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목소리

2015 독서목록 106/139 (2015.12.13)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새잎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한가, 개인이 희생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가? 내가 배우고 자라던 시기에는 국가가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배웠고, 국가와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것보다 일부의 개인들이 희생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시기를 살아왔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것과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것에 대한 판단기준은 사회가 전체주의적 성향을 띄느냐 개인의 권익에 초점을 맞추느냐의 문제일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전체주의적 성향의 권력자들이 개인의,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고, 그 희생을 통해 권력의 이익을 추구했다면 정말 최악일 것이다.

1986년 4월 26일 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통해 구 소련 체제의 강력한 은폐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희생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사건 직후 고준위 방사선 앞에서 작업 로봇은 오작동을 일으키기에 해체작업에는 군인들을 동원했다. 그들에게 위험의 구체적인 사실은 알리지 않았고, 특근 수당과 훈장을 통한 영웅 칭호로 그들을 독려했고, 그 얼마 후 그들 대부분은 엄청난 방사선 피폭으로 죽어갔다. 사회를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일반 국민에게 방사선 오염의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국가를 신뢰한 대부분의 국민들은 방사선에 고스란히 오염됐고,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던 고위층들은 여러 가지 대비를 했다. 사고가 난 후 5년뒤 소련의 연방은 해체되었고, 사고 10년 뒤 체르노빌에 인접한 벨라루스의 평균수명은 55세가 되었다.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한가, 위험을 제대로 알리고 개인이, 국민이 희생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가?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에서 21세기 최악의 원전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부터 위험을 은폐하려는 일본 정부와 해당 회사의 태도가 꾸준하게 문제가 되었다. 체르노빌에 비해서 후쿠시마의 방사선 누출 정도는 적지만, 보유하고 있는 핵연료의 양은 10배에 달하며, 아직도 계속해서 원전에서 방사선이 유출되고 있다. 일본은 구 소련처럼 사람을 투입할 수 없어서 봉인이 제대로 못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일본에 가장 인접한 국가가 우리 나라인데, 일본 정부가 위험성을 은폐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우리 정부는 국민에게 방사선 오염의 위험을 지나칠 정도로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개인이 위험에 빠지는 것 보다는 사회의 안정이 더 중요한 시대인가 보다. 언제쯤이면 한 사람의 생명을 지나칠 정도까지 생각하는 시대가 될 것인가?

한줄요약 : “체르노빌의 순진하고 죄없는 희생자들”

★★★★★


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것은 죽음이야. 아직 누구도 비켜가지 못했어. 땅은 거절하는 법이 없지.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죄인도 받아들이지. 그것 말고는 이 세상에 정의란 없어. p.58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결국은 모두 죽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운명론, 너무 가벼운 운명론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예를 들어, 첫해 동안 텃밭에서 난 음식은 아무것도 먹으면 안됐어요. 그대로 먹었고, 통조림도 담갔어요. 하필 얼마나 농가가 잘 됐는지! 오이, 토마토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만 해봐요. 안 된다니, 무슨 말이예요? 맛만 좋은데요. 그리고 먹고 난 뒤에 배도 안 아파요. 그리고 아무도 어둠 속에서 ‘빛나지’ 않았어요. 우리 옆집 사람들이 그해 근처 숲에서 베어 온 나무로 바닥을 새로 깐 다음 방사선 수치를 검사해 보니 허용치의 100배였어요. 그래도 그대로 두고 그렇게 살았어요. 뭔가 되겠지, 어떻게 되겟지, 우리가 뭘 어쩌지 않아도 알아서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살았어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전문가에게 가서 검사를 받았어요. 정상치보다 수십 배 더 높은 방사선량이 검출되었지만, 나중에는 검사도 그만뒀어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구먼, 아, 그놈의 과학자들이 지어낸 거야!” 모든 것이 그대로 돌아갔어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사람들은 살던 대로 살았어요. 그들에게는 직접 키운 오이를 못 먹는 것이 체르노빌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어요. 아이들은 여름 내내 학교에서 지냈고, 군인들이 학교를 세제로 닦고, 근처 흙을 한 겹씩 벗겨 냈어요. 가을이요? 가을에는 학생들을 비트 캐러 보냈어요. 직업훈련학교 대학생들도 밭으로 데려왔어요. 모든 사람을 다 끌고 왔어요. 체르노빌은 밭에서 감자를 안 캐고 남겨두는 것보다는 안 무서워요. p.182,183

