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역사기행 #1

(나의 궁궐 답사기 조선의 상징 / 제1 정궁 경복궁을 살펴보다.)

  1. 경복궁이란 우리민족에게 어떠한 상징물인가?

경복궁은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어 조선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가 위함으로 보인다.

경복궁은 조선왕실의 상징이자 조선 그 자체였다.

때문에 일제는 국권을 침탈하자마자 제일 먼저 경복궁을 해체하였다.

2. 경복궁 탄생부터 소실 그리고 중건까지..

조선 왕실의 이씨는 전주이씨기 때문에 전주에 전주부성의 경기전에 조선 이씨왕실의 궁이 있었다. 그러다가 태조 이성계 즉위 3년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의 가장 중심인 종로에 경복궁을 중건하게 된다. 경복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경복궁은 궁 자체가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는데 사방으로 4개의 문이 있었고 궁안에 여러채의 건물들이 위치해있었다.

경복궁의 문

1) 광화문 : 경복궁의 정문이다.

2) 건춘문 :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 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3) 영추문 : 경복궁의 서쪽문으로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4) 신무문 :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이다.

경복궁내 건물

1) 근정전 :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하였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좌우로는 복도 건물인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2) 사정전 : 경복궁의 편전으로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이다.

3) 천추전 : 편전일곽의 서편전에 해당하는 천추전으로 고종 2년(1865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4) 강녕전 : 왕의 침전으로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거나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이다.

5) 수정전 : 세종대왕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은 건물로 고종 초기에는 침전으로 사용되고, 편전의 역할을 하였으며, 갑오개혁 시절에는 군국기무처 및 내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6) 경회루 :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7) 교태전 : 왕비의 침전이다.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아미산”이라고 한다.

8) 아미산 굴뚝 :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9) 자경전 :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자경전은 대비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잠을 자는 침전 건물로, 총 44칸 규모이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이라는 침실을 두고 중앙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 또, 동남쪽에는 다락집인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주변에는 수십 개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정궁이라 할 수 있는 건물로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이다.

10) 향원정 :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지은 2층의 정자이다.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구름다리가 있다.

11) 건청궁 : 고종 10년(1873년)에 지은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2) 집옥재 : 협길당, 팔우정과 더불어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13) 태원전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로 후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임.

14) 자선당과 비현각 : 자선당과 비현각은 동궁의 주 전각이다.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15) 동십자각 :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각루이다.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세운 것이며,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헐려버렸다.

등이 위치해 있었으며 이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고 한다. 경복궁은 1차적으로 임진왜란(1592년)으로 인해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 그뒤 몇백년이 흐른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조선황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다시 세운 경복궁이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고 한이 서렸다.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일제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건을 왕이 궁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뜻으로 아관파천이라 일컬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게 되자 일제는 조선의 상징물이었던 경복궁을 조직적으로 해체하였고 경복궁의 중심이었던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3. 경복궁의 눈물

원래 왕이 살던 궁은 일반인들이 관람 할 수 없는 곳이다.

1910년 대부터 관람료를 받고 공개되기 시작되었는데 이미 그 때도 경복궁의 절반이 사라진 뒤였고 더 많은 훼손이 뒤따랐다. 원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문에 불타버리고 농업국가였던 조선은 백성을 먹여 살리기 급급해 왕실을 재건할 틈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흥선 대원군에 의해 복원되었고 당시에 경복궁은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일제 시대 경복궁]

일제는 주요 건물 몇 채만 빼놓고 경복궁의 대부분의 건물을 헐거나 팔아치워버렸다.

그리고 왕이 정치를 하던 근정전 앞에 조선 총독부를 세워 조선 왕실을 철저히 부정했다.

일제는 이런 저런 이유로 30년 만에 경복궁의 대부분을 훼손했다.

1923년 전차 운행선 연장에 방해된단 이유로 광화문 옆 양 옆에 있는 망루 중 하나인 서십자각을 헐어버렸다. 지금의 경복궁 오른쪽에 똑 떨어져 있는 건물은 동십자각으로 당시에는 두 망루가 경복궁 담장 끝에 위치해 있었다. 서십자각이 헐린 일은 서막이었을 뿐이다.

