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2014 독서목록 69/149 (2014.6.22)


[불안] — 알랭 드 보통/은행나무/ 원제 : Status Anxiety

개인적으로 나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가치관에 충격을 받아 다시 나를 돌아보고, 내면을 바라보는 인식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외부세계에서 문제를 찾기보다는 내면을 성찰하게 되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있구나 하는 행복감에 휩싸인다.

두번째는 외부세계에 존재하지만 내가 몰랐던 지식을 알게되면서 조각조각 이해하던 외부 세계의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때이다. 이럴때면 왠지 내가 지식인의 그룹에 한발한발 다가서는 것 같고, 책을 통해 위대한 지성을 만난다는 행복감이 든다.

그리고 세번째는 책을 통해 뭔가 감성적으로 자극을 받아 나도 이렇게 해봐야겠구나 하는 동기부여를 받을 때이다. 이렇게 무엇인가 결심을 하게 되면 비록 완전한 변화는 이루지 못해도, 그런 시도를 통해서 조금씩 삶의 방식이 좋아지고 있다는 행복한 마음이 생긴다.

알랭 드 보통은 [영혼의 미술관]이라는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났고, 소설가지만 상당한 박식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드는 생각은 알랭 드 보통은 정말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약력을 보니 캐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하니, 나름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을 것도 같다. 알랭 드 보통을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갖게되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감, 시기심, 욕망 등에 대해 역사와 철학, 예숙, 정치, 종교관 등을 통해서 폭넓은 성찰을 보여주며, 그런 불안감에 살아가지 않게 해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바라보던 세계관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그동안의 나를 다시되돌아보며, 앞으로의 내가 살아가야 할 방식에 대해 성찰해보게 되었다.

책이 일단 내용에 빠져들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 있지만, 일반적인 인문학 책보다는 평이한 난이도다. 초반에 책을 읽으면서 드는 잡념을 극복하고, 저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해서 책을 읽어 낼수 있다면, 이 책을 당신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크게 영향을 주는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에세이들은 다 읽어볼 생각이다.

한줄요약 : “삶을 성숙하게 산다는 것”

★★★★★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며, 남들보다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를 주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이, 이 갈망도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 p.9

우리는 사회적 성취에 매진하고 있고, 또 성공학이나 기타 자기계발이라는 장르가 활황을 맞고 있는 시대를 살고있다.

흔히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이름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 반대의 경우를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정체성을 가진, 누구 못지않은 존재 권리를 가진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다양한 집단에 대한 대접의 질적 차이를 전달하는 데는 편리하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밝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p.16

서양의 사회에서도 이런 표현을 쓰나보다. 나는 내가 이름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줄 알았는 데, 이렇게 반평생을 살아보니 그냥 이름없는 사람으로 인생을 살아갈 것 같다. 젠장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대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p.21

내가 다른 사람의 인정을 그렇게도 목말라 하는 것이 나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일 수 있겠구나. 내가 좀 더 성숙해져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 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 해도 우리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 p.22

이렇게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무시라는 작은 바늘에 나도 얼마나 취약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얼마나 작은 부분에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드러내고 있는가?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이것을 줄인 말이 ‘s.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속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경멸하려는 의도를 가진다는 것, 즉 그 사람의 조롱받아 마땅한 매우 유감스러운 차별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한다는 것 또한 분명해졌다. 이 문제에 대한 선구적인 작업인 <<속물에 관한 책Book of Snobs>>(1848)에서 윌리엄 새커리는 25년간 속물이 “영국에 철도처럼 퍼져나갔으며, 이제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어디를 가나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새로웠던 것은 속물근성이 아니라, 속물들의 그런 전통적인 차별행위를 이제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 — 적어도 새커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 평등 정신이었다. p.28

속물의 어원이 이렇구나.

두려움은 세대를 따라 전해진다. 모든 학대 행위에 적용되는 패턴이지만, 속물도 속물을 낳는다. 나이든 세대는 낮은 계급에 속하는 것이 곧 재앙이라는 자신의 고정 관념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준다. 자신의 후손이 낮은 지위(자신의 낮은 지위와 남들의 낮은 지위)가 곧 무가치한 존재로 연결되지는 않고, 또 높은 지위가 곧 훌륭한 존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내적인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감정적 토대를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스파이서 윌콕스 집안사람들이 가네요, 엄마!” 1892년 <<펀치Punch>>에 실린 만화에서 봄날 아침에 하이드 파크를 걷던 딸은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안 되지, 얘야.” 어머니가 대답한다. “우리를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
엄마가 이런 발언을 통해 드러낸 자신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녀가 스파이서 윌콕스 집안사람들에게 앞으로 좀 더 원숙한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는 희망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두려움에서 시작된 속물근성의 순환은 중단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p.35,36

