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Yoon, Kyho
Reading, Thinking & Sharing Bookers
83 min readAug 31, 2014

2014 독서목록 93/149 (2014.8.31)

[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 강신주/민음사

난 감정을 다루는 데 매우 서툴렀다. 특히 분노감 조절이 잘 안돼서 가끔 주변사람들하고 마찰을 빚곤 했다. 그 내재된 분노감은 평소에는 상자속에 잘 숨겨져 있다가, 누군가 방아쇠를 당기면 어김없이 상자를 박차고 나와서 나를 흔들어댔다. 과도하게 화를 내는 나를 나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내가 적당하게 감정을 드러냈다고 동조해 줄 사람만을 찾았고, 나에게 문제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남들에게 나를 설득시키려고만 했다. 특히나 그 녀석은 술을 부어놓으면 평소보다 10배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내가 술을 끊으려고 했던 것도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녀석, 분노감 때문이었다. 기분이 안좋을 때 취하면 나오는 술버릇은 더이상 나둔다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1년간의 금주로, 일단 술에 취하는 과정은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는 술을 마셔도 녀석을 가둘수는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책을 많이 보게 되면서, 특히 심리학이나 행동학 같은 책들은 내 안에 있는 감정이란 놈들을 객관적인 실체로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면에서 최근의 독서를 통해, 이제는 어지간한 감정들이 나를 휘두르게 만들지는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누가 방아쇠를 당겨도, 상자속에 가둬놓은 녀석들이 튀어나오지 않게 상자에 자물쇠를 달게 된 것은 전적으로 독서를 통해 나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게 되면서이다.

이렇게 감정에 관한 책들은 많은 도움이 되는 인생의 지침서이다. 가벼운 자기계발서에서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문구는 삶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의 지침은 누가 일러준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지침은 내 삶의 흔적들을 다시 밟아보고 분해해보면서 나오는 성찰과 내 삶의 미래를 불안과 두려움, 희망과 환희가 펼쳐질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읽기 전부터 기대감이 많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유명 철학자니 나름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감정들을 깊이있게 다뤄줄 것으로 생각했고, 인간의 주요 48가지 감정들을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라 서술해 주는 방법등이 아주 신선한 것 같았다. 아, 하지만 이 책은 너무 대중적이다. 인간의 감정에 깊이있게 들어가지 못하고, 대중들이 듣고싶어 하는 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진 느낌이 많이 든다. 현실적인 감정보다는 막장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대중들이 열광하는, 과장된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진 느낌이랄까? 이 책은 감정을 통해 삶을 성찰하기에는 약간 부족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 부족함마저 읽어볼 필요는 가진 책이다.

한줄요약 : “감정은 삶의 정수, 그중의 왕은 사랑”

★★★★☆

감정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신적이다. 왜냐하면 감정은 평범한 삶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들 수 있는 힘을 지닌 데다, 한 개인이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신적’일 수밖에. 그래서일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모든 인간의 감정들에 그것을 주관하는 신을 배속했던 것이다. 불만의 감정과 관련된 모모스(Momus), 불화의 감정과 관련된 에리스(Eris), 그리고 사랑과 열정의 감정과 관련된 에로스(Eros)가 그 대표적인 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빠져들게 되는 감정을 모두 신의 장난으로 돌렸다. 그들은 우리보다 감정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던 셈이다. 감정은 나의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신탁과도 같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감정을 신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누군가를 만나서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테니까 말이다. 반대로 만남을 통해 슬픔을 느낀다면, 내가 떠나든가 아니면 상대방이 나를 떠나는 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소망하게 될 것이다. p.22

공감이 가는 것 같지만, 이렇게 감정을 ‘신적’이라고 인정한다면 우선 ‘신’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철학자들중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만약에 신이 없다고 전제를 한다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아예 없어져버리는 오류가 생긴다. 작가는 너무 가볍게 접근하는 것 아닐까? 철학에서 논리의 오류는 치명적인데…

비루함(abjectio)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자신을 비하하는 감정보다 우리 삶에 더 치명적인 것도 없다. 스스로 비하하니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은 강한 자존감 없이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루한 삶’은 결코 살 만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비루함의 감정, 혹은 그런 정조를 강하게 띠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는 대부분 유년 시절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가 비루함을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슬픔’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칭찬보다는 험담을 일삼았다면,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부모를 만났다면 충분히 칭찬받고도 남을 일을 했는데도 자신의 부모는 매정하게 그것을 폄하하곤 했다면 말이다. “공부는 잘해서 뭐하니, 인간이 되어야지.” “너는 엄마를 닮아서 구제불능이야. 피가 어디 가겠니.” 이런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들었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 대해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잘해도 비난을 받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슬픔의 정조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유년 시절에 만들어진 슬픔이 하나의 습관처럼 내면화될 때, 우리는 자신을 항상 비하하는 감정, 즉 비루함에 젖어들게 된다. 습관화된 슬픔, 혹은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슬픔, 그것이 비루함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그만큼 비루함은 벗어던지기 힘든 감정이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애정과 칭찬이 있다면, 비루함도 조금씩 사라질 수는 있다. 자신을 쉽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 오랜 시절 만들어진 습관화된 슬픔을 그만큼 시간을 들여서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봄 햇살이 겨울 내내 쌓였던 눈을 녹이는 것처럼 그렇게 비루함이라는 고질적인 슬픔을 천천히 치유핼 줄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만이 비루함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법이니까. p.36

이렇게 인문학은 다 만나는구나. 철학과 문학과 정신분석이 만나면 결국 문제도 사람이 되고 해결책도 사람이 되는구나. 결국 인문학은 사람과 관련된 학문인 것이구나. 사랑을 대상이 사람인 것이 아니어도 비루함이 없어질 수 있을까?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우리는 평생 내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타자는 너무나 쉽게 내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간혹 이렇게 말할 것이다. “머리에 뭐가 묻었네요. 이리 와서 돌아봐요. 제가 털어 줄게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상의가 바지에서 빠져나와 있으면 나는 어김 없이 그에게 그 사실을 일러 준다. 이건 뒷모습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면을 타자는 마치 거울처럼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사실 거울보다 수백 배나 더 좋은 요술 거울이 바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거울이 현재의 시작적인 모습만 비추어 준다면, 타인은 과거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도 보여 줄 수 있고, 심지어 나의 내면마저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던 장점을 보여 준다면, 나는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대로 나의 단점을 보여 준다면, 나는 우울해질 것이다.그래서일까, 우리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으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경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그래서 애인은 우리에게 다른 타인이 결코 줄 수 없는 자긍심을 되찾아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의 모든 면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좋은 친구 혹은 좋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말이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유일한 치료약은 애인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p.46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긍심이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생이 항상 불타오르는 사랑만을 하면서 살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 정서에 있는 정이야 말로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자긍심을 높이는 방법이 아닐까?

경탄(admiratio)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 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항상 떠날 준비를 하라! 상대방에 대해 항상 자유로워라! 이것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해지거나 심드렁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확실한 방법도 없다. 떠날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가 있다. 이런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자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 때에만 상대방도 우리를 주인으로 대우할 것이다.모든 경우에서처럼 주인은 관심을 받고, 노예는 무관심에 방치되는 법이니까. “당신이 없다면 나는 살 수가 없어요!” 이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레토릭이지, 결코 사실을 묘사하는 말이어서는 안 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상대방의 뜻에 기꺼이 따르려고 하는 노예의 제스처는 글자 그대로 상대방도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제스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은 자신에 대한 나의 헌신이 나의 자유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나는 상대방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또 상대방이 그런 사실을 잊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상대방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어떻게 대우해도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기쁨을 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미워해도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것이고, 밀쳐내도 내게 안길 사람이라면 말이다.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헌신하는 것으로 사랑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 뿐이다. 내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한다고 상대방이 생각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의 내면을 섬세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접을 것이고, 그만큼 나에 대한 사랑도 식을 테니까 말이다. p.56

허나 이미 무리를 이루고 가정을 이룬 이가 자기만의 경탄을 위해 새로운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지도 않을까? 무리를 이루고 가정을 이룬다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고, 특히 그로 인해 생겨난 자녀들이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할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음~

경쟁심(aemulatio)이란 타인이 어떤 사물에 대해 욕망을 가진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내면에 생기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보통 우정은 동성끼리, 그리고 사랑은 이성끼리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정과 사랑에 대한 피상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까?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정과 사랑은 모두 어떤 타인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자신이 과거보다 더 완전해졌다는 뿌듯함이 드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기쁨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헤어져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발생하는지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구분된다. 슬픔이 너무나 크다면, 아무리 우정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랑이다. 반면 슬픔이 생각보다 작다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관계라 해도 그것은 우정에 불과한 것이다.결국 우정과 사랑은 질적인 차이가 있는 감정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 혹은 정도상의 차이만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타자가 무어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일 수도, 동성일 수도, 개나 고양이일 수도, 혹은 슈베르트의 음악일 수도 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경쟁심은 반드시 개입되기 마련이다. 우정이나 사랑의 감정에 빠지면 우리는 상대방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는 과정을 꼭 겪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점검하면 좋을 것 같다. 싫어하지 않는 어떤 사람과 묘한 경쟁 관계에 들어갈 때, 여러분들은 우정, 혹은 심하면 사랑의 관계에 들어서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서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단서가 중요하다. 하긴 미워하는 사람과 경쟁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p.66

사실 감정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성되는 거지? 우정과 사랑이 같은 종류의 감정일 수 있다는 생각은 참신하다. 하지만 경쟁으로 비유되는 부분은 조금 어색한데?

