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쓰는 글

J. Hwan Jeon
그림노트 —  season 2
10 min readApr 22, 2022

“예따, 이 사진 올려라. 네 아빠가 부산에 출장 갔을 때 전국에 역병이 돌았어. 그거 피한다고 제주에 들어갔더라. 그땐 전화도 없어서 연락도 잘 닿지 않았어. 정혜 낳기 열흘 전인데 네 아빠는 돌아올 생각도 안하고, 게서 친구들과 잘 놀고 있었지.”
어머니는 골라온 사진들을 장례식장에서 꺼내놓으며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하루 세끼와 간식을 정성껏 차려드리며 건강 회복을 바랬지만, 평생 자상한 표현을 못하는 그에 대한 불만과 원망 또한 끝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접객실 스크린에 띄울 1순위로 꼽은 사진이었다. 둘째의 출생을 앞두고 경남 창녕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부산 출장에서 제주 여행으로 일탈한 그때는 그의 33세, 8월 중순이었다.

그로부터 1년 3개월 뒤 나는 누나와 연년생으로 태어났고, 52년이 지난 2022년 지금, 제주에 살고 있다. 미세먼지 없이 맑은 봄 어느날 나는 하늘길로 육지로 향했다. 대전에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작년 한해 성과를 발표 평가 받는 자리였다. 4주 뒤면 나는 7년간의 센터장 임기를 마치기로 되어 있었다. 발표는 25분 걸렸다. 내 옷짐은 6일치였다. 발표가 끝나고 나는 바로 서울행 기차를 탔다.
5주 전 아버지는 코로나에 걸렸다. 겉잡을 수 없이 펜데믹이 확산되어 방역과 의료시스템이 붕괴되던 시기였다. 응급실에 자리가 없어 길위에서 몇시간 대기하다가 집으로 환자를 되돌려 내려놓아 임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간신히 응급실에 들어가서 산소호흡기를 단 채로 코로나 위기는 넘겼지만, 기저질환이 악화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주일 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인공호흡과 연명치료로 버텼다. 임종이 확실하기 전에는 누구도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제주에서 일하며 하루하루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임종기에 들어섰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자 비로소 한번씩의 직계 가족 면회가 가능해졌다. 어머니, 누나, 형이 먼저 아버지를 뵈었고, 나는 대전 일정을 마치고 다음날 오전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나서 그날 인공호흡을 뗐다. 서울에 머물며 나는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2022년 4월 16일 토요일 오전 5시 6분, 아버지는 84년의 삶을 마쳤다.

