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띠의 2월 월요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월요일 아침, 빠띠 크루들은 한 주를 세미나와 함께 개운하게(?) 시작한다. 빠띠의 2월을 책임진 크루 안나, 쩨리, 보리의 월요세미나 내용을 소개해본다.

안나의 월요세미나: <민주주의는 여성에게 실패했는가> (드루드 달레룹 지음)

도서관의 수많은 책 중 왜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을까?

빠띠에 합류한 뒤로 민주주의를 내 말로 정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큰 과제 중 하나다. 그 과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 이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질문한다. ‘여성이 없는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일까?’

전 세계의 국회의원 중 여성은 1/4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분야에서 성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정치계만큼 성평등이 더디게 이뤄지는 곳도 없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처음부터 여성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 여성이 참여할 권리를 갖기도 전에 많은 제도가 만들어졌다.
  • 남성이 이미 정치계를 장악했고 이를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 정당은 턱없이 적은 수의 여성 후보를 지명한다.

정치 기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할당제를 실행한다. 하지만 여성 할당제가 민주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반대 주장도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출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남성 정치인은 선거 과정에서 여러 이익을 누려도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성별 할당제가 여성들의 부족한 선거 자금이나 선거 운동 중 당하는 위협까지 해결해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절하게 설계된 성별 할당제는 그 채택 뒤에 어떤 동기들이 숨어 있든 ‘인맥’ 정치를 방지하는 효과적인 평등 대책이다.” — 본문 중에서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가의 요직이나 세계 정치계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있다. 성평등이라는 사안을 정치 안건으로 올리고, 성평등 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여성 운동으로 새로운 사고방식, 규범, 관행을 동원해 사회 담론을 변화시키고 전파해 정치적 결정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기존의 정치 기관들 중 위기에 처한 곳에서 여성을 더 많이 기용하는 문제를 두고 여성 운동의 일각에서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중략) 그러나 자유 시장이 여성을 차별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가부장적 관행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여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싸우고 여성의 권리와 성평등을 보장해줄 포용적 민주주의와 투명하고 책임 있는 공적 기관들이 필요하다.” — 본문 중에서

빠띠에 들어와서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아마 ‘제가 잘 몰라서요.’ 일 것이다. 민주주의, 특히 젠더의 시각에서 본 민주주의는 정말 내가 잘 모르는 분야였다. 이 책을 읽었다고 이제 다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알고 싶은 것, 읽고 싶어진 책이 더 많아졌다. 그런 의미에서 월요 세미나 시간은 부담되지만 일주일을 시작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민주주의는 여성에게 실패했는가’를 더 읽어보고 싶다면?

쩨리의 월요세미나: <누가 나를 쓸모없게 하는가> (이반 일리치 지음)

그렇다. 나는 이 손바닥 만한 그리고 126p밖에 되지 않는 이 책을 무려 36일에 걸쳐 읽었다. 이 책을 보다 가슴 한 켠에 울컥하고 올라오는 시뻘건 불덩어리를 잠재우느라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이다.

정말 누가 나를 쓸모없게 하는지, 시장의 소모품이 되버린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있는 실업이란 무엇인지 그 것을 알고싶어 이 책을 보고 공유하게 되었다. 이 책은 상품, 전문가, 자본주의의 환상들이 인간을 쓸모없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아래는 그 주제를 설명할 핵심 문제제기이다.

  1. 시장과 상품을 의존하게 된 현 시대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립성을 잃어가는가
  2. 인간의 필요를 상품으로 만드는 전문가들은 어떻게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가
  3. 인간의 자율적 행동을 파악하는 기술고도화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상품이 되는가

그리고 쓸모있는 실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 차별에 놓인 소수의 시민들이 행동을 통해 조직되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교통수단으로 두 다리가 쓸모없게 되고, 정신없는 일과에 쫓기다가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호르몬요법에 중독되고, 시끄러운 미디어에 침묵을 강요당하고, 불량식품으로 아파하던 대중 속에서 몇몇이 행동을 조직하며 소수 집단을 이룬다. 그들은 이제 막 성장하여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시대를 끝장낼 각오가 되어 있다.” — 본문 중에서

전문가들이 필요를 만들어 인간을 지배할 때, 소수 집단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나는 이 사회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들지라도 그 사회에 문제를 제기할 소수의 집단들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빠띠쿱이 활동하는 가치와 맞물려 있다. 쓸모있는 실업은 인간을 쓸모로 논하는 사회에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행동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므로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가 교묘하게 지배하는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는 시민 주도의 급진적 기술만이, 위계질서가 아니라 공동체 기반으로 살아갈 능력을 발휘하는 자유의 길을 열어 젖힐 것이다. 시민들 사이에서 회의가 싹트기 시작할 때 사회의 재건도 시작된다.” — 본문 중에서

보리의 월요세미나: 청와대 국민청원 분석 보고서

빠띠 크루들이 빠띠에 오게 된 경로는 참 다양하다. 나(보리)의 경우에는 대학 전공수업 팀프로젝트를 하다가 빠띠를 인터뷰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당시 프로젝트의 주제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분석하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국민청원을 개선하기 위해 참고할만한 사례를 찾다가 빠띠를 알게 되었다. 빠띠에 들어온 후 다른 크루들이 나와 빠띠의 연을 맺어준 이 팀프로젝트의 내용을 궁금해해서 월요세미나 시간에 소개했다.

팀프로젝트에서 던졌던 질문: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숙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숙의 민주주의의 개념을 학술적으로 정의해보고, 국민청원의 주요 청원 내용과 답변에 대해 정량적으로 분석해보았다.

숙의 민주주의에는 몇 가지 조건이 존재한다. 먼저 시민들이 토론을 하기 전에 주제에 대해 정보를 충분히 습득해야 한다. 그리고 토론을 할 때 다양한 관점의 주장을 접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조건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런 기준을 바탕으로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청원들을 뜯어보니 특정 일화, 사건을 중심으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약 50%의 청원이 주장에 대한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약 30%의 청원만이 뉴스 기사를 근거 자료를 제시하고 있었다. 청원 답변 영상의 조회수는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서명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보다 현저히 작았다.

국민청원의 설계 목적 자체가 누구나 쉽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에, 숙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국민청원을 분석하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 ‘참여’가 강조되다보니 참여를 넘어선 수준의 토론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구조이다. 청원에 찬성하는 사람만이 의견 댓글을 달 수 있다. 공론장이라기보다는 서명 운동과 비슷한 구조이다. 그러나, 참여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민청원은 설계 목적에 충실한 플랫폼일 수도 있다. 실제로 팀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에도 이런 피드백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팀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당시 우리는 이 지점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국민청원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 깊고 다양한 차원의 토론은 어디에서 해야 할까?

빠띠와 인터뷰를 하고, ‘민주주의 서울’, ‘포데모스’, ‘국회톡톡’ 등 다양한 디지털 민주주의 사례를 들여다보며, 우리 팀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조직과 기관 안에서 크고 작은 토론을 끊임없이 해야한다는 것.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는 하나의 플랫폼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공론장이 생겨나고 이 공론장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해야 한다는 것.

이렇게 팀프로젝트를 마치고 봤더니, 이상하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 빠띠의 미션과 똑같았다. 어라, 왜 똑같지? 그렇게 생각하며 신기해하는 와중에 이미 빠띠에 들어와있었다. 하하.

글. 안나, 성예슬(쩨리), 보리B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