야심(ambitio)이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정서는 거의 정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야심에 동시에 묶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사람들도 명예욕에 지배된다. 특히 철학자들까지도 명예를 경멸해야 한다고 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서 넣는다.”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야심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특정 다수들로부터 시기와 관심, 그리고 찬양과 찬탄을 받으려고 한다. 나를 찬양하는 사람이 누군이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찬양하기만 하면, 우리는 쓰레기와 같은 사람도 보석으로 둔갑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학창 시절을 한번 돌아보자. 다음과 같은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첫 강의를 듣자마자 우리는 직관적으로 교수의 강의가 보잘것없다는 것, 심지어는 강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리포트를 제출하고 중간고사를 보았는데 교수가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교수가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제대로 인정해 준 사람이 이만큼 훌륭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심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야심이 강한 사람은 너무나 취약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칭찬해 주면 사족을 못 쓰는 아기와도 같다. 그러니까 강해 보여도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고 하고, 당연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자각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전쟁이라고 할 때, 이렇게 ‘지피지기(知彼知己)’를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삶이나마 제대로 보존할 수 있겠는가. 직급이 높아질수록 우리의 야심은 더 커져만 간다. 그러면 진짜 위기가 다가오는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야심이 커질수록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감정들이 모조리 고사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야심은 아카시아나무와도 같다. 너무나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깊어서 주변의 다른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아카시아나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카시아 꽃향기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야심은, 적절히 통제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속에 다른 수많은 감정들도 자기 곁을 따라 제대로 자라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p.76

칭찬이 핵심이다. 면전에서 칭찬하는 것 말고, “너를 칭찬하더라.”고 하는 형태가 아주 좋겠지. 나는 그런 방식에 넘어가지 않도록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고, 그런데 그게 될까?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사랑에 빠지면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주인공이 된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조연으로 물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종교와 정치적 신념 같은 관념들일 수도 있다. 주인공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조연일 때 우리의 삶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자신의 꿈과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조연의 삶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표어는 사랑에도 그대로 관철된다. “주인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사랑의 위기나 비극은 모두 사랑의 정의로부터 설명된다. 우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 동등한 주인공이 아닐 때, 사랑은 비틀거리게 된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주인공으로 만들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여자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계속 노력하는데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 순간 사랑은 위태로워진다. 또 다른 위기는 두 사람 이외에 제3의 것들이 조연의 자리가 아닌 주연의 자리로 떠오를 때 발생한다. 시부모가 무대를 휘두른다든가, 남녀 중 어느 한 사람의 종교나 정치적 신념이 중심이 되는 순간,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조연으로 강등되고 동시에 사랑의 기쁨도 조금씩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위기를 지혜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고민해야 할 유일한 문제일 것이다. p.86

어떻게 인생을 매번 주인공으로 살 수 있겠는가? 젊은 시절 몇 번정도 주인공으로 살아본 경험을 가지고, 그 인생이 주연이든 조연이든 나의 인생을 묵묵히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이 양반 사랑타령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담함(audacia)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대담한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용기라는 것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너는 정말 용기가 있어.” 이런 표현때문에 누군가의 내면에 용기라는 것이 마치 실체처럼 있다는 착각이 벌어진다. 번지점프대에 올라갔다고 하자. 쉽게 점프대 난간에서 한 걸음 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이런 번지점프대와 같은 위기 상황, 그러니까 그 점프대 제일 끝에 서 있을 때, 결단의 순간이 찾아온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창공에 몸을 던질 수도 있고, 뒤로 한 걸음 빼서 안전함을 도모할 수도 있다. 대담하게 몸을 창공에 던지는 경우 우리는 ‘용기’나 ‘대담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러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때 ‘비겁’이나 ‘우유부단함’을 가진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용기가 있어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용기일 뿐이고, 비겁해서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물러난 것 자체가 바로 비겁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위기 상황에서 그는 번지점프를 하는 것처럼 몸을 던졌다면, 지금까지 그는 용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위기 상황,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과감하지 못하다면, 과거의 용기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용기와 비겁은 불변하는 성격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비겁하거나 원래 대담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을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번지점프대에 서는 것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앞으로 발을 내딛을지, 뒤로 물러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발을 내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뿐이다. p.96

하지만 용기있는 행위는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경험되어지는 것이 나의 자아에 인식되서 두려움은 줄어들 수 있고, 훈련으로 담대함이 키워질 수 있지 않은가?

탐욕(avaritia)이란 부에 대한 무젤저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돈에 대한 갈망은 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체제 아닌가. 이제 돈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수단을 동시에 절대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미 돈은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승격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돈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돌아보면 우리가 대학교와 전공을 정하는 것도, 취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한 것 아닌가. 돈만 있으면 여행도, 물건도, 행복도, 사랑도, 심지어는 애인마저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기에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친구가, 애인이 내게 친절한 건 내게 돈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나처럼 돈을 신처럼 숭배한다면 말이다. 결국 돈이 없다면 친구든 애인이든 모두 나의 곁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모으고 또 모은다. 아이러니하게도 관심과 애정을 받기 위해 돈을 벌려고 했지만, 돈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우리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직접적인 관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치 신에게 헌신하느라 가족과 이웃은 돌아보지도 않는 어느 우매한 아주머니처럼 말이다. 이런 딜레마,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 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삭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람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p.106

돈이 수단이 되는 삶을 살면 너무나 좋긴 하지만 마음속의 불안감과 탐욕을 조절할 수 있는지가 가장 큰 문제다. 과연 그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겠는가?

반감(aversio)이란 우연적으로 슬픔의 원인인 어떤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정말 헤어져야 하는데 남편과 이혼하지 못하는 여인이 있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폭력적인 남편과 함께 사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지만, 집을 떠나서는 먹고살 길이 막막한 것이다. 그렇게 체념해도 자신을 벌레처럼 보는 남편의 싸늘한 눈빛을 보면, 그가 자신을 당장이라도 해칠 것 같은 공포감에 그녀는 사로잡히게 된다. 남편이 밉다. 그렇지만 또 그런 남편으로부터 떠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도 밉다. 더 심각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아들까지 점점 미워하게 된다는 점이다. 아들이 성장할수록 아버지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특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하다 그릇이라고 깨면, 아들은 마치 남편처럼 혀를 끌끌 차며 자신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니 어떻게 그녀가 아들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 반감을 갖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어머니로서 그녀의 자괴감은 또 얼마나 클까. 반감이라는 감정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자신이 싫어했던 사람의 모습을 새로 만난 다른 사람에게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이 경우 우리는 그 새로 만난 사람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래도 반감이 생기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안타까운 것은, 첫 만남에서 반감을 느꼈을지라도 그가 사실 나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내면을 갖춘 사람일 수도 있고, 심지어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일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과거 자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사람을 연상시키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반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과거 망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모두 기대한다면, 비록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망령을 쫗아내야만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이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p.116

나에게 엄청난 상처를 준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면 아마도 큰 일이 벌어지거나, 그 자리를 피하겠지? 용서라는 감정이 생길수 있을까?

박애(benevolentia)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우리 사회에서 사랑은 커플이나 가족 내부의 문제로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동안 사랑은 사회적 차원의 문제에서 다루어져 왔다.예수의 사랑도 그렇고, 싯다르타의 자비도 그렇고, 공자의 인(仁)도 마찬가지다. 사유재산 제도가 관철되면서 사랑도 사적인 영역으로, 결혼 제도와 일정 정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어 있든 공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든 간에, 사랑의 원리는 소유의 원리와 달리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겨율의 찬바람에 애인이 떨고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아무리 같은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 같은 도시나 같은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공동체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커플 사이에도 무소유의 원칙, 사랑의 원리가 희석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합리적인 것처럼 쿨하게 더치페이를 외치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바닥에는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강한 소유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커플이나 부부 사이에도 사랑의 원리가 훼손되어 있는데, 지역이나 국가 공동체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이런 시대에 전체 인류로 확장되는 사랑의 원리, 즉 박애의 정신이 어떻게 제대로 평가될 수 있겠는가. 연애에서부터라도 차근차근 사랑 연습을 하자.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는 것,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시대니까. p.126

공동체의 범위를 내가 기꺼이 희생을 감내할 수준의 정도로 내가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겠구나. 만약 내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내가 소속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몸은 소속되어 있으나 마음으로는 아니니까

연민(commiseratio)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사랑과 우정만큼 우리에게 소망 가득한 감정이 또 있을까? 아무도 나의 내면과 감정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데, 특정한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나와 함께 있으려고 한다.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때, 사랑니 때문에 격심한 치통을 겪을 때, 아니면 생리통을 겪을 때도 있다. 아니면 실연의 고통에 빠져 있을 때, 미래가 불안할 때, 부모님의 죽음에 홀로 눈물을 떨구고 있을 때도 있다. 이럴 때 누군가 나의 고통을 함께하고 내게 웃음을 주려고 하고 내 눈물을 닦아 주려고 한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가. 물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의 고통과 나의 눈물은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인과 친구가 고마운 이유는 그들이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사랑이나 우정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애인과 친구의 가치를 알려면, 사실 내가 고통에 빠져 있을 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내가 가장 행복할 때에 진짜 애인인지 가짜 애인인지, 혹은 진짜 친구와 가짜 친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당신의 행복을 함께 행복해하고 당신의 불행을 함께 불행해하는 사람이어야만이 여러분은 자신에게 애인이나 친구가 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당신의 불행을 위로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당신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에 뿌듯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혼했거나 실직했다고 치자.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은 친구들 혹은 직장에 불평불만이 많은 친구들이 몰려들어 당신을 위로할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그나마 자신에게는 가정과 직장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게 인간이다. p.136

연민의 감정을 누군가가 나에게 가진 적이 있었던가? 내가 상대방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나보다 수준이 낮은 친구라고 생각한 적은 많다. 그래서 그 수준낮은 친구가 나와 동급이라고 주장하는 순간에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난다. 아니면 부자인 친구가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곧 너와 비슷하게 될거라고 했을때 그의 얼굴에서 당혹감을 본 적은 있다. 이것이 연민인가?