참, 나도 이런 속물 근성이 있겠지만, 정말 어이없는 속물근성이다. 이런 속물근성으로 부터 자유로워지자. 인식의 전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적 궁핍을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p.55

아주 적절한 표현, 우리의 삶이 과연 과거의 역사속에서 비참한 삶과 비교해서 월등히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치적 평등과 함께 사회적, 경제적 기회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150년 동안 허공에 맴돌다 마침내 1776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극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을 발견했다. 이 전쟁은 사회가 지위를 부여하는 기초를 바꾸는 데 서양 역사상 다른 어느 사건보다(그 뒤에 이어진 프랑스 혁명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 결국 가문의 연조와 명성에 기초하여 지위가 주어지던 — 따라서 자기 발전의 기회가 제한되었던 — 세습 귀족 계급 사회는 각 세대의 성취(주로 경제적 성취)에 따라 지위가 부여되는 역동적인 경제 중심 사회로 이동했다.
1791년 지리학자 제디디아 모스는 뉴잉글랜드 이야기를 하면서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적어도 이웃만큼은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모든 인류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또는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고 기록했다. 미국의 예절은 민주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인은 고용주를 ‘주인님’이나 ‘마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귀하’나 ‘각하’ 같은 존칭은 금지되었다. 미국의 모든 주는 장자 상속권을 폐지하고, 딸과 미망인에게도 똑같은 소유권을 부여했다. 의사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램지는 1778년 7월 4일에 읽은 <<미국 독립의 장점에 관한 연설Oration on the Advantages of American Independence>>에서 혁명의 목표는 “계급과 조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직의 기회를 부여하는”사회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설사 가장 가난한 사람의 아들이라 해도 국가의 고삐를 쥘 수 있다. 그가 그런 중요한 자리를 감당한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서전에서 자신은 평생 특권만 누릴 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낡은 귀족 계급을 대체할 “덕과 재능을 갖춘 귀족 계급을 위한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술회했다. p.63,64

세계 정치사에서 현대의 체제에 가장 충격적인 영향을 준 미국건국.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는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p.78

동양철학에서 주장하는 논리와 많이 닮아있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서양철학자들이 동양철학에 심취하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동양의 선현들의 지혜가 결코 서양의 그것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스미스에 따르면, 부유한 사람들이 교역을 하고 산업을 발전시킬 충분한 기회를 얻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잘나고 게으른 사람들이 엄청난 낭비 욕구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장인과 농민이 요구하는 것까지도 풍부하게 공급해 줄 수 있다.”
이것은 부자들이 예상도 못하던 즐거운 이야기였다. 그들은 기독교 초기부터 경제 이론에서 악당 취급을 당하다가 이제 영웅으로 새롭게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그들 밑의 모든 사회계급을 돕는다는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주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으며, 그들 뒤에서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를 먹여 살렸다. 그들은 심지어 개인적으로는 남들에게 불쾌하게 굴면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탐욕이 크면 클수록 좋았다. p.97

애덤 스미스의 주장이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되었고, 바람직하지 않는 부분들도 상당히 존재한다.

경제적 능력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불운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었다. 따라서 빈자들은 이제 부자들의 자선과 죄책감을 대상이 아니었으며, 자수성가한 강건한 개인들의 눈에는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신의 저택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들이 떠나온 가난한 무리를 가엾게 여기는 척 하며 과거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p.109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자, 무능력자, 젠장.

생산 라인 가동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지면 가동을 중단하기도 하는데, 이 때 기계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에너지자원은 절벽에서 뛰어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의 가격이나 존재를 줄이려는 시도에 감정으로 대응하는 습관이 있다. 노동자는 화장실에 들어들어가 흐느끼기도 하고, 실적 미달에 대한 두려움을 술로 달래기도 하며, 해고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면 지위를 부여하는 격투장 내에 공존하는 두 가지 요구가 드러난다. 하나는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을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요구다. 또 하나는 피고용자가 경제적 안정, 존경, 종신직을 갈망하도록 이끄는 인간적 요구다.
이 두가지 요구가 오랜 기간 이렇다 할 마찰 없이 공존할 수도 있지만, 이 둘 사이에서 진지하게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 때문에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임금에 의존하는 모든 노동자의 삶에서 불안이 떠날 수가 없다
노동과 자본 사의의 투쟁은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이제 마르크스의 시절처럼 맹렬하지 않다. 그러나 노동 조건의 향상과 고용 입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행복이나 경제적 복지가 부차적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과정에서 도구 노릇을 하고 있다. p.133,134

인간의 노동에 신성한 가치를 부여한 주장들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그런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본의 논리는 비참한 인간의 삶을 방치한다.

