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2017독 독서목록 66/100 (2017.11.23)

Yoon, Kyho
Reading, Thinking & Sharing Bookers
8 min readJun 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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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 신영복/돌베게

변명이긴 하지만 책을 여러권 읽다보면, 다양한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 정작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꼼꼼히 챙겨보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 신영복 교수님의 책은 [강의]를 처음으로 읽고, [담론]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서 참 대단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우 어려운 주제를 설명하는데, 저같은 초짜도 이해하기가 쉽게 설명을 해주셨고, 그런데도 깊이가 있어서 그 주제로 남들 앞에서 주역이니 하면서 아는 체도 제법 할 정도였으니, 단지 책만 읽고서 이리도 어려운 내용을 이렇게나 쉽게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예전에 읽은 기억은 나긴 하는데, 지금처럼 정리를 하면서 읽지 않아서인지 생각해봐도 뭘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 제게 도서관에서 1997년에 출간된 고 신영복 교수님의 책을 우연히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나무야 나무야]는 참 오래된 책입니다. 1997년이면 벌써 20여년 가까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일단 교수님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내시고 오랜 침묵 후에 두번째로 출간하신 책이라고 합니다. 소소한 주제들을 가지고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교수님의 성찰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도 한줄 한줄이 예사롭지 않은 내용을 매우 부드럽고 친근한 필체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 따뜻함은 인위적인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마음에 간직한 작가의 가슴 절절한 성찰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20여년이 지난 말들이건만, 어찌 오늘 우리들의 현실하고 이리도 맞을 수 있을까요? 그만큼 교수님의 삶과 시대에 대한 성찰이 그 누구보다 깊이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경쟁체제 안에서 저마다 생존이나 혹은 성공을 위해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긴 안목의 시대정신이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나 이런 것들은 못 보거나 혹은 보고도 못 본것처럼 지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요.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을 알게 해주고,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이가 바로 시대의 스승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이 작고하셨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참 마음이 슬펐었습니다. 이 책은 이 시대의 필수 교양서 되겠습니다.

언제고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구해서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그렇게도 작은 부분에서 삶의 큰 부분을 채워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많지는 않으니까요. 지금의 세상은 달콤짭짜름하게 입맛에 쫙 감기는 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더 맛있는 음식이 땡기는 것처럼 더 달달한 것을 찾게 됩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가식적인 위로나 충고가 아닐텐데 말입니다.

한줄평 : “신영복 교수님, 시대의 스승, 그립다”
★★★★★

옛날의 어머니들은 자기가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저마다 누군가의 자양이 되는 것을 삶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모(慈母)라 하였습니다. p.16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어느 날 장에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하여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이를테면 종이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발의 윤곽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장에 갈 때는 깜빡 잊고 탁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신발가게 앞에 와서야 탁을 집에다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법 먼 길을 되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장이 파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에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당신의 발로 신어보면 될 일이 아니오.”
차치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p.91

어이없게 들리지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

금강산은 빼어나기는 하나 장중하지 못하고(秀而不壯)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壯而不秀)고 합니다. 금강산은 그 수려한 봉우리들이 하늘에 빼어나 있되 장중한 무게가 없고, 지리산은 태산부동의 너른 품으로 대지를 안고 있되 빼어난 자태가 없어 아쉽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빼어나기도 하고 장중하기도 하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지만 산의 경우이든 사람의 경우이든 이 둘을 모두 갖추고 있기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秀)와 장(壯)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수(秀)보다는 장(壯)을 택하고 싶습니다. 장중함은 얼른 눈에 띄지도 않고 그것에서 오는 감동도 매우 더딘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있음’이 크고 그 감동이 구원(久遠)하여 가히 ‘근본’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106

신영복

우리 시대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194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육사에서 교관으로 있던 엘리트 지식인이었던 신영복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 · 전주 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하다가 1988년 8 ·15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깨알같이 쓴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묶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큰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진솔함으로 가득한 산문집이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중국고전강독 등을 가르쳤고, 1998년 3월, 출소 10년만에 사면복권되었다. 1998년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용되어 2007년 정년퇴임을 하고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2014년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16년 1월 15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저자가 20년 20일이라는 긴 수형 생활 속에서 제수, 형수, 부모님에게 보낸 서간을 엮은 책으로, 그 한편 한편이 유명한 명상록을 읽는 만큼이나 깊이가 있다. 그의 글 안에는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 수형 생활 안에서 만난 크고 작은 일들과 단상, 가족에의 소중함 등이 정감어린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일요일 오후, 담요 털러 나가서 양지바른 곳의 모래 흙을 가만히 쓸어 보았더니 그 속에 벌써 눈록색의 풀싹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봄은 무거운 옷을 벗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던 소시민의 감상이 어쩌다 작은 풀싹에 맞는 이야기가 되었나 봅니다.’슬픔이 사람을 맑게 만드는 것인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울타리 밖에 사는 우리보다 넓고 아름답다. 시인 김용택의 “아름다운 역사의 죄를 지은 이들이 내어놓은 감옥에서의 사색은 사람들을 해방시킨다”는 글귀가 공감되는 부분이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렇듯, 수형 생활 중 자신이 직접 겪으면서 털어놓는 진솔한 이야기와 사색들은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져내린 뒤 자본의 전일적 지배가 강화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정보화의 물결이 넘실대는 이 세기말의 상황 속에서 그가 찾아낸 희망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다. 『나무야 나무야』에서 그는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도 푸르고 굳건하게 뻗어가고 있는 ‘남산의 소나무들’처럼 ‘메마른 땅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연민을 보낸다.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오늘의 자본주의문화에 대한 그의 시각은 냉엄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사상한 채 상품미학에 매몰된 껍데기의 문화를 그는 통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정보’와 ‘가상공간’에 매달리는 오늘의 신세대 문화에 대해서도 그것이 지배구조의 말단에 하나의 칩(chip)으로 종속되는 소외의 극치일 수 있음을 우려하면서,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임을 갈파한다. 또한 단순히 비판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의 문명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이어진다. 그는 소나무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비하면서도 무엇 하나 변변히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삶을 반성하면서 자연을 오로지 생산의 요소로 규정하는 현대 문명의 폭력성을 질타한다. 이러한 근본적 성찰의 밑바닥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연대에 대한 옹호이다. 그는, 화사한 언어의 요설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으로써 깨닫고 가르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20년 수형 생활을 통해 얻은 가르침과 동양고전을 통해 유연한 세계 인식의 틀을 설명한 『담론』은 부제 그대로 그의 마지막 강의록이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고, 가슴에서 끝나지 않고 발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공부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니며,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든다고 역설한다. 책 속 곳곳에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가르침이 그득 담겨 있다.

그 밖에 다른 저서로는 『손잡고 더불어』『나무가 나무에게』 『강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청구회 추억』, 『다른 것이 아름답다』(공저), 『여럿이 함께』, 『한국의 명강의』(공저), 『느티아래 강의실』(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는 『외국무역과 국민경제』, 『사람아 아! 사람아』, 『노신전』(공역), 『중국역대시가선집』(기세춘 공역, 4권)이 있다. ‘더불어숲’ (http://www.shinyoungbok.pe.kr) 홈페이지에서 저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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