회한(conscientioe)이란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엎질러서는 안 되는 물동이를 엎질렀다는 슬픈 느낌, 이것만큼 회한의 감정에 대한 좋은 비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우리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만 회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순간의 결정이 이다지도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며 삶을 슬픔에 물들게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여기서 회한의 감정이 가진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때는 내가 너무 미성숙했다.” “그때는 내가 너무나 나약해서 용기가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과 비겁의 경험을 배경으로 회한은 꽃피는 법이다. 역설적으로, 회한에 빠진 사람은 이제 자신이 무기력과 비겁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한다. 과거에는 무기력하고 비겁해서 물동이를 계속 들지 못하고 물을 엎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성숙하고 강해져서 물동이를 계속 들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비슷한 선택의 순가이 다시 찾아왔을 때, 이번에는 진짜로 물을 엎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정말로 성숙하고 강했졌다면 결코 회한의 감정이 그를 유령처럼 따라다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지사는 하나의 전설처럼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로 기억될 테니까 말이다. 결국 회한에 빠진 사람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고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회한이라는 슬픈 감정을 떨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중에 회한이 없도록 지금 과감하게 선택하고 당당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10년 뒤에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의 무기력과 비겁에 맞서 싸운다면, 어느 사이엔가 과거의 회한은 밝은 태양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p.146

후회하지 않을 자신감은 지금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좋은 말이다.

당황(consternatio)라는 감정은 인간을 무감각하게(stupefactum) 만들거나 동요하게(fluctuantem) 만들어 악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려움이라고 정의된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단순히 후배나 선배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망이 머리를 들 때가 있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결혼했지만, 허니문에서 그와 섹스를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끔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혹은 클럽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폄하했던 내가 부득이하게 클럽에 들어갔는데 음악과 조명에 몸을 맡기는 낯선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처럼 전혀 예상치 않았던 욕망을 내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한마디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당황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당황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당황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자기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면의 욕망과 맨얼굴의 욕망이 우리 내면에서 격력하게 충돌한다면, 당황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니 당황에 빠질 때 걱정할 건 없다. 무조건 맨얼굴의 욕망, 즉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경이롭게 생각하는 욕망이 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여린 사람들은 맨얼굴의 욕망을 거부할 수도 있다.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기 위해 후배나 선배에게 오히려 쌀쌀맞게 굴거나 그들을 보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다. 남편과의 섹스를 꺼리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신 책로 그의 섹스에 응할 수도 있다. 아니면 춤을 추려는 욕망을 부정하기 위해 뒤풀이 장소에는 가급적 가지 않거나 친구들과의 늦은 만남을 피할 수도 있다. 뭐,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에게 저항해 보라. 맨얼굴의 욕망을 부정하고 가면의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낯빛은 피폐해지고 삶은 무기력해질 테니까. p.158

나는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을 추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이 생겨나는 것을 막기는 어렵겠지만, 그 생겨난 감정이 돌발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소멸하게끔 만들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의지로 가능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수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멸(contemptus)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누군가를 경멸하는 불행한 사람이다. 물론 더 불행한 사람은 경멸당하는 사람일 테지만.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자가 어떻게 남자를 쉽게 포기하겠는가.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이 느낀 기쁨을 포기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바로 여기에 사랑의 비극이 있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 기쁨을 느끼지만,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슬픔을 느낀다.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인 셈이다. 그래서 여자는 결단을 해야만 한다. 그녀는 남자를 떠나 슬픔을 혼자 감당할 수도 있다. 아니면 남자를 억지로라도 붙잡아서 둘 다 슬픔에 빠뜨릴 수도 있다. 억지로 붙잡힌 남자는 슬픔에 빠져들 것이고, 그의 슬픔은 여자를 또 슬프게 만들 테니까 말이다. 불행히도 여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억지로라도 남자를 곁에 두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남자가 슬픔에 빠질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남자를 행복하게 해 주면 그의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너무 진부한 방법이지만 여자는 남자를 호텔로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여자는 남자가 호텔에 함께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치자. 그곳에서 여자는 정성을 다해 남자의 몸을 그리고 그의 마음을 애무한다. 그렇지만 남자는 마치 시체처럼 반응이 없다. 심지어 그는 지금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옷 한 조각 걸치지 않는 자신에게, 그렇게 애정을 담아 애무하고 있는 자신에게 무감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ㅏ. 지금 남자는 할 수 있는 한 여자를 경멸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경멸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체 옆에 있는 느낌을 얻는 경험은, 이제 알겠는가? 경멸당하지 않으려면 내게서 슬픔을 느끼는 사람을 쿨하게 보내 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p.168

세련되게 경멸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경멸을 느끼지만 뭐라 주장할 건덕지를 주지 않도록, 꼼짝달싹 못하도록.

잔혹함(crudelitas)이나 잔인함(soevitia)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엽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몇몇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인하게 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신적 문제도 없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인해지는, 분명 기이하지만 동시에 흔한 현상이 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을 안겨 주고자 하는 법인데, 무슨 이유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인해지는 걸까? “잔인함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조금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잔인함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 한때 서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라고 말이다. 한때 사랑했던 남녀가 있다. 그런데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한 사람은 여전히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두 사람 중 왜 한 사람만이 사랑이 식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사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까. 한때 사랑했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우리에게 상대방의 사랑은 떨치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지금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배신자는 그가 아니라 바로 나인 셈이다. 배신의 피를 혼자만 묻히고 있는 것이 싫어서일까. 나는 상대방도 사랑을 배신하는 피를 흘리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바로 잔인함이란 감정의 서글픈 실체다. 내가 지금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까지 나는 상대방의 가슴에 잔인한 행동과 잔혹한 말을 비수로 던져 피를 흐르게 할 참이다. 슬프게도 이런 식으로 한때 두 사람을 천상에서 살게 했던 사랑은 피를 흘리며 무참히 살해된다. p.178

사람은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잔인함의 어느날 갑자기 실체없이 나타난다. 나에게도 이런 잔인함이 있다.

욕망(cupiditas)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다. (……) 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충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직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인간에게는 원숭이와 같은 속성이 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주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마 가장 결정적인 타자일 것이다. 그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들이 명문대 입학을 원하면, 나도 명문대 입학을 원하다. 그들이 단정한 외모를 원하면, 나도 기꺼이 단정한 외모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헛갈린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나의 고유한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인지, 이런 고뇌의 순간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인가 욕망하는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해 보아야만 한다. 실현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나의 것이었는지 타인의 것이었는지 사후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법대에 간 것이 자신의 욕망이라면, 입학하자마자 우리에게는 “이제 시작이다. 멋지게 살아가야지.”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반면 그것이 타인의 욕망이었다면,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이제 완성했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출발의 설렘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나만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완성의 허무함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불행히도 타인의 욕망을 반복했던 것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어떤 남자를 욕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와 고대하던 첫날밤을 지낸 뒤, 우리는 바로 알게 된다. 앞으로 이 남자와 보낼 날이 희망 속에 떠오른다면, 그 남자에 대한 욕망은 나의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이제 이 남자랑 뭐하지?”라는 허무한 느낌이 든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가 만들어 낸 남자를 욕망했다는 사실에 직면한 것이다. 작가의 욕망을 욕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절망하지는 말자. 이런 식의 시행착오를 통해 점점 더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다른 방법은 없다! p.188

나도 타인의 욕망을 욕망했구나. 그렇다면 타인이 욕망하도록 욕망을 생산해내는 주체들이 우리 사회구조 안에서는 승자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욕망을 제거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인가?