방사능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내에서 그렇게 살아가다가 죽어가니까 말이다. 후쿠시마는 체르노빌보다 더 하다는데, 우리 정부도 적극적으로 정보를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원자로 지붕 위에서 일했던 군인들은 또 어떻소? 사고 뒤처리를 위해 210개 부대가 투입됐고 총 34만 명의 군인이 동원됐고. 그 어디보다도 뜨거운 곳은 지붕이었소. 거기서 작업했던 군인들은 납으로 만든 앞치마를 보급받았지만, 방사선은 아무런 가림막도 하지 않은 하반신을 향했소. 그런데 그들은 평범한 방수면 장화만 신고 일했소. 하루에 1분 30초에서 2분씩 지붕으로 올라갔고. 그 후에 이들은 상장과 200루블의 상여금을 받고 강제 제대했소. 그리고 무한하고 광활한 우리 조국의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들은 지붕 위에서 연료와 원자로에서 나온 흑연, 시멘트와 철근 조각을 긁어냈소. 들것에 싣는 데 20~30초, 그리고 ‘쓰레기’를 지붕에서 버리는 데 20~30초, 특별히 제작된 들것만 해도 무게가 40킬로그램이나 나갔소. 그러니 미친 듯한 속도…… 상상이나 되오? 키예프에 있는 박물관에 군모 크기의 흑연 모형이 있는데, 그 모형이 진짜였더라면 60킬로그램 정도였을 거라는 설명이 붙어 있소. 그만큼 밀도가 높고 무겁다는 말이오. 원격 조정 기계는 높은 방사선 준위 때문에 전자회로에 오류가 발생해,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전혀 다르게 움직였소. 그러니 가장 안정적인 ‘로봇’은 군인이었소. 그드에게 군복 색깔대로 ‘녹색 로봇’이라는 별명을 붙였소. 무너진 원자로의 지붕을 3천600명의 군인이 거쳐 갔소. 잠은 땅바닥에서 잤는데, 첫날부터 천막 바닥에 짚을 깔고 잤다고 나에게 얘기해주었소. 그 짚은 원자로 옆 건초더미에서 가져온 것이었소. p.237,238

체르노빌의 사고가 수습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작업은 목숨을 걸고 작업을 한 군인들 덕분이었다. 물론 그 군인들이 얼마나 위험한 줄은 모르고 들어갔던 것이 구 소련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후쿠시마는 아직도 마무리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Све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ексиевич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1948년 5월 31일 우크라이나 서부의 스타니슬라브(現 이바노-프란콥스크)에서 우크라이나인 어머니와 당시 군인이던 벨라루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시예비치의 아버지는 퇴역 후 가족과 함께 벨라루스의 작은 마을로 돌아와 부부가 함께 교사로 근무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재학 중 학교 신문에 다수의 시와 산문을 기고했다. 졸업 후 기숙사 보모, 농촌지역 교사로 2년간 재직하며 소련 대학 진학을 위해 필요한 ‘고용증명서’를 1965년 취득했고, 1966년에는 고멜 시 나로블의 지방 신문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민스크에 위치한 벨라루스 국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72년 대학졸업 후 알렉시예비치는 브레스트 지방 베레사의 지역신문사 기자와 공립 학교 교사로 동시에 근무했다. 이듬해 민스크 지역신문에 취직한 알렉시예비치는 저널리즘에 온전히 종사하기로 결정했다. 1976년에는 문학잡지 『네만』에서 통신원으로 시작해 곧 보도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에 첫 서적 『나는 마을에서 떠났다』를 완성했다. 그러나 시골 주민의 도시 이주를 금한 소련 정부의 융통성 없는 여권정책을 비판한 내용으로 인해 출판은 금지되었다. 훗날 알렉시예비치 자신도 ‘보도성이 너무 짙다’며 책의 출판을 반대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알렉시예비치는 단편, 에세이, 르포 등 다양한 문학장르를 시도했다. 당시 벨라루스 작가 알레스 아다모비치가 ‘집단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영역을 개척하던 중이었다. 아다모비치는 알렉시예비치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하는’ 자신만의 문학방식을 모색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이 방식의 궁극적 목표는 일상의 콜라주 형태로 개인의 목소리의 합창을 만드는 데 있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1983년 탈고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다』에서 처음으로 이 방식을 도입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세계2차대전에서 전투원, 당원, 공무원으로 참전했던 소련 여군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들의 전쟁 중과 후의 운명을 연구했다. 그 후 2년간 책의 출판을 위해 검열과 투쟁하면서 알렉시예비치는 ‘대조국전쟁(세계2차대전의 러시아식 표현)의 영광에 먹칠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소위 ‘반공 태도’로 인해 일자리마저 잃었다. 책은 소련에 페레스트로이카가 도래한 1985년에야 모스크바와 민스크에서 동시 출판되었다 (1987년 독일어, 1988년 영어 번역본). 러시아 국내에서만 2백만 부 이상 팔리며 독자와 비평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작가는 책을 연극과 기록영화로도 각색하였고 영화 버전은 라이프치히 국제 기록영화 주간에서 ‘은비둘기상’을 수상했다.

