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노트] 제주 4월 — 발과 손으로 산책하기

J. Hwan Jeon
그림노트 —  season 2
5 min readMay 9, 2017

제주에서 두해째 봄을 맞이하니 제주의 4월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씨에도 적응이 되어 날이 좋으면 언제라도 산책을 떠난다. 이번주에는 어느 길에 꽃이 피는지 알게 되고, 나무가 거친 바람을 겪으며 굽이굽이 자라난 서로 다른 시간의 결을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4월 제주 산책을 그림과 사진으로 담아 본다.

2017년4월8일@신산공원

제주 문화예술회관에 처음 갔다가 그 뒤에 있는 신산공원을 발견했다. 오래된 나무들을 해치지 않고 굽이굽이 낸 산책길이 잘 어우러지는 공원에서 벚꽃을 만끽하며 거닐었다.

제주 하천은 건천이다. 현무암에 쉽게 스며들어 거의 항상 물이 말라 있다. 물 많은 하천의 부재는 제주의 경관에 치명적 약점이다. 그래서, 건천에 물이 고인 해가 뜬 날의 풍경은 더 귀하고 아름답다. 더욱이 벚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풍경이라면!
제주의 삶은 계절마다 다르며 매일, 매시간마다 공간과 장소 그때그때 다르다. 제주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쫓아다니다보면 자연을 따르는 순리를 알게 된다.

2017년4월18일@신산공원

신산공원은 근무지에서 15분이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제주에서 일한 지 2년 가까이 되어서야 이 아름다운 공원과 길을 발견했다. 최고의 아름다움이 바로 지근거리에 있어도 만날 여유가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자주 이곳을 걷게 되었고, 어느날은 조금 일찍 집을 나서 회사 인근 커피샵에서 테이크아웃을 하고 산책을 했다. 여유있게 발로 걸으며 두리번거리고, 5분간 자리에 앉아 나무를 따라 손으로 노트 위를 더듬는다. 그리고, 회사를 향해 걷는 발걸음이 가볍고 가슴이 충만하다. 대지 위에 하는 드로잉(산책), 노트 위에 하는 드로잉(그림). 행복하기 위해 사는게 아닌가 느끼게 하는 그림 산책이다.

신산공원 산책은 브람스와 참 잘 어울린다. 브람스는 나의 온 몸과 마음을 자연 속에 흐르도록 윤활유가 된다. 나는 브람스의 선율을 따라 대지 위를 드로잉한다.

Johannes Brahms — Trio in A minor op.114
https://www.youtube.com/watch?v=YOayoH9YRWk

2017년4월23일@금산공원

제주 서쪽으로 가면 애월이 있다. 이곳에 납읍초등학교 앞에 있는 금산공원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고 오랜 후박나무를 대하다. 나무마다 굽는 모양이 다르고 결이 다르고 이파리가 다르다. 점차 나무를 알아가고 나를 알아가게 되는 그림 산책이다.

그림으로 교감한 후박나무는 내게 노자의 글귀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굽으면 온전하고, 구부리면 곧게 되며
움푹하면 채워지고, 낡으면 새로와지며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된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아지며
스스로 옳다하지 않으므로 드러낸다.
- 도덕경

2017년4월29일@서귀포 테라로사 커피

서귀포 나들이. 검은 현무암 모래로 특별한 풍경을 가진 서귀포 쇠소깍 해변을 산책하고 인근의 테라로사 커피에 앉아 높은 창을 통해 숲을 보며 드로잉.

Terarosa Coffee는 강릉에서 시작되어 서울, 서귀포에 지점이 있는 지역 라이프스타일 커피점이라 할 수 있다.
tera rossa(이탈리아어)는 ‘석회암의 풍화로 생긴 적갈색 토양’을 뜻한다. 석회광산이 인접한 강릉을 커피 문화 코드로 재생했다. 카페의 인테리어에선 강원경제의 힘줄인 철로의 재료(나무판과 녹슨철)가 보인다.
석회암과 적갈색 토양은 전무하고 철로도 없고, 검은 현무암 모래로 이루어진 서귀포 쇠소깍. 인근에 야자수와 감귤밭으로 둘러싸인 테라로사가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 은근히 어울리는게, 역설이자 댓구가 된다.
이렇게 강릉과 서귀포 두 라이프스타일도시가 접속해서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 강릉, 쇠소깍은 커져가는 서퍼 문화의 대표적 장소들이기도 하다. 의미가 드러나고 확장될 수 있는 여지는 더 많아 보인다.

내년에 더 산책하면 더 가까와 지겠지 .다시 제주의 4월을 기다린다.

2017년5월9일 — 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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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Hwan Jeon
그림노트 —  season 2

An intermediary between IT and Culture. Majored in Computer Science and Arts Management. Currently Accelerating Startups in Jeju Island of South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