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튀김
Somewhere there is a rainbow for…
7 min readJul 30, 2016

--

너무 많은 것들이 역겨울 정도로 너무나 많이도 지긋지긋했다. 곽가는 발에 뭐가 채이든 신경쓰지 않고 차박차박 소리를 내며 걸었다. 어느 순간 그 소리 사이에 말발굽 소리 같은 게 났다. 무시하고 좀 더 걸어가다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문제의 어르신께서 작은 말을 한 필 몰고왔다. 바로 앞까지 오더니 뛰지도 않고 있던 말을 추슬렀다.

“가가야.”

“저리 가요.”

“금일 저녁엔 내가 시간이 있어.”

오렴. 살가운 목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곽가가 방향을 돌리자 순욱도 천천히 말을 몰아 돌아간다. 내키지 않음이 분명한 곽가의 느린 걸음을 용케 맞추어 말을 타고 나아간다. 요란한 것 싫어하시는 분이 처음으로 말을 끌고 왔다. 이렇듯 순욱은 늘 사람을 지게 만든다. 뒷문 앞까지 마중나온 하인이 있다. 순욱이 천천히 내려가자 조심스레 말을 데려간다. 곽가를 흘깃 보더니 순욱이 팔을 잡아온다. 오래도 못 봤다며, 들어가자 종용한다. 말 대신 끌려가듯이 곽가는 그냥 순욱이 이끄는 대로 갔다. 그의 방에 들어가 아까 앉아있던 그대로 앉았다.

“배가 고프진 않아?”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그럼. 순욱은 언제나와 같은 담뱃대를 꺼내 썰은 잎을 넣고 불을 틔웠다. 곱게 타는 냄새가 확 퍼지자 순간 그가 그리웠던 마음에 몸서리쳤다. 담배 연기란 원체 순욱과 있을 때만 맡아볼 수 있는 향이었으니. 곽가는 이를 꾹 물고 떨림을 참아냈다. 몇번이고 연기를 뱉어낸 후에야 순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 이유만큼은 잔뜩 가지고 있는 순욱이다. 멈춤없이 설명을 한다. 소유만 순 가 앞으로 두고, 관리와 경영을 일임하는 데는 장부에 대표로 이름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계집애한테 그런 자리를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굳이 자신을 올리려면 그냥 지금 그대로 올리고, 안 그럴 것이면 잘난 사내든 아무 썩은 영감이든 데려와 앉히라며 곽가는 분통을 터트렸다.

“둘 다 안 되는 걸.”

너만한 사람을 넌 찾아올 수 있니? 얼핏 온화해도 보이는 칭찬조였으나 뜻이야 서겁했다. 순욱은 곽가를 아예 바라보지도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

“애초에 하고 싶지도 않아요.”

“애초에 이러려고 널 데려왔는 걸.”

그간 잦기도 잦았던 곽가의 건방지고 무례한 행동들. 그걸 다 묘상한 관용으로 넘어가준 게 다 이걸 위해서였을까. 곽가는 너무나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이 속에서 한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더니 계속 거칠게 돌고 돌아 멈출 수 없이 속을 뒤집기 시작했다. 순욱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각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정하고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생김새긴 하지만, 그 질이 뭔가 달라보인다.

“가가야.”

고집 부리지 말아라. 너도 나도 귀찮아질 뿐이야. 사뭇 협박조였다. 순욱은 혼인 이후론 여유를 죄다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봐줄 마음이라곤 없었다. 곽가도 그걸 감지했으나 이젠 지친 지 오래되었다. 그의 도련님 놀이야말로 끝날 때가 되었는데, 순욱은 그걸 끝까지 마무리를 하려는 것이다. 계획했던 대로 말이다.

“돌아갈래요.”

가가야. 금일만 해도 몇 번째 듣는 순욱의 부름이다.

“나는 그간 정말 바빴어…”

너무 바빴어. 할 일을 하느라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했단다.

“정말 간신히 시간을 내어 준비하고 널 불렀어. 말을 들어주렴.”

“그러시겠죠. 절 제대로 써먹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셨을 테니.”

순욱이 담뱃재를 탕 하고 쳐 털어냈다. 평상시 없는 행동에 곽가는 눈을 치떴다.

“원하는 대로 해라. 싫어할 걸 몰랐던 적도 없었어.”

“언니.”

“이젠 다른 호칭으로 불렀으면 좋겠구나.”

“언니는… 뭘 하고 싶은 거에요?”