동경(desiderium)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는 충동이다. (……)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학창시절을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간혹 동창회라도 있으면 설레는 마음으로 옛 친구들을 만나려고 한다. 그렇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동창회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아 변했다는 사실, 혹은 과거의 아름답던 우정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씁쓸한 현실을 확인하고 약가느이 취기로 술집을 나서는 것이 전부일 텐데. ‘한때의 전성기’ 혹은 ‘가장 절정에 있었던 순간’을 꿈꾸는 것이 동경이다. 그렇지만 동경의 이면에는 이미 자신이 전성기를 지났고 절정에서 내려와 있다는 씁쓰름한 자각이 갈려 있지 않은가. 너무나 나이가 들어 이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때 동경은 마지막 삶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카페나 술집에 들릴 힘이 있을 때, 충분히 집을 벗어나 어디론가 갈 수 있을 때, 동경은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한마디로 몸을 움직이는 데 별다른 불편이 없는 사람이 과거를 동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삶과 직면할 때에만 우리는 새로운 삶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 과거 애인을 잊지 못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새로운 절정을 향유할 수 있겠는가. 꽃은 한 번만 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꽃나무는 매년 기적처럼 새로운 꽃을, 작년과 유사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신선한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작년에 피었던 꽃만 동경하고 있는라 올해 필 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아직 움직이는 데 여력이 있다면, 과거에 피웠던 꽃망울에 대한 동경일랑은 접고, 지금 현재를 살아내야만 한다. 강렬한 햇빛도 있을 것이고, 뿌리를 뽑을 것 같은 비바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당당히 맞설 때에만, 삶의 절정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p.198

설마 나의 절정이 지나온 것은 아니겠지?

멸시(despectus)란 미움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모든 감정은 나와 타자의 마주침에서 발생한다. 돌과 마주치지 않는 한 잔잔한 호수가 일체의 동요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특정 감정은 전적으로 나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오로지 내가 만난 타자 때문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특정 감정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외부 타자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야간 산행을 할 때, 자신의 손에 랜턴을 쥐고 있는 걸 망각하고는 신기하게도 바깥이 환히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드디어 감정의 파문들이 본격적으로 호수 전체를 누비기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원인을 내가 만난 타인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에게 돌리니, 과대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다. 반대로 미움의 감정이 발생할 때도 우리는 전적으로 상대방에게서만 그 원일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음을 가져다 준 사람이라고 저주받게 될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멸시라는 감정이 시작된다. 멸시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한다.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상대방을 멸시하게 될 때, 우리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려는 비겁함을 드러내는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그가 모든 관계의 책임을 나에게 미루려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타인을 멸시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관계가 파탄나면, 그는 희생자 코스포레를 아낌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부당한 일을 당한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p.208

아직까지는 누군가로부터 멸시를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매우 조심해야 할 감정이다. 나는 누군가를 멸시한 적이 있던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살면서 멸시를 당할 날이 있겟군.

절망(desperatio)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해고되지 안을 수도 있고 해고될 수도 있다.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얼마 전 상사가 내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겼지만, 돌아가는 회사 사정이 영 불안하기만 하다. 분명 감원이 있을 것 같은데 내게 새로운 일을 맡겼다는 것은 내가 해고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맡겨진 일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인 미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가느다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예상했던 비극이 빨리 오지 않자, 희망의 동아줄은 더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우리는 그 동아줄을 더 집요하게 움켜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비극이란 있을 수도 없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자기중심적인 판타지를 견고한 성곽이라고 믿고 의지할 때, 절망은 강하게 우리를 찾아올 수밖에 없다. 판타지의 성곽이 무너지는 순간 거기 기대고 있던 우리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테니 말이다. 절망에 자주 빠지는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비관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겠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미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기대도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 비관론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p.218

공포로부터 오는 절망. 그런 적이 있었다.

음주욕(ebietas)은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동창회에 자주 나가는 사람이 있다. 지금 자신의 삶이 피폐해질수록 과거의 영광을 확인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반장이었고 한때 공부도 잘해서 남들의 부러움과 아울러 선생님의 칭찬 속에 살았던 시절이 너무나 그리운 것이다. 그렇지만 동창회는 항상 모종의 갈등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과거에 자신보다 공부를 못했던 아이가 어느 사이엔가 검사 부인이나 의사 부인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심지어 대학 교수나 방송인이 되어 명성을 날리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잘나가는 친구는 과거 자신보다 잘나갔던 친구들 앞에서 뻐기기 위해서 동창회에 나온 것이다. 당연히 동창회에서 충돌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과거 영광스러운 권좌에 앉아 있던 사람과 과거에는 불우한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 존경 받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사이에서 동창회를 지배하는 헤게모니 싸움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왕과 현재의 여왕 중 누가 동창회 모임에서 큰소리를 낼 것인가. 이것은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과거의 여왕이 대취할 테니까 말이다.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그녀는 독한 소주라도 마시고 또 마실 것이다. 현재를 깨끗이 잊을 정도로 마시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과거의 여왕은 다시 화려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취기를 빌려 과거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 그녀는 현재의 여왕이 과거에는 자기 시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계속 좌중에게 주지시킬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부분 친구들은 과거의 여왕이 취했다고 조롱하면서 그녀의 술주정만 탓할 테니 말이다. 이어서 그들은 과거의 여왕을 버리고 단호히 현재의 여왕 편을 들 것이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부침에 대한 슬픈 보고서, 그래서 술을 마시게 만드는 묘한 공간으로 동창회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p.226

조금 서글프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 않은가

과대평가(existimatio)란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과대망상에 빠진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른들이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과대망상에는 무엇인가 정신적인 흥분 상태, 그러니까 일조으이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지 않은가. 사실 사랑에 빠진 친구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매우 걱정했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우리 눈에는 친구의 애인이 매우 우유부단한 사람인데, 친구는 그를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 친구의 애인은 경제적인 능력이 떨어지는데, 친구는 그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다고, 언젠가는 억대 연봉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런 사례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렇지만 이건 사실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내가 사랑에 빠졌을 때, 친구들은 노파심 탓인지 내 애인에 대해 계속 주의를 주거나 우려를 표현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경이든 내 경우이든,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사랑은 과대망상이라는 감정 상태가 지속될 때까지만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친구의 애인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과 판단을 친구가 수용한다면, 불행히도 친구가 불태우던 사랑의 열정은 이미 꺼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노파심에 가득 찬 친구들의 충고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나의 경우에도 사랑은 이미 떠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사랑에 빠진 친구들을 걱정하는 것이나 친구들이 사랑에 빠진 나를 걱정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일 뿐이다. 그런 우려와 걱정을 무시하고 상대방을 기꺼이 과대평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할 자격도 없는 것 아닐까? p.236

사랑에 빠지면 과대평가를 하지만, 과대평가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텐데…

호의(favor)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자신의 애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바로 호의라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호의라는 감정 구도에는 최소한 세 사람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친구가 개입하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혹은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누구든지 애인과 우정을 맺고 있는 친구에게는 호의를 베풀기 마련이다. 참 고마운 사람 아닌가. 애인을 아껴 주는 사람이니 말이다. 애인의 친구도 처음에는 아무런 의도 없이 내 호의에 대해 호의로 응대해 준다. 그의 입장에서도 친구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호의를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헥 애인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는 호의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내가 애인과 소원해질 때 발생한다. 나나 내 애인은 잠시의 냉각기라고 생각할 뿐, 그렇다고 헤어질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 냉각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인의 친구와는 계속 호의를 주고받게 된다. 애인과 소원해졌을 뿐 애인의 친구와 맺은 관계에서는 달리 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살짝 심드렁해진 애인보다 애인의 친구와 함께 잇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있다. 드디어 심각한 본말전도가 벌어진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함게 있으면 기쁜 감정이 들 대 그게 바로 사랑 아닌가. 이제 나와 애인의 친구는 진실을 직시하기만 하면 된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호의는 무척 위험한 감정이다. 왜일까? 첫째, 호의는 애인의 친구에 대한 사랑이기에 그 사람에 대해 무장 해제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애인과 소원해질 때 서로 주고받던 호의는 금방 애인을 배제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 가사처럼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잘못된 만남은 바로 이 호의라는 감정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러니 웨만하면 자신의 애인을 친구에게 소개시켜 주거나 셋이 함께하는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말기를. p.246

그건 사람나름이다. 관계가 깔끔한 사람이 있고, 관계가 깔끔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호의안에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환희(gaudium)란 우리가 희망했던 것보다 더 좋게 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소망하던 바가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환희를 느끼는 사람은 너무나 여리다는 점이다. 소망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루려고 하지도 않고, 혹은 기대감을 상당히 줄여 놓을 정도로 소심하고 여린 사람만이 환희라는 감정을 자주 느낄 것이다. 대학이든 회사든 합격자 발표문이 공고되는 날을 예로 들어 보자. 그곳에 몰려든 응사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뉘다. 우선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나뉘어야 한다. 그렇지만 합격한 경우에는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사람들은 환희나 감격에 빠져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크하게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네.”라는 표정만 짓고 만다. 전자는 소심한 사람들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불합격한 경우에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된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듯이 쿨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혀 믿기지 않다는 듯이 합격자 명단을 반복해서 읽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우에는 전자가 소심한 사람들이고, 후자가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소심한 사람들은 이미 합격에 대한 기대를 줄였기에 원하는 결과가 아노면 쉽게 흥분하고, 반대로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시크하게 결과를 받아들인다. 반대로 기대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던 적극적인 사람들은 원하는 결과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원하지 않던 결과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 것이다. 매사에 환희를 느끼고 쉽게 감격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소극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타인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강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 환희란 그다지 축복할 만한 감정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소극적이고 여리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p.256

살아오면서 환희를 느꼈던 적이 몇번 안되는데, 환희에 찬 인생을 되었으면 좋겠다. 한번정도는 크게 말이다.

