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의 세계사

Yoon, Kyho
Reading, Thinking & Sharing Bookers
10 min readFeb 10, 2019

2018 독서목록 5/100

[조약의 세계사: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조약 64] — 함규진/미래의 창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다보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 아닙니다. 그 중에 한가지가 계약입니다. 개인간에 뭔가를 부탁하거나 해주기로 하는 경우에는 서로간의 신의만 있으면 가능합니다만,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계약서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약이 쌍방이 원하던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 책임과 손실 등을 따지기 위함입니다. 그 계약서를 작성할 때 신중하지 않으면 크게 손해를 보거나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작은 거래라도 반드시 상호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교환하라고 조언 합니다. 하지만 사업 초기라 통상적인 계약서의 양식이 없는 경우 저같은 신참 사업자에게는 계약서를 만들어가는 일 자체가 어렵습니다. 한글자 한글자 새롭게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고, 그 계약에 법적인 문제가 없는지 확인도 해야하고, 또 거래자 상호간에 이견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한참의 시간을 들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저같은 작은 규모의 사업자간의 계약도 이러한데 국가간의 약속이나 거래를 정하는 일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일까요?

함규진의 [조약의 세계사]는 역사상 의미가 있는 국가간의 조약 64개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고대에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맺은 조약부터 현대의 경제조약이나 환경조약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불평등 조약에 큰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외국과의 협정을 하게 되면 뭔가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피해 의식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국가간의 조약은 얼마든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정해질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 국가간의 조약의 내용에 국민들이 관심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런 책들은 참 의미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간의 조약들을 개개인이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이 바로 그 조약을 통해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조약의 결과가 바로 개개인의 경제활동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거래의 당사자들의 의도가 선하다면, 계약서를 작성하고 거래를 행하는 것은 대부분 순조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선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악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갈취하고 이용해 먹으려고 달려드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처음에는 선한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서로간의 불신으로 갈등이 크게 증폭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 잘 작성한 계약서가 바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방패입니다. 이제부터 단단한 방패들을 잘 만들어가야겠습니다.

한줄요약 : 국가간의 조약을 역사적 안목으로 보자

★★★★☆

그때 홀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서희였다. 일찍이 거란을 함께 견제하자는 뜻을 전하러 송나라에 다녀왔던 그는 요나라가 침공한 이유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소손녕은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으라 했지만 그것이 실제 목표는 아니다. 왜냐하면 고구려 땅이라고 하면 한강 이북까지도 해당되니 서경 이북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예 나라의 절반을 바치라는 소리인데, 그것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요구이기에 진짜 요구일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요의 실제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송과 자웅을 겨루기 전에 고려의 복속 내지 중립을 이루어 뒤통수를 맞을 위험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서희는 간파했다.

사실 요의 군사가 80만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10만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봉산군 전투에서 이겼지만 안융진에서는 패했다. 전쟁을 계속하면 요가 고려를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요나라 내부의 정치적 문제도 걸림돌이었다. 소손녕의 주군이자 처남인 성종은 아직 스무 살 남짓한 어린 황제로 권력 기반이 불안했다. 그의 바람막이 격인 소손녕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고 있으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서희가 이런 속사정까지 간파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소손녕은 되도록 빨리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 귀환하려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서희가 봉산의 소손녕 진영으로 찾아갔을 때, 소손녕은 짐짓 거만한 태도로 서희의 기를 죽이려 했지만, 적진 한가운데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대등한 예를 요구하는 서희의 모습에 오히려 감탄했다.

소손녕은 “고구려의 땅을 내놓으라는데, 사실 고려는 국명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정당한 계승자다”라는 서희의 주장을 굳이 반박하지 않았고, “귀국에 사대할 뜻은 있으나 여진이 길을 막고 있는 게 문제”라고 강동 6주를 양보하라는 주장에도 (본국의 허락을 받은 후) 동의했다. 고려 땅을 빼앗기는커녕 도리어 자기 땅을 내주다니 서희가 훌룡했다기보다 소손녕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강동 6주는 원래 여진족의 무대였고 거란이 최근 여진을 정벌하면서 일시적으로 점령한 땅이었다. 따라서 그곳을 애써 지키다가 여진이 땅을 되찾으려고 고려와 합세할 빌미를 주느니, 아예 고려에 넘겨서 고려와 여진이 그 땅을 놓고 다투느라 요를 공격할 짬이 나지 않도록 하자는 게 소손녕과 요 조정의 계산이었을 것이다.

이 협정으로 요는 더 이상 뒤를 걱정하지 않고 송과 대결하게 되었고, 고려의 종주국임을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고려는 태조가 적대시했던 거란과 손잡고 송을 배신하게 됨으로써 다소 명분을 잃었지만, 전쟁을 하지 않고도 오랜 숙원이던 압록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입했지만 그 사이에 강동 6주에 쌓은 요새들이 단단한 방어막을 구축해 거란군 격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서희-소손녕 협정은 두 나라에 모두 이익이 되었고, 특히 고려는 전쟁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으로 큰 성과를 거둔 역사적으로 드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p.76~78