뭐가 되고 싶은 거에요? 언니는 뭐죠? 지금은 뭐고 나중엔 뭐가 될 건가요? 대답이 뻔히 없는 질문을 쏟고 곽가는 괴로워했다. 얼굴을 틀어쥐자 순욱이 쥔 걸 다 내려놓고 앞으로 왔다. 가만히 얼굴을 가까이 하자 그에게서 나는 특유의 향이 났다. 평소의 향주머니, 방금 피운 담배. 오래도록 곱게 입은 고급 옷감의 사이에서 나는 부드러운 체향. 눈을 감아버리자 입술은 다가왔고 숨을 걷혔다. 작은 입술 살점은 여전히도 즐거운 감촉이었다. 속에서 빙빙 도는 기분나쁜 느낌은 멈추질 않았으나 몸이 먼저 즐거워했다. 작고 마디도 다 동그란 손을 자신의 마른 품에 끼웠다. 고개를 떼어 얼굴을 확인했다. 이 지근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는 것 만으로도 자신의 눈언저리가 욱씬거리는 걸 곽가는 느꼈다. 왜 이런 분에게 이렇게 빠졌을까? 어쩌면 자신에겐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나, 순욱이야말로 여기까지 받아줄 계획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실망의 끝을 애써 뚝 잘라냈다. 어쨌거나 그는 여기 있는 것이다. 돌아가는 곽가를 다시 데려왔다. 의도는 뻔하나 곽가는 어쨌거나 여기 있는 것이다. 얼굴을 움찔이며 그를 끌어안았다. 향과 온기에 푹 빠지는 감각이 마른 몸에도 확 닿아왔다. 무엇이 변했고 뭐가 그대로인지? 또 알 수 없게 되었다. 곽가는 완전히 바보가 되었단 생각을 하며 그를 침대로 밀었다. 의복을 벗겨내고 살에 숨이 닿게 했다. 여전히 몸통을 다 쥐어짜고 있는 천을 풀어내려 하자 순욱은 오래간만인 탓인지 약간 머뭇거렸다. 곽가는 그가 피곤한 탓인지 조금 부은 걸 보았고, 순욱도 곽가가 그새 더 말라 버렸다는 걸 알았다. 마음 같아선 울음이 나도록 안고 싶은데, 평소같은 정사가 되진 않았다. 순욱은 정말로 피곤한 기색이었다. 곽가야말로 평소의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흥분으로 열이 오른 채 그의 반들한 얼굴을 보면 늘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있었으나 오늘, 지금 만큼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멀고 아픈 느낌만 이유없이 돌았다. 울고 조를 의욕조차 없었다. 조용히 안고 말을 붙였다. 순욱은 바빴다는 말만 반복한다. 아마 그의 특성상 아이 시절 때부터 늘 생각해 왔던 일과 계획과 걱정이 이젠 숨도 못 쉬게 쌓여있었을 것이다. 새삼 어른이 되셨으니 그는 이 가짜와 거짓말에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평생 척 하면서 살게 되셨다. 곽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느니 살지 않고 없어져 버릴 것이다. 줄곧 없어지고만 싶었는데 순욱은 자꾸 곽가를 매사 지게만 만들었다. 평소 따스하던 체온은 오늘 와선 미지근만 했다. 이젠 아내도 있고 후사도 급하시다니 요즘 저녁엔 뭘 하시나 잔뜩 약을 올려 물어보고만 싶었다. 얼마 전만 해도 최대한 못되게 물어보았을 것을. 하지만 이젠 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그럴 사이가 아닌 게 느껴졌다. 죽고 싶은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실망이 너무 커져서 내장을 다 파먹었다. 숨을 들이쉬면 이미 빈 몸에 공기만 가득 차는 느낌이다. 고개를 파묻었다. 살의 감촉이 기묘했다. 가는 눈을 감았다. 순욱이 또다시 일 이야기를 시작한다. 곽가는 또 거절할 생각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고, 그가 또 불러내면 다시 나갈 것이라고. 그렇게 혼자 생각하면서 순욱을 놔두고 무기력한 잠에 빠졌다.

눈을 뜨면 분명 순욱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있었다. 곱게 쓴 서통을 든 순욱은 곽가가 깬 것을 보았다. 의복을 어서 차려입으라 한다. 겨우 옷을 입고 얼굴을 문질러 닦고 있는데 그가 다시 부른다. 와 앉아달라 한다. 와 앉자 쥐고 있던 종이봉투를 건넨다.

“관의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다.”

새 이름과 신분이 든 종이니 지금 읽어보렴. 둘만 있을 때는 내가 네 옛날 이름을 불러줄테니 감안해라. 부모가 주신 이름을 소중히 생각하는 너를 안다. 각별히 너를 위해 똑같이 아름답다는 뜻을 쓴 이름 가진 자를 찾았다.

“언니.”

원래 신분은 사망처리를 해 두었고, 집에도 그렇게 알렸다. 가족 돌보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나서지 말았으면 하는구나.

“언니!”

“받았으면 열어보렴.”

곽가는 받은 봉투를 반으로 확 찢었다. 안의 내용물이 보일세라 급하게 나머지 조각도 갈기갈기 찢었다. 깊고 큰 한숨소리가 앞에서 들려왔으나, 떠는 손으론 잘 찢기지 않는 종이섬유 뭉친 부분까지 다 뜯어버렸다.

“제가… 언제…. 멋대로..!”

갑자기 날벼락을 맞고 나니 목조차 잠겨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찢은 걸 다 흘렸다. 곽가는 이제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이젠 그 어떤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순욱도 매한가지였다.

“너란 아이는 뭐가 문제니?”

“정말… 안달이 나셨었군요?”

싫어요. 싫다구요. 이딴 짓을 하느니 당장 죽어버릴 거에요. 또, 죽여버릴 거라구요. 누구 맘대로 이런 짓을 하신 거에요? 그러나 순욱은 표정에 미동도 없었다.

“나를 죽여놔서 너무 좋으시겠어요.”

곽가는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보기 싫게 새빨갛게 될 걸 알지만 문지를 수 밖에 없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 멍청한 관아 놈들 실수라고 알린 뒤 다시 문짝을 닫아걸고 영원히 나오지 말아야 한다. 곽가가 나갈 듯 하자 순욱이 말을 건다. 그간 얼마나 바빴는지 넌 이해를 못 하는구나. 계속 이러면 너에게 더는 신경 쓸 수가 없어. 다시 얼굴 보는 것 조차 힘들어질 뿐이야. 곽가는 이전에 몇번이고 그랬듯이 모든 말을 안 들은 것으로 하고 방문을 나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