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씬 — 무대륙

자립문학생산조합
seoul secne
Published in
5 min readApr 17, 2015

그녀를 만난 건 무대륙에서였다.

나는 길을 잃었다.

무대륙이 어디죠 남자는 웃었다. 근육과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 멋지네. 저도 잘 몰라요 오늘 찾는 분이 많네요

골목을 지나서 길로 갔다. 어디가 어딘지 몰랐다.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기는 어디인가 진부한 질문이다. 어린아이가 보였다. 아직은 아이, 언젠가는 여인 —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혼이 눈에 보인다. 무대륙이 어딘지 아세요 아이는 당황했다. 당황할 이유가 없는데도. 아이들은 모든 일에 대해 호들갑을 떨기 마련이다.

이 아이와는 최근에 다시 만나려고 했는데 만나지 못했다.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나는 걷는다. 걷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앤트러사이트를 지나 마침대 무대륙에 도착했다.

무대륙의 지하에는 공연장이, 지상에는 카페와 식당이 있었다. 사람들은 사막을 마셨다.

나도 사막을 시켰다.

시다.

옆에 있던 남자가 맥주를 반쯤 마시다가 스태프에게 물었다. 이거 맛이 왜 이래요 원래 그렇습니다 도저히 못 먹겠으니까 환불해줘요 스태프는 군말없이 반쯤 마신 맥주를 환불했다. 나는 신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이 움직였다. 빛의 무대에서 머리가 긴 여자가 노래를 불렀다. 빅베이비 드라이버던가.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오래 전 일이고,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너는 날 읽는다. 나는 기억한다. 나는 운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 나는 쓴다. 너는 읽는다. 너는 너는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황보령이 무대에 섰다. 귀마개를 꼈다. 딱히 그녀의 음악이 시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귀마개를 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불안이 나를 잠식하고 있어서다. 불안은 한없이 증폭된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물론 나는 어리석다. 어리석음이 끝이 없다.

혹시 제 음악이 너무 시끄러운가요 볼륨을 줄일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나 역시 대답하지 않는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드레스 셔츠와 핫팬츠를 입은 여자가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도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를 안다. 그녀는 나를 모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그녀는 안경을 꼈다. 귀엽다.

무대 옆쪽으로 난 문으로 나갔다. 위로 올라가니 여전히 무대륙이었다. 나는 자못 화난 듯이, 내가 귀마개를 낀 것을 연주자가 지적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어째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나는 다시 무대륙의 다른 길을 이용해서 공연장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옆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그녀는 귀엽다.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트위터에서 봤는데요 잠시 침묵한다. 나도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우린 같이 공연을 봤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대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거다.

공연이 끝났다. 위로 올라가서 맥주 한잔 사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전혀 신나지 않는 태도로 신난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 신났다.

우리는 맥주를 놓고 마주 봤다.

천재라는 거 자신이 천재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제가 만약 천재라면 여기에 있질 않겠죠 아마 엄청 유명해질 거에요 그러면 제가 천재라는 게 증명되는 거죠

그녀는 이따금 침묵하고 나는 그녀의 침묵이 좋다. 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요깃거리라도 하나 시킬까요 이만 가세요

비가 온다.

비가 세차게 내린다. 벌써 지하철은 다니지 않는 시간이다. 비가 오잖아요 나는 취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와 같이 있고 싶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눈인사를 했다. 머리가 길고 건장한 남자다. 나도 공연장에서 몇 번 봤다. 얼마전에 이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룰루랄라에서 어떤 공연의 표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아주 세련된 머리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멋지네.

난 남자를 좋아하진 않지만 멋진 남자들은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이만 갈까요 그만 가세요 나는 웃으면서 그녀가 밀어내면 밀어내는대로 가만히 있는다. 나는 너무 취했다. 한번도 공연장에서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다. 왜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까. 나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왜. 왜 그녀는 내 관심을 끌었을까.

그녀는 귀엽다.

나는 귀여운 아가씨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들과 너무 가까이 있는 건 싫다. 그녀들은 항상 날 괴롭게 한다. 그리고 날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도 내가 싫었다.

우리는 빗속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십분 정도 걷자 우리는 완전히 젖었다. 속옷까지 축축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우산을 샀다. 나는 길쪽으로 걷기 위해 그녀의 앞뒤로 왔다갔다 했다. 그녀는 내가 어째서 그러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당황하고 불쾌한 것 같았다. 여자하고 같이 있을 때는 길쪽으로 걸어야 호감을 산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군.

상황과 장소에 따라 다른 거야.

이제 어디로 갈까요 저는 보통 피시방에 가는데 가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모텔 가자고 할 걸 그런데 나는 한번도 여자와 모텔에 가본 적이 없다. 요즘에는 모텔에 가끔 혼자서 묵을 일이 있는데 아주 불쾌한 공간이다. 앞으로도 여자와 모텔에 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피시방에 앉았다. 젖은 몸 그대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트위터에 들어가 그녀에게 디엠을 보냈다.

우리 딴 데로 가요 어디요 어디든 여기는 싫어요 왜요 옆에 있는데 멀리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결국 지하철 첫차가 다닐 때까지 피시방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 90년대생인가요 예 전 90년대생하고 처음 말해봐요 그리고 여자와 같이 밤을 샌 건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황스럽네요
전 작업 하느라 동기 남자들하고 자주 밤 새봤어요

내가 그녀를 당황스럽게 하는 걸까. 난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기분 좋아지는지 잘 모르겠다. 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거지.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은데, 왜 그렇게 할 수가 없지. 나도 사랑하고 싶은데, 왜 그렇게 할 수 없지. 왜 나만 놔두고 다 가버리는 거야.

나는 무대륙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이제 서울에 없다.

나는 서울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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