일제는 경복궁의 정문이었던 광화문을 총독부를 가리고 있단 이유로 철거해버렸다. 광화문이 다시 원래 모습을 찾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광화문 복원 당시 조선인들의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남산을 향해 있던 광화문을 다시 조선 왕조 시절에 관악산을 보게 하기 위해 방향까지 옮겼다.

광화문 철거 후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팔려나갔다. 조선의 왕실 건물들을 요릿집이나 일본의 호텔로 팔려나갔다.

자선당은 왕세자와 세빈이 거처했던 동궁인데 일제 시대 오쿠라 재단의 오쿠라 호텔에 팔려 조선 박물관 용도로 쓰이다 관동 대지진 떄 소실되었다. 그 후에 기단만 돌아와 지금은 주춧돌만 쓸쓸히 남아있다. 전에 경복궁에 갔을 때 그 기간을 봤는데 그런 뒷애기가 있는지 몰랐었다.

[경복궁의 후원]

보통 후원하면 창덕궁 후원을 떠올리지만 경복궁에도 큰 후원이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이다.

4. 경복궁에 대한 나의 견해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현시대 사람들의 인식 속의 궁은 관람객을 위한 일종의 야외 박물관이다. 사실 경복궁은 일제 시대에 철저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눈물이란 제목이 어울리는 것 같다.

최근에 경복궁에 2번 방문한적이 있었다. 덕수궁과 경복궁을 둘다 다녀왔는데 덕수궁에 비해서 경복궁은 걷다가 지칠정도로 매우 규모가 컸다. 헌데 건물이 드문드문 있고 빈공터가 매우 넓은걸 발견했다. 때문에 원래 이런 궁궐인가 보다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알고보니 그 넓고 빈공간들에는 다 건물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하긴 500년을 역사를 간직해온 한 나라의 궁궐이 그렇게 작았겠는가? 국가의 힘이 약해 궁도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나라의 역사가 속상했고 많은 경복궁관람객중 경복궁을 방문한 일본 관람객이 자신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애기해서 화가 났다. 하지만 그 관람객은 일본의 왜곡된 역사에 대한 책을 쓴 교수이며 일본 정부는 국민들에게 일본이 조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을미사변이 있었던 건청궁에서 그들은 묵념을 올렸다.

빈공간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규모가 굉장했기 때문에 이정도면 한 60%정도는 복원이 되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재 경복궁은 25%수준밖에 복원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경복궁의 90%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슬픈 진실이고 나 역시 경복궁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까진 몰랐던 사실이다. 두 번째 방문을 했을때야 알게된 사실이다.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많은 자료를 보았고 실제로 경복궁도 찾아가보고 경복궁 관련 다큐도 찾아보았다. 덕분에 원래 조선 말기의 경복궁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화면으로나마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왕궁은 그 민족 그 나라의 역사진 문화적 전통성에 대한 확인이자 상징이다.

경복궁이 조선의 상징적인 건축물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경복궁은 가장 많은 시련을 겪은 궁궐이기도 하다. 경복궁은 조선의 상징 그자체였다. 때문에 일제는 고종을 강제폐위시킨뒤 순종을 강제로 황위에 올린뒤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켰고 조선은 이씨집안의 국가 즉 이조조선이라 하여 일본의 제후국으로써 권위를 점점 없애버렸다.

이로써 조선은 마지막 황제도 잃고 조선의 상징물을 잃어버린 완전한 일제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조선이라는 국가에 있어서 경복궁은 조선의 혼 이었을지도 모른다.

왕실은 그 나라의 상징이며, 신성한 장소인데 이토록 훼손되다니 뼈아픈 역사다. 경복궁 이외에도 덕수궁도 엄청나게 훼손되었으며 경희궁은 거의 사라진 수준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꼭 알아야 하는 슬픈 진실이었다. 마을 수준으로 널찍하던 경복궁의 옛 화면 장면이 일제시대에는 건물 4채만 남기고 텅텅 빈 화면으로 바뀌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현재의 경희궁은 여전히 공사중인데 언젠가는 원래 모습을 꼭 되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