알렉시예비치의 두 번째 저서 『마지막 증인』도 소위 ‘이념적 가치의 부재’라는 이유로 출판이 미뤄지다 1985년에 벨라루스에서 빛을 보았다 (1989년 독일어 버전 『Die letzten Zeugen』).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세계2차대전과 스탈린 시대를 겪은 여성과 어린이의 시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의 고통스러운 경험도 묘사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부가 주도한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운동 덕분에 알렉시예비치는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다수의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완성했고, 영화감독과 협업했으며 유명한 모스크바 연출가 아나톨리 에프로스를 위한 작품 등 다양한 시나리오와 극본을 집필했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알렉시예비치는 차기작 『아연 소년들: 아프간 전쟁으로부터 울리는 소비에트 목소리』(1989)에도 상당한 시간을 들였다. 작가는 아프간 전쟁 참전군과 ‘아연 소년들’이라 불린 전사자(이들의 유해는 아연 관에 담겨 돌아왔다)의 어머니와 5백 건 이상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책은 10년 간 지속되었던 아프간 전쟁을 비신화하는 데 기여했고, 이로 인해 알렉시예비치는 1992년부터 여러 차례 민스크 법정에 섰지만 유죄 판결은 받지 않았다.

1993년에는 다음 작품 『죽음에 매료되다』를 완성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소련 제국의 종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자살과 자살기도를 분석했다. 그 후에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 참사를 다룬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체르노빌의 목소리』(1997)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참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을 심리적으로 묘사했다.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는 작품을 ‘애도와 고발로 이뤄진 가공할 만한 진혼곡’이라 평가했다. 실제로 핵 ‘사고’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끔찍한 보고서로 이뤄진 이 책은 유사 시 전세계 인류를 위한 지침서가 되었다. 벨라루스 현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센코가 집권한 1994년부터 알렉시예비치의 책은 그녀의 모국에서는 더 이상 출간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학교 교과과정에서도 삭제되었다. 1998년 라이프치히 유럽이해 도서전에서 수상한 알렉시예비치는 상금으로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러시아어판을 구입해 벨라루스로 반입했다.

바로 이 시기부터 알렉시예비치에 대한 벨라루스 당국의 공격이 심화되었다. 그녀의 전화가 도청되었고,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으며 CIA와 결탁한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2000년에는 국제피난처도시네트워크(ICORN)로부터 보호를 제안 받아 프랑스 파리에서 몇 년 동안 거주했다. 그 후에는 스톡홀름과 베를린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작가는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베를린 예술가 프로그램’에 초빙되어 자신의 최신 저서를 집필했다. 2011년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 독재정부의 핍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민스크로 귀국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작품활동 초기부터 ‘목소리의 소설’이라는 자신만의 문학장르를 개척했다. 이에 따라 그녀의 모든 작품은 세계2차대전 시기부터의 러시아 역사와 함께 진행한다. 독일어로 출판된 그녀의 최신작 『Secondhand-Zeit. Leben auf den Truemmern des Sozialismus』 (2013년 9월)는 최근 몇 년간 사회적 격변을 겪은 이들의 정체성 모색 과정을 반영한다. 매 작품마다 알렉시예비치는 많은 인터뷰를 통해 우선 전반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 후에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각 개인에게서 얼마나 많은 인간성을 찾을 수 있고 그 개인 속의 인간성을 보호’하는 작업을 한다. 정서적 역사에 대한 알렉시예비치의 문학적 연대기를 접한 많은 이들은 그녀를 구 소련 국가 거주자들의 ‘도의적 기억’이라 칭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35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아울러 다수의 연극, 라디오 드라마,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사용된다. 작가는 폴란드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 문학보도상(2011)과 독일 도서전 평화상(2013), 2015 노벨문학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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