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중독
2016 독서목록 33/120 (2016.6.5)

[노력중독: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에 관한 고찰] — 에른스트 푀펠, 베아트리체 바그너/율리시즈
난 어릴 때 백과사전 읽는 것을 좋아했다. 백과사전에 있는 지식만 머리속에 넣을 수 있다면 정말 똑똑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최근에 방영된 공부의 배신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니, 한 중학생이 명문고를 가기 위해 교과서를 통채로 외우는 부분이 나온다. 대단하다 싶다.
그런데, 이제 스마트 폰만 들고 다니면, 언제 어디서든 세상의 많은 지식에 접속할 수 있다. 그래서 정말 확실하지 않으면 큰 소리로 우기면 안 된다. 누구든 그 자리에서 바로 검색하면 되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지식이 많다고 지혜로워 지는 것은 아니다. 에른스트 푀펠과 베아트리체 바그너가 쓴 [노력중독]은 지식의 축적은 더할 나위 없이 커져가고 있는 현대에 오히려 어리석어 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주제가 우리나라에 자기계발서 중에 적지 않지만, 이 책이 다른 점은 뇌과학자이지 임상심리학자인 저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학문적인 근거에 의해 씌였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많이 만나볼 수 있는 책들은 주로 종교인들이 쓴 자기계발서와는 차원이 다른 책이다.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루에도 어마한 양으로 우리에게 쏟아지는 지식과 정보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에게 그 방향이 지향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줄요약 : “우리가 오히려 더 멍청해지고 있는 것 아냐?”
★★★☆☆
한국은 항상 PISA 평가의 상위 랭크에 올라 있는 나라다. 2009년도 평가를 보면 독일은 수학이 16위인 반면 한국은 4위를 차지하고 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독일이 13위이고 한국이 6위이며, 독해 부분은 독일이 20위인데 반해 한국은 2위다. 한국에서 온 김 군은 학창시절 우등생이었을 뿐 아니라 대학에서 전공한 신경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며 계속 박사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왔다. 김군은 뮌헨의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의 인문학 분야에서 에른스트 푀펠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김 군은 실로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두뇌 기능뿐 아니라 신경의 작동방식, 그리고 두뇌의 세세한 부분과 그 속에 담긴 비밀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복제 가능한 지식에 지나지 않았으며, 독창적인 지성 면에서는 처참한 낙오자였다. 비정상적인 조합이나 연관성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전무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나 학문 방식을 고안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은 형편없었다. 엄청난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과학자가 실제로도 바보와 다름없는 게 아닌가! p.33
그래서 우리나라의 멍청한 천재들은 우리나라에서만 통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는 것이 많아진다고 무식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상하리만큼 무지함이 증가한다. 지식이 진보할수록 인간이 알아야 할 근본적인 지식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p.58
좋은 지적이다.
삶의 많은 부분들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과 우연한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필연으로 해석하는 우연에 의해 많은 것들이 생겨난다. 사람은 살면서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환경에 적응한다. 다가온 기회를 사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그 경험에서 각인된 것들은 유전자에게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더 정확하게는 유전자의 화학적 변화인데, 즉 유전자가 활성화되거나 쇠퇴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외 연관성은 후성유전학 분야에서 젊은 연구가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p.140
필연으로 해석하는 우연, 아주 좋은 표현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결정을 내리는 것일까, 아니면 결정이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것일까? 두뇌 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답은 명확하다. 결정이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무엇’인가가 결정하는 것이다. 결정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인 결정의 과정에 굴복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철학적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의지라는 것을 견고하고 의식적인 개념으로 보는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의식적으로 이루어졌건 혹은 무의식적인 결론이건 그냥 허공에서 불현듯 생겨난 결정이란 없다. 구체적(의식적)이건 추상적(무의식적)이건 대부분 어떤 결정에는 그것에 이르게 된 분명한 배경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딜레마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결정을 내리기 위한 작업은 우리 안에서 계속된다고. 이 또한 결정을 위한 과정이며 결정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분기점일 뿐이다.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결과를 일구어내기 위한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밝혀진다. p.194
상당히 재미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합리적인 결정보다는 감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면 진짜 그런건 같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하고 잘 꾸려진 팀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간혹 이상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모든 견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19세기 뮌헨 의과대학 교수의 일화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영국에는 시속 평균 32~49킬로미터로 운행하는 기차가 처음으로 선보였다. 마차보다 세 배나 빠른 속도였다. 따라서 이 ‘현기증 나는 속도’가 건강에 위험하지 않다는 의사의 증명서가 필요해졌다. 뮌헨 대학의 의사 연합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매우 빠른 기차의 속도는 승객에게 어지럼증과 신경쇠약증을 일으킬 위험이 있으므로 철로 주위에 나무 벽으로 쌓아서 승객이 밖을 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기차는 예전의 시속 평균 32~49킬로미터에서 200~30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면서 인간의 신경불안증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p.220
이런 사례는 상당히 많다.
인간의 지식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명백하게 활자화된 의미론적 지식으로, 쓰기라는 형식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은 순수한 사실만을 다루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별다른 문제없이 공유될 수 있는 지식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은 또한 그림 지식이라는 형태로도 표현될 수 있다. 살아가는 동안 감정적 인상을 바탕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한 그림이 머릿속에 저장된다. 이는 언어로 전달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마지막으로 암시 혹은 직관적 지식이 있는데, 이는 언어를 넘어서는 부분이다.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형태의 몸 언어나 두뇌의 알 수 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지식의 유형이기도 하다. p.262
숫자의 형태로 전달되는 지식로 활자화된 지식이겠지. 현대의 지식은 숫자화된 것이 꽤 많은데, 그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할 때가 많다. 그것이 직관일까?
에른스트 푀펠
독일 최고의 뇌과학자. 뮌헨 대학교 임상심리학과 교수이자 인문학 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베이징 대학 초빙교수를 지냈다. 독일 한림원과 유럽과학예술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의식의 경계 Grenzen des Bewusstseins》(1997), 《자아 속의 두뇌 구조 Der Rahmen. Ein Blick des Gehirns auf unser Ich》(2006)가 있고, 같은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베아트리체 바그너와 함께 책을 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