 극장과 무대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 이머징 기술을 수용하는 극장의 대담한 시도로서 가치를 갖는다.
늘 그렇듯, 이 프로젝트는 RSC의 실험 과정이 기록된 연구 보고서가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Dream’ 프로젝트 속에서 수많은 단체들이 협업의 과정을 통해 균형을 맞추어 간 레슨런(Lesson Learned)을 공유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기술과 인프라도 충분하고, 기술과 예술을 결합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으며, 정부의 지원도 충분한 환경이지만, 이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 있다.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며, 비어있는 부분을 연결하고 매개하면서, 서로의 잠재 가치를 배워 가는 개방적인 태도, 그리고 비난과 몰이해 속에서도 실험을 계속하는 지속성, 결과로 표현되는 숫자보다도 중요한 장기적 관점의 방향성. 이것이 새로운 무대와 공연을 위한 연구 프로젝트가 가져가야할 목표가 아닐까?
또한 3차원의 새로운 디지털 세계가 열리는 메타버스의 시대, 모두가 자신만의 변환된 디지털 아바타로 무대를 만드는 시대에도, 우리는 뛰어난 고전과 탁월한 배우가 필요하며, 가상에서의 경험은 현실로 ‘연결’되는 트리거로서 더욱 의미를 갖게 될 것이기에 ‘연결'을 위한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무대에 대한 잠재적 정의를 확장하고 더 많은 관객을 향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탐색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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