로마 제국이라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황제이자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167)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하여 하는 말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며,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철학자 황제는 그런 주장으로 명예에 기초하여 사람을 평가하던 당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한다.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금, 상아, 작은 꽃 한 송이는 어떤가?” 마르쿠스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p.148,149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현대인이 고대인보다 뛰어나지 않을수 있다. 진화론에 입각하면, 많은 성인들이 지혜와 가치를 발전시켜왔지만 전체적인 인류의 정신적 역량을 결코 발전하지 않았다. 내가 인식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전체 대중의 정신역량을 높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에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p.157

나의 내부의 양심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의 내부의 양심은 어떤 것으로 채워져있을까?

나의 실패를 다른 사람들이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가혹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일에서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의 물질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이 실패를 바라보는 냉정한 태도, 실패한 사람을 ‘패배자’로 지목하는 집요한 경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패배자’라는 말은 졌다는 의미와 더불어 졌기 때문에 공감을 얻을 권리도 상실했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는 냉혹한 말이다. p.189

충분한 해법이 된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자신이 사는 사회의 이상 때문에 불안이나 실망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충 살펴본 지위의 역사에서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것이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집단이 스스로 존엄을 얻고자 이전 체제에서 이익을 보던 사람드로가 맞서 공동체의 명예 체제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집단은 투표함, 총, 파업, 때로는 책을 이용해 높은 지위를 누릴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공동체의 관념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p.227,228

사회적 관습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성공한 사람이란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상업적 세계의 무수한 분야(스포츠, 예술, 과학 연구를 포함하여)의 어느 한 곳에서 자신의 활동(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을 통해서 돈, 권력, 명성을 축적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 사회의 기반은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 성취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거둔 것이라고 이해한다.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다. 다른 미덕, 예컨대 겸손이나 경건은 이제 눈길을 끌지 못한다. 성취는 이제 과거 사회에서처럼 ‘행운’이나 ‘섭리’나 ‘신’ 때문이라고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 세속 사회의 개인의 의지력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적 실패 역시 능력에 따른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실업자는 전사들의 시대에 육체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처럼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 돈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된다. 돈은 그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다. 그 돈으로 살수 있는 물건도 마찬가지다. 쿠베오 부족의 재규어 이빨처럼 부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이 훌륭하다는 증거이며, 낡은 차나 허름한 집을 소유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증거다. 부는 단지 높은 지위를 제공할 뿐 아니라, 늘 변하는 광범위한 소비재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여 행복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장려되기도 한다. 그런 소비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전 세대의 제한된 삶을 연상하며 동정심과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p.229,230

현대사회의 능력주의의 가장 큰 맹점이다. 물론 아직까지 나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러스킨과 슈보다 300년 전에 미셸 드 몽테뉴는 비슷한 맥락에서 삶을 결과들을 결정하는 우연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변덕스러운 의지에 따라 우리에게 영광을 베푸는 우연”의 역할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우연이 능력보다 앞서서, 한참 앞서서 행진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해 본다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창피해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힘 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사람은 종자를 여럿 끌고 다니고, 아름다운 궁에 살고, 큰 영향력을 행사 하고,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 그를 둘러싼 것이지 그의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죽마(竹馬)를 떼어내고 그의 키를 재보라. 부와 장식을 벗기고 벌거벗은 몸을 보라…… 그에게 어떤 종류의 영혼이 있는가? 그의 영혼은 아름다운가? 그 영혼은 능력이 있고, 행복하게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는가? 그 영혼의 부는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빌려온 것인가? 운은 관계가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상업적인 능력주의의 이상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 제기에서는 공통적으로 돈처럼 우연하게 분배되는 것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 하지 말라는 호소를 읽을 수 있다. 부와 미덕을 교조적으로 연결시키는 관행을 중단하고,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반드시 죽마를 떼어내라는 것이다. p.238,239

영혼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 내 내면의 본질적인 나와 대화를 나누고 평가해 볼 수 있는 것. 이것이 나를 만나는 방법이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말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p.247

완벽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지만,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는 것인가?

공동체에서 제공하는 주택, 운송, 교육, 보건의 수준이 낮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피해 단단한 벽 뒤에서 살게 된다. 평범하다는 것이 존엄과 안락에 대한 중간적인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일 때는 높은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p.308

우리의 사회가 좀 더 복지적인 사회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