소련을 자극할 위험과 조약의 권한 문제 때문에 나토 차원에서 한국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소규모나마 병력을 파병하고 덴마크, 이탈리아, 노르웨이도 의료 지원단을 보내는 등 성의를 보인 것은 나토 회원국의 입장이 작용한 결과였다. 아울러 터키가 1만 5,000명, 그리스가 1만여 명의 병력을 한국에 파견해 미국, 영국, 캐나다에 뒤이은 대규모 파병 국가가 된 저변에는 나토 회원국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 대가였는지 한국전쟁에서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낸 두 나라는 1952년에 마침내 첫 추가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p.268

하지만 매년 진행되는 삼국의 합동 훈련과 군 인사, 기술 교류의 규모는 나토나 한미 동맹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으며, 최근 미 국방부에서는 “유사시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은 안주스이고, 그 다음이 나토”라는 보고서를 내놓아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은 신뢰도가 낮은 동맹 대상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미국이 안주스를 가장 신뢰하면서 그 범위를 한국, 일본, 대만 등까지 확대하지 않는 까닭은 ‘똑같이 영어를 사용하는 신대륙 국가이며 서구 문명의 일원’이라는 유대감도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길 권유하고, 그리하여 안주스와 비슷한 동북아 삼각동맹 체제 수립을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한일 간의 뿌리 깊은 적대감이 그런 가능성을 차단했다. 결국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 동맹 체제는 안주스 외에 한미 동맹, 미일 동맹 등 개별 동맹의 집합으로만 이루어져 오늘날 아시아가 유럽처럼 하나의 연합체를 이루지 못하고 각자 제 갈 길을 가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p.273,274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1950년 10월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요동치더니, 이후로는 좀처럼 변화가 없는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이미 1951년 초, 미국 정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군사 개입 자체가 실수였다’는 인식 아래 하루바삐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려고 휴전협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세계 전략상 한국은 애써 지킬 필요가 없는 변방 중의 변방인데, 국지전으로 시작한 전쟁이 이미 중국을 끌어들였고 소련도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남는 것 없고, 손해가 나도 엄청나게 날 장사’는 빨리 때려치우는 게 상책이라 여겼던 것이다.

1952년 말, ‘한국전쟁 종식’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미국의 발 빼기 작업은 가속이 붙었다. 이렇게 되자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노심초사했다. 남한의 전력이라곤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데, 미국이 물러난다면 당장에라도 북한과 중국이 밀고 내려와 한반도를 적화통일할 것이 아닌가? 이승만은 어떤 꼼수를 써서라도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3년 6월 18일에 미국과 전혀 의논 없이 2만 5,000여 명의 ‘반공 포로’를 전격 석방하는 꼼수를 썼다. 며칠 전에 포로들을 송환받기로 미국과 약속했던 북한은 당연히 격분했고 휴전협정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역시 노발대발한 미국 정부 인사들은 한때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그렇게 되면 한국은 완전한 혼란 상태로 빠질 것이고, 미국이 발을 뺄 수도 머물 수도 없는 더욱 고약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어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안주스의 예를 따라 안보 동맹 조약을 맺고, 휴전 후에도 여차하면 다시 한국을 돕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승만도 그에 만족하고, 휴전협정 체결 후인 1953년 8월 8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안주스가 모델이 된 만큼 두 조약의 조약문도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상대국에 대한 공격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할 것을 명시한 전자의 제4조와 후자의 제3조, 비준 절차를 규정한 전자의 제9조와 후자의 제5조, “이 조약은 무기한이며, 어느 한쪽이 파기를 원한다면 1년 전에 미리 통보한다”는 내용의 전자 제10조, 후자의 제6조도 아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뚜렷한 차이점도 있는데, 가령 안주스 조약의 제2조는 조약 당사국들의 각자 방위력 증강과 집단 방위력 증강을 명시하고 있지만 (북대서양조약의 제3조도 이와 비슷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비슷한 내용이없다. 대신 한미상호방위약 제4조 “미국은 자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 영토와 그 부근에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대한민국은 이를 허락한다”는 안주스 조약에는 없는 내용이다. 주한 미군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이 내용은 안주스 조약이 동등한 국가 간의 안보 동맹인 데 반해, 한미 동맹은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는 형태의 동맹이라는 본질적 차이를 나타내준다.

상호 방위 동맹으로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안주스 조약 제4조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는 상대방이 공격을 받았을 때 “스스로의 헌법 절차에 따라 행동한다”라고 규정해 북대서양조약 제5조처럼 자동적으로 군사 개입이 이뤄지지 않도록 해놓았다. 말하자면 한국이 다시 남침을 당하더라도 미국 의회에서 전쟁 결의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미국은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

이승만은 자동 개입 조항이 없는 점과 제6조에 일방적으로 동맹을 파기할 가능성을 열어 둔 점이 끝내 못마땅해 끝까지 재고를 요청했지만, 미국은 안주스나 필리핀과의 동맹을 예로 들며 입장을 관철시켰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발목을 잡혔지만, 공연히 연루될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수립된 한미 동맹은 이후 미국은 몰라도 한국의 현대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 한국은 정치·군사·경제·문화적으로 미국에 일방적으로 기대고 있는 모양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p.274~277

함규진

1969년 서울 생.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왕의 투쟁》, 《왕의 밥상》,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다》 등의 책을 썼고, 《죽음의 밥상》, 《대통령의 결단》, 《정치질서의 기원》 등의 책을 번역했다. 네이버캐스트와 《인물과사상》 등에 〈조약사〉, 〈장정의 역사〉, 〈유대인 의 초상〉 등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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