영광(gloria)은 우리가 타인이 칭찬할 거라고 상상하는 자신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영광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찬탄하는 것을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1등이 되려는 것도, 권력을 잡으려는 것도, 섹시한 몸을 만들려는 것도, 고급 아파트에 살려는 것도, 대기업에 취업하려는 것도, 명품 가방을 사려는 것도,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려는 것도 모두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욕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영광의 자리에 이른 사람들은 치욕에서 가장 멀리 있다는 느낌 때문에 안도하는 것이고,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광의 정점에서 허무하게 굴러 떨어져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권력과 자본은 유년시절부터 몸서리쳐지는 치욕의 경험을 선사해서 우리에게 치욕을 겪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심을 각인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권력과 자본은 진정한 영광의 자리를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세팅해 놓았다. 권력의 해묵은 공식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 소수는 반드시 다수를 깨알처럼 분리시키고 분열시켜야만 한다. 어쨌든 지나치게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고독을 감내해야만 한다.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과 유대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인을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유대와 사랑을 원하는가? 공존과 공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영광을 멀리하고 치욕을 기꺼이 감내할 일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p.266

이 부분도 크게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공존시킬 수 있는 그릇이 있다. 영광과 사랑과 유대를 공존시키지 못할 이유가 뭣인가?

감사(gratia)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할까? 물론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의 종류 중 하나가 아니다.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 있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된다. 사랑이 어떻게 쉬운 감정이겠는가.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 법인데! 한 남자와 함께 있으려면, 가족들과 친구들을 놓아야만 한다. 심지어 목숨마저 요구하는 사랑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약한 사람에게 사랑은 삶을 뿌리째 뽀아 버릴 수도 있는 폭풍우로 느껴지기도 한다. 약하디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 이것 저것 따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뇌와 고민은 항상 약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 복잡해져만 가는 생각 끝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기 쉽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에 몸을 던지기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더 이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뿐. 이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저처럼 나약하고 모자란 사람을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라고. 지금까지 너무나 행복했었다.” 라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해 줄 수 있는 걸 가급적 다 해주려고 한다. 하룻밤의 섹스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 혹은 그가 평상시 원했던 근사한 자동차를 사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행복에 대한 선물이자,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 p.278

파괴적인 사랑은 좋지 않아. 그리고 그건 현실에서 흔한 종류가 아니다.

겸손(humilitas)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처럼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인정할 때, 누구나 겸손해진다. 그렇다고 겸손에서 무엇인가 비극적인 느낌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겸손의 감정을 느껴 보았던 사람은 누구나 다 안다. 겸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던 해묵은 편견, 허,영 그리고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색안경을 벗고 자신이나 세계, 그리고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 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과거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따라서 겸손해진 사람은 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능력과 약함을 느꼈을 뿐이다. 이것은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진지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성숙해진 것이다. 청년기 때를 돌아보라.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고,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유치한 자만심에 우리가 얼마나 찌들어 있었는지를. 그래서 겸손의 감정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겸손은 우리에게 청년기의 자만심보다 더 심한 해악을 줄 수도 있다. 지나친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마저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렇지만 이런 절망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추가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급격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자만심도 절망으로 바닥을 쳐야 한다. 오른쪽 왼쪽, 그리고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다가 추는 천천히 가운데서 멈춘다. 마찬가지로 자만심에서 절망으로 왔다 갔다 해야만 우리는 균형 잡힌 겸손에 이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럴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도 알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강함도 알게될 테니까 말이다. p.288

겸손은 매우 중요한 감정이다. 겸손을 경험을 통해 갖추지 못하면 잃는 것이 너무 많아진다. 겸손을 갖추게 되면 얻는 것은 매우 크다.

분노(indignatio)는 타인에게 해야될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분노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최소한의 연대 의식, 혹은 유대감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홀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 혹은 동료와 함께 있지만 스스로 왕따라고 느끼는 사람에게서 분노의 감정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둑한 길을 홀로 걸어갈 때 힘센 불량배를 만나 무릎까지 꿀려지는 봉변을 당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불량배에 분노하기보다는 단지 수치심만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나 애인이 불량배를 만나 그럼 봉변을 당하고 있는 장면에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그 불량배의 만행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 아닌가. 불량배는 한 명이지만 그 불량배로부터 해악을 당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은 직접 해악을 당하고 있고,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언제든지 그 불량배로부터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수의 약자를 통제하려면, 소수의 강자가 명심해야 할 철칙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약자에게 해악을 가할 때 같은 약자가 보는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도 언제든지 해악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자기처럼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자각은 극심한 분노와 아울러 조직적인 저항을 낳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권위적인 조직에서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반대로 우리가 학생회 아니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약자들이 연대하는 조직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자들이 어떤 해악을 입고 있는지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수도 있는 해악을 막기 위해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말자. 우리라는 의식이 없다면, 해악을 끼치는 강자에 대한 분노도 발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p.298

개인적인 분노와 사회적인 분노를 섞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인 분노는 좀더 섬세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텐데.

질투(invidia)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 에서

친구들의 모임에 남자친구를 데려가는 여자들이 있다. 이럴 때 그녀는 시시콜콜 남자친구에게 옷차림과 이야기 방식에 대해 잔소리를 해 댈 것이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멋진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 되면 사랑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간 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일대일의 관계, 즉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경험은 두 사람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애인을 멋지게 포장한 다음에 친구들에게 소개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친구들과 자신이 주연이고 남자친구는 잘해야 예쁜 조연정도로 전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모임에서 애인이 시키지도 않은 멘트를 던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문제는 그 멘트에 빠져든 친구가 한 명 있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자신의 애인에게 지나친 관심을 피력하고, 심지어 애교마저 떠는 것 같다. 예상치도 못한 질투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질투의 감정이 클수록 그녀는 서둘러 남자친구를 데리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자리를 뜰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을 빼고 자기 친구와 자기 애인이 순간적이나마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직감했으니까. 바로 이 것이다. 질투의 바닥에는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질투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드는 감정이니까. 그렇다고 이 여자가 다시 남자친구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당신만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줘요.” 그녀에게는 이것이 사랑일 테니까 말이다. p.308

질투는 묘한 감정이다. 그런데 동성에게도 일어나는 것은 시기심인가? 어떤 잘난 녀석들을 보면 시기심이 일때도 있다. 그건 뭐지?

적의(ira)는 미움의 의하여 우리들이 미워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들을 자극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슬픔과 우울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자신에게 우울함과 슬픔을 안겨 주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미움은 적의에 비하면 그마나 상황이 나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적의는 그 미움의 대상에게 구체적인 해악을 가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미워하는 정도를 넘어서 어떤 사람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적의라는 무서운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사무실의 동료가 애써 준비한 PPT 자료를 훼손하거나, 회식 자리에서 직장 상사의 신발을 다른 곳에 숨긴 적은 없는가? 아니면 상대방이 의자에 앉으려고 할 때 그 의자를 빼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아니면 신혼의 행복함에 젖어 있는 동료에게 남편이 어느 여자랑 즐겁게 이야기하고 잇는 장면을 보았다며 음해한 적은 없는가? 모두 적의에서 나온 행동들이다. 누군가에게 가하는 해악을 꿈꾸거나, 아니면 직접 실행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적의는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내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형법에 저촉될 수 있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라는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해악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엄청난 결핍감을 느끼게 되고, 반대로 구체적인 해악이 성공했을 때는 하늘에 뛰어오를 듯한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적의란 얼마나 치명적인 욕망인가. 그러니 적의를 느끼는 사람과는 하루속히 결별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도 나도 모두 적의라는 감정에 의해 산산히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p.318

비유가 너무 드라마적인데? 실제 생활에서는 형법까지 안가더라도 주변에 평판때문에 적의를 행동으로 드러내기가 무척 어렵다.

조롱(irrisio)이란 우리가 경멸하는 것이 우리가 미워하는 사물 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평소에 일을 못 한다고 자신을 갈구는 직장 상사가 사장에게서 무능하다는 질책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우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혹은 똑똑한 척하는 얄미운 푸배가 웬만한 사람도 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때도 우리는 속으로 웃음을 참기도 한다. 아니면 성인군자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밥맛 떨어지게 행동했던 어느 지식인 치명적인 스캔들에 빠질 때, 우리의 마음은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흥분되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조롱이라는 감정이다. 이렇게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할 때, 우리는 잠시 기쁨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네. 너도 별 수 없는 인간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이 기쁨을 속으로만 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남의 불행에 기쁨을 표시하는 순간, 엄청난 불이익이 생길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이럴 때 능숙한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 유리할 뿐만 아니라 내심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테니 말이다. 평소 미워하던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라. 내심 조롱을 아끼지 않고 있던 내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이럴 때 희열이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처럼 조롱이라는 감정에는 무엇인가 병적인 데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를 업신여기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우리는 미움과 슬픔의 상태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들에게 불행과 불운이 찾아든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은 잠시 기쁨에 젖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기쁨 아닌가. 마치 오아시스 하나 없는 사막을 배회할 때 하늘에서 찔끔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비와도 같다. 그렇지만 한 방울의 비에 기끔을 느끼기보다는 아예 사막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p.328

독일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가 이럴 때의 기쁨을 이야기하는 단어일 것 같다. 이런 감정은 아주 통쾌할 때가 있다.