상주로서의 장례식장은 문상객으로 찾는 경험과 전혀 달랐다. 처음 이틀은 그와 자녀의 인생을 중심으로 다양한 삶의 시기에 맺은 인연들이 다녀갔다. 고인과 애증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삶의 주인공들이 차곡차곡 다 모인 것이다. 더없이 좋은 관계였다가 어떤 계기로 십여년 넘게 연락이 끊겼던 이들도 이 자리에 나타났다. 영정에 눈이 달려서 볼 수 있다면 이들을 한자리에서 보며 어떤 기분일까. 한 사람을 주제로 한, 그 사람의 인생의 길이만큼 기획 시간이 긴 밋업이 장례식이었다. 상주가 되어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세번째 날, 발인의 시간이 왔다. 아버지의 살이 공기가 되고 뼈가 흙이 되어가는 한시간반 시간 동안 나는 화장터의 유족 대기실에 앉아서 화장 진행 상황을 알리는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온전히 그의 인생에 대해 돌아보았다. 그가 살아왔을 시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 관계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나 자신 50대가 되었기에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그의 시간과 장소들.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그 해는 일본이 조선어교육을 폐지하면서 민족말살 정책을 본격화했던 때다. 그가 두살이던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45년 해방되고 12일 뒤 8살 생일을 맞이했다.
한국어 교육이 다시 허용되었지만 그에게는 국민학교에 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서당에 가서 명심보감을 배운 것이 전부다. 그때 배운 명심보감이 그에게는 삶의 가치관으로 깊이 자리잡았다. 1950년 한국 전쟁 때 그는 13살이었다. 영광 사람들은 피난을 많이 가지는 않았다. 대신 그 시기 서북 지역에서 피난온 개신교인들이 한반도 남쪽까지 많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그에겐 위로는 형,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본처가 따로 있었기에 그 삼남매에게는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첫째인 형이 먼저 기회를 찾아 서울로 떠났다. 영광에서 쌀 대여로 이자를 챙기며 생계를 유지했던 아버지는 형의 권유로 쌀을 판 돈으로 약간의 종자돈을 마련해 서울로 떠났다.
1960년 4.19에 학생들이 민주화 시위를 하고 1961년 5.16에 젊은 군 엘리트들이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무학과 연고가 없는 그에게는 당장의 생계만이 가장 큰 관심이었다. 처음엔 평화시장에서 길거리 비누 장사의 바람잡이를 하며 돈을 벌었다. 지나가는 손님인 척 하면서 먼저 비누를 사면서 과장되게 좋다고 떠드는 연기를 했다. 그러면 지나가던 행인들은 어김없이 몰려들었다.
당시는 국가의 전력망이 110v에서 220v로 변하는 과도기였다. 집집마다 변압기를 승압, 강압 여러개 둬야만 했다. 변압기는 도란스(트랜스의 일본어)라 불렸는데, 아버지는 세운상가의 작은 도란스 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다 이 분야의 사업성을 발견하고 독립하기로 했다. 이름만 회사지 처음엔 공장도 직원도 없이 혼자 코일을 감아 한대씩 만들어 파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업체는 코일의 길이를 줄여서 원가를 줄이고는 했는데, 아버지는 정직과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니 찾는 손님이 꾸준히 늘었다.
아버지에게 술은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느날 세운상가 동종 업계 사장들이 그를 창고로 불러내서 사업을 중단하라며 협박했다. 의지할 인맥이 없던 그는 술을 누가 많이 마셔서 끝까지 버티냐로 승부를 보자고 제안했다. 죽자사자 마시며 견딘 그가 이겼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아버지를 업계 동료로 인정했다.

그는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힘들게 살았다. 그의 형은 아들 셋을 낳아놓고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딴 집 살림을 차렸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 보고 안타까워한 이웃이, 동네 어른들을 잘 챙겨주는 한 처녀를 이 집에 데려왔다. 그녀는 처음 보는 그의 어머니에게 말도 걸고 잘 해 드렸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들을 그녀와 결혼시켜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아버지와 생면부지인 나의 어머니는 황당했다. 하지만 어르신과 그 막내아들의 안타까움을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결혼했다.
어머니는 전북 고창 출신이었다. 뼈대 있는 집안의 9남매 중 뒤에서 두번째 딸이었는데, 자신까지 교육의 기회가 닿지 않았다. 똑똑하고 학습력이 빼어난 그녀에게 정규 교육 기회의 박탈은 평생의 한이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 영광과 어머니의 고향 고창은 전남과 전북으로 다른 행정구역이지만 남북으로 맞닿아 있어서 동향인이나 다름 없었다. 낯선 타지에서 이십대 청춘은 서로 의지가 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평생의 동업자였다. 60년대말부터 빠른 경제성장의 흐름을 타고 아버지의 성실과 어머니의 내조가 결합하자 사업은 순조롭게 성장했다. 결혼 3년 뒤인 68년 첫째 아들, 70년 둘째 딸, 그리고 71년 셋째인 나를 낳았다. 돈이 많이 생기자 영업장인 세운상가와 공장인 수원 사이에 집을 짓기로 했다. 아직 밭과 공터가 많았던 역삼동에 2층짜리 단독주택을 지었다. 1978년에 그렇게 양가 친척 모두에게 가장 성공한 가족임을 알리게 되었다.

