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산책, 그리고 구두

J. Hwan Jeon
그림노트 —  season 2
2 min readApr 25, 2015

나의 삶의 성공의 척도는 은퇴 후 맥주 한잔 기울일 때 그 맛이 어떨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내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한 사람들이 내 삶의 순간순간을 풍성하게 다각도로 의미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때 주변에 존재한다면 은퇴 후의 맥주맛은 분명 기가 막힐 것이 틀림없다.

이틀 전 저녁 해가 지기 직전 동료 A님과 제주대 입구까지 산책을 갔다. 간단히 맥주 한잔을 하려고 했는데, 대학교 앞인데도 호프집 하나 없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제주대를 통과해서 회사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길은 없었다. 날은 어두워졌고 우리는 숲과 계곡에서 헤맸다. 가다가 막히면 다시 돌아오고, 또 새로운 길을 가다 막히면 또다시 돌아왔다. 길이라 생각했던 곳이 길이 아닌 곳이 많았다. 길을 만들며 가다보니 구두가 망가지는게 마음에 쓰였다. 거의 두시간이 다 되어서야 마침내 길을 찾았다. 멀리 돌아서 한참 중산간 위쪽으로 올라온 길이었다. 달빛과 별빛이 머리 위와 뒤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고 제주 시내의 불빛들이 아름답게 펼쳐 있었다. 저 멀리 반도로 이어지는 해안도 보였다. 제주는 섬이다. 그런데, 섬 안에 수 많은 섬들이 있다. 각각은 아름답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아 있다. 연결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물 위를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늘을 날아야 할 지도 모른다. 숲에, 물 위에 길을 내야 한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무모한 일일 수도 있다. 회사 숙소에 돌아와서 보니 새 것 같던 구두가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렸다.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었다. 신발은 2시간이 아닌 2년을 걸은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신발의 상처를 닦아냈다. A님과 나는 기막히게 맛있는 맥주를 마셨다. 지난 몇년간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2015.4.25 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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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Hwan Jeon
그림노트 —  season 2

An intermediary between IT and Culture. Majored in Computer Science and Arts Management. Currently Accelerating Startups in Jeju Island of South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