욕정(libido)이란 성교에 대한 욕망이나 성교에 대한 사랑이다.(…..) 성교에 대한 이런 욕망은 적당한 경우에도, 그리고 적당하지 않은 경우에도 보통 욕정이라고 일컬어진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섹스는 사랑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그렇지만 남녀는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섹스가 사랑의 완성이라고 쉽게 믿고 있다. 섹스가 아직도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위험한 착각이다. 금욕주의적 가치관이 유교적 관습에 기독교적 관념이 결합되면서 더 강화되어 왔다. 심지어 아직도 젊은이들에게 순결 서약을 강요하는 것은 남루한 우리 사회의 단면 아닌가. 그렇지만 금욕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금기와 금지는 욕망과 상상력을 더욱 부채질하는 법. “들여다보지 마세요!” 길을 걷다가 벽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으면, 누구나 벽 안을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오만 가지 상상이 작동하게 된다. “벽 안에 무엇이 있는 걸까?” 결국 사회를 음란하게 만드는 것은 놀랍게도 금욕주의적 가치관이었던 셈이다.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금욕주의가 오히려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폐해를 고스란히 우리들이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도 섹스를 금기시하면서 동시에 섹스를 신성시하는 이율배반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계속 이야기하면 되고,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과 헤어지면 된다. 식사도, 운동도, 여행도, 영화 관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욕정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허락한다는 조건에서 기꺼이 섹스를 시도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가 지속적으로 정사를 나누면서 그 외의 것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섹스는 사라으이 완성이나 결실이 아니다. 그건 단지 사랑이 시작되는, 혹은 사랑이 진척되는 한 가지 계기일 뿐이다. p.338

이런, 그렇다면 자유롭게 섹스를 할 나이는 어느 시기부터가 적당한 것인가? 청소년이나 아동에 대한 감정적 자율권이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그것도 허용할 수 있단 말인가? 사회적 건강한 정서가 상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이상이란 말인가?

탐식(luxuria)이란 먹는 것에 대한 지나친(immoderata) 욕망이나 사랑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여루 시인의 시가 생각이난다. 실연의 아픈 상처를 달래면서 시인이 폭식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가랑이 사이에 밥통을 끼고 거기에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마구 비빈다. 그리고 떠난 사람의 공백을 채우듯이 숟가락이 넘치게 김치비빔밥을 담아 입 안 가득 쓸어 담는 것이다. 입이 터질 것 같지만, 그렇수록 떠나간 남자의 공백은 커져만 간다. 그러니 가득 들어 있는 밥 때문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뺨에는 애처로운 눈물이 떨어질 수 밖에. 약간의 과장기도 느껴지지만, 분명 누군가는 시인과 비슷한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타자의 공백이 주는 공허함을 먹는 것으로 충족하려는 사람도 존재하니까. ‘멋있다’가 ‘맛있다’로 옮겨지는 슬픈 순간이다. 그렇지만 타자의 자리를 어떻게 김치비빔밥이나 스파케티가 채워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이런 식의 식욕은 항상 눈물로 끝나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이별을 겪으면서도 음식을 먹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이 개나 돼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홀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자신의 버려진 모습이 더 처량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가 아니어도 좋다. 성적이나 업적 등등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때 발생하는 원초적인 충만감의 기억을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좌절할 때마다 음식을 먹는다면, 쉽게 비만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내 주변을 보면 약간 뚱뚱한 사람들 중에는 쉽게 좌절하는 타입이 상당히 있는 것 같다. 금방 좌절하고 공허감을 느끼니, 그들은 쉽게 먹을 것에 손을 대 왔고, 또 댄다. 그러니 집안사람들은 안 그런데 혼자 뚱뚱한 사람을 만나면, 편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쉽게 상처받고 좌절하는 여린 영혼의 소유자일 수도 있으니까. p.346

요건 좀 부끄럽다. 시장기를 느낄 때, 맛있는 음식 앞에서 겸손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배가 어느 정도 차고 나서는 내가 너무 허겁지겁 먹었다는 후회가 항상 든다. 젠장, 좀 점잖게 먹었으면 좋겠는데…

두려움(metus)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병이 걸릴까 봐 두렵다. 해고될까 봐 두렵다. 가난해질까 봐 두렵다. 사랑이 떠날까 봐 두렵다. 이처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이다.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거 상실의 경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은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때 병으로 고생했거나, 한때 실직을 했거나, 한때 실연을 당했던 사람은 미래에도 그런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이란 감정은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발생한다고 하겠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의 북확실성에 대한 염려! 어쨌든 두려움은 우리의 현재를 좀먹는 감정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픈 기억은 우리를 과거로 보내고, 지나친 염려는 우리를 미래로 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 즉 건강, 젊음, 직장, 애인 들은 모두 항상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혹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잠시 내 곁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젊음이니 건강이니 모두 어느 사이엔가 떠날 걸 염두에 둔다면, 젊었을 때 그리고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게 될 것이다. 해고되든 내가 떠나든 간에 지금 회사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인식한다면, 직장 생활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애인도 언젠간 떠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애인과의 근사한 키스에 더 몰입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하여 그것이 곁에 머물러 있으면 행복한 것이지만 그것이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말고 원래 상태에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그러면 안개가 걷히듯 어느 사이엔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p.356

그렇지만 이렇게 현재의 상황에만 몰입한다면 정작 중요한 본인의 성장은 어렵지 않을까? 때로는 자신의 젊음을 포기하고 희생하여 내면의 성찰을 통해 성장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성장은 어느 정도는 현재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차라리 이런 두려움과 동반하는 공생관계를 만드는 것은 어떠한가?

동정(misericordia)이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또 반대로 타인의 불행으 슬퍼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동정에는 묘한 동일시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동정하는 사람과 동정 받는 사람은 비슷한 신분이나 지위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정은 연민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라고 하겠다. 멋진 남자친구를 둔 여자는 아직도 미혼인 데다 연애도 하지 않는 친구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연민의 감정에는 모종의 우월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남자친구에게 차인 경험이 있는 여성이 최근 시련의 비극을 겪은 친구에게 느끼는 안타까움이 바로 동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친구 사이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연애가 꼬이는 걸까?” 라는 느낌. 그러니까 나나 너나 똑같은 비극에 빠졌다는 일종의 공동 운명체라는 생각이 바로 동정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그러니 충고를 할 때 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동정의 감정을 표현 해서는 안될 일이다. 예를들어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MBA 과정도 통과한 동창이 있다고 하자. 동창회에서 우리는 그가 최근에 자신이 다니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우리는 그의 아픔에 동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는 위로 받기는 커녕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지방대도 간신히 졸업했고 영어도 못해서 변변찮은 중소기업이나 다니고 있는 친구가 동정을 보일 정도로 자신이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동창회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가실직자가 되어도 너희들의 위로나 받을 사람으로 보이니? 뭐, 이런 거지 같은 것들이 다 있어. 무능한 것들은 주제 파악도 못하지. 이제 아주 맞먹네. “ 그러니 아무나 동정하지 말지니! 충분히 우리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동정을 표현해야 한다. 선의의 동정이 잘못했다가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까. p.366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이 양반은 동창회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나보네. 동창회가 무슨 나쁜 감정의 집합소라니..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 부류는 모든 사람에게서 온화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두 번째 부류의 인간은 그냥 쓰레기니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진짜로 위험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다.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기보다 항상 타인의 욕망을 따르려고 하니 온화하다느니 공손하다느니 하는 칭찬을 받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타인의 욕망을 따르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폐인이 될 것이다. 살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자신의 욕망을 철지히 제거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 반면 타인의 욕망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첫 번째 부류의 인간은 정말로 위험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억압된 욕망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정에서 약한 아내나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강자에게 굽실거리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약자를 공격하는 셈이다. 한마다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다. 첫 번째 부류의 남자를 만날 때 여자들은 그의 공손함과 온화함에 속아서 결혼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지 온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을 조심하라! 법 없이 살 사람을 조심하라! 이건 생활의 철칙이다. 결국 우리가 가까이 해도 되는 유일한 인간들은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은 타인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니, 적과 동지가 명확히 구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것이다. 만일 그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과 부합된다면, 이런 사람과는 주저하지 말고 사랑에 빠져도 된다. p.376

소설에서야 그런 인물을 본 적이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첫번째 부류와 같은 사람이 아주 좋은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거 뭐 너무 오버하시는 게 아닐까?