고향에서 많은 친척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역삼동 2층집은 그들이 머물고 성장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우리집에는 13명이 살았다. 그 중에서 나는 막내였다. 외삼촌은 6.25 참전 후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는데, 외숙모와 사촌형, 사촌누나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 본처의 손자들도 우리집에 살았다. 그 형들은 우리 삼남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큰이모의 아들도 우리집에 살면서 세운상가에 있는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다. 그 사촌형은 신기한 전자 키트들을 사 오곤 했는데 내게 남땜질을 가르쳐주었다. 밥을 차리면 상을 두번, 세번에 걸쳐 차례로 먹어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정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셨지만, 친척 자녀들에게는 아낌없이 학비를 대며 교육의 기회를 주셨다. 큰아버지가 집을 나간 큰집의 삼형제를 모두 대학에 보냈주었고, 함께 사는 외사촌형, 외사촌누나도 대학에 보냈다. 고모는 결혼 후 한때 우리보다 몇배는 잘 사셨었는데 대기업 임원이던 고모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 자녀들의 학비도 우리 부모님이 지원했다. 할아버지의 본처의 손자들도 대학에 보내주었다. 항상 어떤 문제든 생각이 달라 충돌하던 부모님이었지만, 양가 친척의 학비에 돈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는 한번도 이견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건 너무나도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어린 시절 부모님의 모습은 내가 도운 사람들이 성장할 때 큰 기쁨을 느끼곤 하는 나의 삶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아버지는 항상 일로 바쁘셨다. 집에 오셔서도 자녀들과 살갑게 대화하시는 분은 아니었다. 1980년대초 내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는 혼자 동남아 여행을 몇달간 떠나셨다. 그때 아버지는 현지의 풍물이 담긴 엽서에 글을 써서 보내주시곤 했는데, 내겐 엽서의 사진도 아버지의 편지도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행에서 돌아오실 때면 미니카와 같은 장난감도 사 오셨는데, 나는 혼자 방에서 그걸 가지고 나의 세계관을 만들어 하염없이 놀곤 했다.
아버지가 52세, 지금의 내 나이 때 우리 가족은 긴장된 마음으로 서울대학교로 향했다. 대학 운동장에 붙여진 합격자 공고 대자보를 보기 위해서였다. 가나다순으로 쓰여진 이름을 보는 순간 누군가 먼저 ‘전정환’ 세 글자를 발견하고 ‘있다!’라고 소리쳤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나 또한 기뻤지만 부모님이 더 흥분된 듯 했다.
아버지는 자녀들과 대화가 많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 나는 일주일에 한두번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 말은 ‘아빠, 용돈 좀 주세요.’였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인지 어이없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다 썼냐?’라고 말했지만 어김없이 지갑을 열고 3만원을 꺼내주었다. 나는 그 돈으로 친구들과 당구도 치고 짜장면도 시켜 먹었다.
1990년대가 되자 13명의 대가족은 서서히 각자 자신의 가족을 꾸려 나갔다. 형과 누나도 서른 전후해서 결혼하고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셋만 살게 되었다. 어느날 나는 두 분과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며 대화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분들이 내 나이 때 서울로 상경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듣게 되었다. 그때 들은 내용이 이 글에 담겨져 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나는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회사를 출근하기 전 하루를 쉬면서 이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아내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애플TV 드라마로 만들어진 ‘파친코’를 봤다. 일제강점기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서 오사카로 이동해서 살고 아들은 파친코 사업을 하고 손자는 뉴욕에서 금융, 부동산 전문가로 일한다. 미국에서 재미교포가 쓴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을 드라마화했다. 에피소드 중에, 뉴욕의 한 재일교포 할머니가 오랫동안 살아온 땅을 팔지 않으려 하는 것이였다. 부동산 회사는 이곳에 고층 빌딩을 짓기 위해서는 이 땅을 꼭 사야 하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거액의 보상을 제안한다. 주인공인 솔로몬은 이 거래를 꼭 성사해야 직장에서 인정받기 때문에 자신의 할머니를 활용해서 땅 주인을 설득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대대손손 큰 돈을 줄 수 있다고 할머니에게 땅을 팔라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시한번 거부한다.
장례식장에서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내가, 갑자기 왈칵 울음이 터졌다. 왜 나는 아버지의 삶에 대해 더 이야기를 더 듣지 못했을까.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이 기억하고 기록해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물어볼 수도 대답할 수도 없는 곳에 가 계시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눈물이 앞을 가렸다.
평생 아버지와 나는 살갑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존중했다. 2017년에 내가 한예종 예술경영 논문을 써서 드렸을 때 아버지는 다 읽으셨고, 2019년에 내가 첫 책 <밀레니얼의 반격>을 써서 드렸을 때도 몇번이고 읽으셨다. 내가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이 들었다면 아버지의 이야기로도 책 한권은 족히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쓰여지지 못한 책이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대답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싶다.

2022.4.23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 뒤에 쓰다.

--

--

J. Hwan Jeon
그림노트 —  season 2

An intermediary between IT and Culture. Majored in Computer Science and Arts Management. Currently Accelerating Startups in Jeju Island of South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