미움(odium)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마디로 헛소리다. 정말로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거나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한 번도 제대로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타인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사랑 아니면 무관심일 것이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미움의 관계는 반드시 서로 헤어져야만 하는, 그래서 둘 중 하나가 이 세상을 떠나야 끝날 수 있는, 한마디로 저주받은 관계다. 불행히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면, 미움이라는 감정은 상대방을 죽이거나 혹은 자살하는 것으로 우리를 내몰게 된다. 그래서 미움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항상 처절하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과 무관심한 관계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관계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니 미움만큼 비극적인 감정이 또 있을까. 어떤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관계를 소망하도록 만들 정도로 처절한 감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미움이란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감소시켜서 우리를 고사목처럼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그러니 자살하기 싫으면, 상대를 죽일 수밖에. 반대로 상대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자살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꽃도 피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슬픔도 없으리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행복하게 눈을 감게 될 것이다. 반대로 미운 상대를 죽인다면,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기꺼이 감내하게 되는 작은 기쁨을 조금씩 되찾게 될 것이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순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미소를 띠울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미움이라는 비극적 관계를 경험하지는 않았으니까. p.386

다행스럽게 나는 아직 미움이라는 비극적인 경험을 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다.

후회(poenitentia)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후회는 유야적인 감정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느끼고 판단하는데, 비가 오는 것도 자신이 울어서라고 생각하고 무지개가 뜬 것도 자신이 방금 사탕을 먹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세계의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자기 뜻대로 세상이 되지 않을 때 그렇게 쉽게 짜증을 내곤 한다. 후회는 불행한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릴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후회라는 감정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유아적인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자신의 어떤 행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후회라는 감정은 생길 수도 없다. 후회에 금방 젖어드는 사람에게는 대학에 떨어진 것도 오로지 자기 탓이다. 대학 정원 같은 구조적 문제라든가 학과 선택에 있어서 부모님의 강요 혹은 공부에 몰두하기 힘든 가정환경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실연당한 것도 완전히 자기 탓이라고 믿는다. 애인이 더 멋진 이성을 만나서 자신을 떠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인이 학업 때문에 자신을 멀리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결국 후회라는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유아적 태도를 벗어나야만 한다. 이것은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즉 타자의 타자성을 받아들여야 후회라는 감정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몇 가지 지혜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소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기치 않은 행복이나 불행이 나에게 올 수도 있다.” p.398

사실 후회라는 감정은 하루에도 몇번씩 생기는 가벼운 감정이다. 물론 아주 심각한 후회의 감정이 인생을 휘두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하루에 오는 작은 후회들을 통해서 나를 크 후회에서 벗어나도록 훈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후회를 너무 후회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다.

끌림(propensio)이란 우연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너무나 서둘러 일찍 결혼하는 여성이 있다. 이건 그녀의 행복지수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한 가족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은 행복지수가 매우 낮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가 조금만 잘해 주어도 금방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식충’이라고 놀림을 받을 정도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던 여자가 있다고 하자.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정말 맛나게 잘 드시네요.”라고 친근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녀가 어떻게 그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곧 가족을 떠나 그와 새로운 삶을 꾸리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남자와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녀는 금방 그에게 심드렁해질 것이다.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남자보다 조금 더 잘해주는 남자가 생기면, 그녀는 금방 새로운 남자에게 또 끌리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지만 그 대가로 화려한 연예인이 되는 데 성공한 여배우들의 경우에 대부분 결혼 생활이 비극적으로 파탄 나는 데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이 나의 과거 상태에 의존한다면,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과 내 입맛에 맞아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허기짐이 없을 때에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나의 삶 자체가 지나치게 불행한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시말해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는 행복하도록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p.408

가만보면 나도 끌림에 매우 취약한 성격이다. 사랑은 아니지만 끌림은 꽤 자주 경험하는 것 같다. 다행이 이제는 즉흥적이지 않아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말이다.

치욕(pudor)은 우리가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역린(逆鱗)’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고전 [한비자]에 등장하는 개념인데, ‘거꾸로 된 비늘’이라는 뜻이다. 용의 머리 뒤편에는 다른 비늘 방향과 반대로 되어 있는 비늘이 모인 부분이 있다고 한다. 용을 탄 사람이 잘못해서 그 부분을 만지게 되면, 용은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려 자기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을 물어 죽인다. 한비자가 용의 거꾸로 된 비늘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마다 ‘역린’이 있으니, 그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빠지지 않는 뱃살이 역린일 수도 있다. 누군가 뚱뚱한 사람에게 “어머, 건갱해 보여서 너무 다행이지.”라고 말했다고 하자. 뚱뚱한 사람은 그 말에 모욕감은 느끼고는 자신의 치부를 건드린 그 사람에게 적의와 반감을 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못 배운 부모가 역린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어머니는 무슨 과 나왔니?”라고 가볍게 되묻는 것조차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한 살의를 견디기 힘들 테니까 말이다. 또 어떤 이에게는 이혼 경력이 역린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요즘엔 돌아온 싱글이 대세야.”라는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이혼한 사람은 그 말을 자신에 대한 동정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마다 역린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외모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강한 반감을 표현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받으들일 수 있다. 또한 외모를 역린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그가 처한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외모가 역린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좋은 인간 관계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만나고 있는 사람의 역린을 먼저 파악할 일이다. 역린만 건드리지 않고 보호해 준다면, 우리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웬만한 셈세함이 아니고서는 사람마다 다른 역린, 그리고 상황마다 옮겨 다니는 역린을 파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p.418

누군가에게 치욕을 주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내가 아주 취약한 상태에서 전혀 방비가 되지 않은 나를 절벽밑으로 밀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겁남(pusillanimitas)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인간은 겁이 많은 존재다. 그래서 종교까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망칠까 봐 두려워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비가 오는 것과 기우제를 지내는 것 가이에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저 막막하게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야 미래에 대한 공포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에 대한 공포, 이것이 바로 겁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 된다. 이빨이 썩을까 봐 달콤한 초콜릿을 먹지 못하는 사람, 실연의 공포 때문에 프로포즈를 거부하는 사람, 시험의 공포 때문에 공연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 사고가 날까 봐 여행을 가지 않으려는 사람…… 한마디로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니 더 강한 욕망의 대상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웬만한 욕망의 대상으로는 항상 미래의 실패가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의 모든 희망과 절망을 염두에 둘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아주 매력적인 그리고 강렬한 대상을 만나야만 한다. 너무나 근사해서 뿌리칠 수 없는 초콜릿을 발견하면 이빨이 썩는 것쯤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한 번의 키스라도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난다면, 나중에 올 실연이 뭐 그리 두렵겠는가. 너무나 환상적인 공연이어서 현장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지상의 행복을 느낀다면, 내일 시험이 중요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매혹적인 대상과의 우연적인 마주침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움츠러들지 말고 바깥으로 자주 나가야만 한다. 기적과도 같은 우연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p.428

한편으로 공감도 가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내 배우자가 한번의 키스를 하기 위해 나를 희생시킨다면 나의 마음에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겠는가? 나의 자녀가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연에 참석하는 무모함을 가졌다면 어떻게 양육하겠는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확신(securitas)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나는 너를 믿어!” 정말 무서운 말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지혜로운 사람만이 상대방의 깊은 의심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용수철이 눌려진 것처럼 압력을 받아내고 있는 이 조용한 의심은 언제든 튕겨져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확신과 의심 사이를 저울추처럼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이 가진 역량보다는 타인에게 더 많이 의존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믿음대로 타인이 움직일 때 행복해지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셈이다. 여기서 우유부단함과 소심함이라는 감정도 덤으로 자라나게 된다. 확신과 의심이라는 치명적인 변증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의 슬로건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님 말고!”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한 다음에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쿨하게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닌 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확신하거나 의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면, 그것을 그저 행운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 혹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타인에 대한 확신을 갖거나 의심을 품을 이유는 없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의심과 확신에 갇힌 사람이라면 이제 시선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돌리도록 하자. 그러면 아마도 너무나 의존적이고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나약함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영원히 확신과 의심 사이를 방황하는 길 잃은 영혼으로 남게 될 것이다. p.438

정말 제대로 된 뒤통수는 확신하던 사람이 때리는 법이지.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확신한단 말인가.

희망(spes)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가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그곳에 반드시 가고 싶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희망을 갖고 산다. 그렇지만 희망은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이 품고 잇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아이들은 희망이 가진 불확실성보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갖게 되는 기쁨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음껏 희망을 품을 수가 있다. 반면 어른들은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기쁨보다는 그것이 지닌 불확실성에 더 신경을 쓴다. 여러 다양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어른들에게 이런 불확실성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은 삶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기꺼이 희망을 현실이라는 제단에 바치고 만다. 그러면서 우리는 희망에 부푼 삶이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삶에 불과하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한다.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일종의 ‘신포도’ 전략인 셈이다. 따먹기 힘드니까 아예 포도가 시다고 미리 폄하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포도를 따먹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가? 희망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셀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럴 때 그냥 하루하루 매너리즘에 빠진 삶만이 우리에게 남을 뿐이다. 커다란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조그만 희망들을 품어 보도록 하자. “나는 화가가 될 거야. 멋진 유화를 그릴 거니까.” “나는 플라밍고 기타를 배울 거야.” “나는 마추픽추에 갈 거야.” “나는 키스자렛을 만나 그의 연주를 듣고 CD에 사인을 받을 거야.” 이런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러면 내 마음에 희망은 더욱더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기쁨과 행복도 내 곁에 더 머물 테니까. p.448

사실 희망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앞으로가 잘 될거라는 큰 호흡의 위안이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해 준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단지 현실의 작은 소망보다는?

오만(superbia)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너에 대해 나는 모르는 것이 없어.” 오만한 사람의 내면을 이만큼 분명히 보여주는 표어도 없을것이다. 오만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 항상 전지전능하다는 자신감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래서 오만은 항상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전지전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처럼 오만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동차 사고로 죽기 쉽고, 암벽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추락사하기 쉽다. 이런 비극적인 결과가 탄생할 때, 우리는 절로 탄식이 나온다. “도대체 자동차는 무엇이며, 자동차를 안다고 자임하던 나는 또 누구인가?” “도대체 암벽은 무엇이며, 암벽을 잘 안다던 나는 또 누구인가?” 사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를 배신하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자동차도 암벽도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알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자동차를, 암벽을,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그 대상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한때 사랑받았던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네가 정말 나를 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 변하는 자동차의 상태를 민감하게 읽으려고 노력을 하지 않고, 암벽을 상태를 제대로 점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또 애인을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복수를 다 할 수 밖에. p.458

마지막까지 사랑타령이다. 하긴 인간의 감정중에 가장 위대한 감정이 사랑일테니…

소심함(timor)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소심함과 대담함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양극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매사에 소심하게 된다. 반대로 결과가 항상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일에 대담하게 된다. 소심함이든 대담함이든 두 감정 모두 극단적 일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소심함에는 미덕이 한 가지 있다. 미래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소심한 사람은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항상 실패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담함에도 예상하기 힘든 우휴증이 있기는 하다. 미래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기에 대담한 사람은 비극적인 결과가 발생했을 때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나 자신과 타자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면서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스로 미래의 모습을 합리적으로 예측할지라도, 타자는 우리의 예측 이상으로 움직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예측 자체를 무화시킬 수 있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되었다고 해도 혹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원인을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만 돌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지나치게 대담한 사람에게는 소심함이 필요하고, 반대로 불필요하게 소심한 사람에게는 대담함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만이 미래에 대해 균형 잡힌 시선을 갖출 수 있게 된다. 소심함과 대담함의 중도, 혹은 중용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소심함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하나의 행동 강령을 추천하고 싶다. ‘아님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소심함을 극복하려면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님 말고!’ 라는 쿨한 자세를 갖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실천하는 것마저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심한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조금씩 갖추게 될 것이다. p.468

소심함과 대담함의 중도와 중용은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균형잡힌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laetitia)의 정서를 쾌감(titillatio)나 유쾌함(hilaritas)이라고 본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정신과 육체에서 모두 기쁨, 즉 쾌감은 자주 찾아오는 경험은 아니다. 일단 몸을 움직여야만 우리는 쾌감을 소망할 수 있다. 섹스, 춤, 그리고 스포츠가 쾌감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춤이나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섹스에서도 쾌감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몸에 기쁨이 찾아오는 경우에 우리는 정신에서도 반드시 기쁨을 느끼지만, 반대로 정신의 기쁨이 필연적으로 몸의 기쁨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남자와 어떨결에 섹스를 나누게 되었다고 하자. 기대하지도 않았음에도 우리는 너무나 흡족하게 섹스를 즐길 수도 있다. 섹스를 마친 후 그 상대방은 완전히 다른 남자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제 그 남자만 생각해도 정신은 기쁨으로 가득 찰 테니까 말이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함께 있다는 생각만으로 정신을 기쁨에 젖어들게 하는 남자가 있다. 기대감을 품은 채,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자.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섹스에 서툴 뿐만 아니라 전혀 상대방을 배려하지도 않았다. 그 후 과연 이 남자를 떠올렸을 때, 여자는 기쁜 감정을 품을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항상 옳지만, 정신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스피노자가 “우리는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때 행복을 느끼는지, 그리고 어느 때 불행을 느끼는지 계속 응시해야만 한다. 아무리 정신으로 “이럴 때 자신은 틀림없이 행복할 거야.” 라고 생각해도 직접 몸으로 겪은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p.478

인간의 감정을 너무 단순화 시키고 있다. 만약 여성이 성적인 만족을 느끼는 신체적 구조를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냈다고 치자. 그러면 강제로 성행위를 하는 경우에 가해자가 여자의 신체 만족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작동시킬 수 있다면 피해자는 그 자체로도 신체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현재의 도구보다 훨씬 더 신체적 만족을 줄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여성은 그 도구만으로도 신체적 만족을 느끼면 그 다음 정신적 만족은 누구에게 느끼게 된는 것일까? 그 도구를 작동시켜준 사람? 그 도구 자체? 인간에게 정신적 교감이 신체적 만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한 전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이런, 이건 너무 선정적이고, 인기영합적인데?

슬픔(tristitia)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타자와의 마주침이 없다면 감정도 존재할 수 없다. 타자를 만나서 삶이 충만해진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슬픔은 그와 반대로 타자를 만나서 삶의 충만함이 훼손된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기쁨이나 절대적인 슬픔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불행히도 우리는 영원을 구가하는 신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은 상대적이거나 조건적일 수 밖에 없는 법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감정도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타자와의 관계가 지속되면 우리는 슬픔이라는 감정에 지배된다. 이럴 때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더 잘해 주는 타자가 등장하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기쁨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당연히 우리는 내게 기쁨을 안겨 준 그 타자와 함께 있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타자보다 더 많은 기쁨을 주는 타자가 또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새로운 타자가 기쁨의 대상이 되는 만큼, 과거 기쁨을 주었던 타자는 자연스럽게 슬픔의 대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건 슬픔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타자일지라도, 나에게 더 심한 슬픔을 주는 또 다른 타자가 등장하는 순간, 과거의 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의 대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저 기쁨을 주는 대상이라면 단연코 그것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변덕’이나 ‘변심’을 이야기하는 사회적 평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쿨’해질 필요가 있다.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 그냥 지금 내 앞에 있는 타자가 기쁨을 주는지. 그렇지 않은지에만 집중하자. p.488

어떻게 내 주위의 타자가 나에게 기쁨 아니면 슬픔만을 주겠는가? 그리고 항상 슬픔만을 주고, 기쁨만을 주겠는가? 그런 관계는 막장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타자와의 관계일텐데…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verecundia)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얼굴이 두꺼워 수치스러운 줄 모른다는 말이다. 최소한 잘못된 행동을 했으면 얼굴이라도 붉게 상기되는 것이 정상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낯짝이 두꺼운 사람을 많이 보게 되낟. 정말 화가 나는 상황이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혹은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해 놓고는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이 뭐가 대수냐는 식으로 당당하기까지 하다. 지하철에서 빈자리가 생기면 가방을 던지거나 심지어 자신의 거대한 몸을 날리는 아주머니들, 새치기를 해 놓고서는 태연자약하게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직장인들, 가장 늦게 엘리베이터를 타서 정원 초과를 유발해 놓고도 내리려고 하지 않는 아저씨들. 한때 그들은 섬세한 감성을 지닌 여학생, 혹은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헌신했던 청년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들은 뱀처럼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발생할 수도 없는 감정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도 자신의 행동이 당당할 때, 그러니까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자존감, 혹은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잃어버린 수치심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타인의 시선을 다시 느끼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은 없다. 특히 자신을 사랑하는 타인이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딸이 곁에서 보고 있는데도 몸을 날려 빈자리를 잡으려는 어머니는 없을 것이고, 후배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새치기를 하면서 시치미를 떼는 여자도 없을 것이다. 또 아무리 뻔뻔한 아저씨일지라도 최근에 만나 호감을 느끼는 여자가 옆에 있다면 결코 만원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p.498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람들, 혹은 마비된 사람들, 그런데 혹시 그건 개인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복수심(vindicta)은 미움의 정서로 우리에게 해약을 가한 사람에게 똑같은 미움으로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함무라비 법전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잘해 주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그만큼 위해를 가해야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거꾸로 살고 있지 않은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비위를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일단 함무라비 법전을 관철시키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노예 도덕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만 한다. 강한 자에게 핍박을 받는 약자가 어떻게 강자에게 자신이 당한 것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말인가, 복수를 시행할 힘조차 없는데, 이럴 때 예수의 속삼임이 우리의 나약함을 정당화하며 찾아온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는 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위대한 일이야.” 이런 속삼임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마치 자신에게 원수를 갚을 수도 있고 갚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양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약자가 복수를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강자에게 복수할 수조차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사랑이든 복수든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자, 혹은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조차 없다. 강자가 되었을 때에만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을 갖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해악을 당했지만 복수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면, 아주 천천히 힘을 키워서 강해져야 한다. 5년이든 10년이든 치욕을 잊지 말고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마침내 해악을 가한 사람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게 되는 날, 우리는 진정 결정할 수 있다. 계획대로 복수를 추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용서할 수도 있다. p.508

법의 심판이 공정하다면 복수의 칼을 세울 필요도 없지 않을까? 사회적 심판이 상식보다 적을 때 사적인 복수심이 일어나게 된다. 누군가에게 확실하게 위해를 가한다면, 피해자가 복수의 마음이 들지 않도록 법이 엄해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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