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LTL 04
空器共生 4
며칠 뒤고 그 며칠 뒤고 곽가는 순욱이 알려주는 것들을 잘도 머리로 집어삼켰다. 다만 일찍 끝나기 시작하자 순욱이 잘 됐다며 찻집 같은 곳에 데려가 준다. 그게 싫어서 곽가는 한동안 일부러 느리게 배웠다. 못 알아듣는 척을 몇 번 했다. 하루는 고의로 정말 멍청한 척을 했더니 수업 내내 순욱의 동그란 눈썹이 꿈틀꿈틀거렸다. 경련하는 얼굴을 보고 곽가가 속으로 웃었다. 순욱은 끝까지 화내지 않고 눈가만 씰룩거리더니 곽가를 그냥 보내 주었다. 그러자 그 다음 날은 그 하후 선생이 오지 않았다. 그저 의아하게 생각하고 넘어갔으나 그 다음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포기했나 봐. 그렇게 생각하고 곽가는 여유롭게 넘어갔다. 며칠이 아무렇지 않게 흘렀다. 곽가가 여느 때와 같이 잡기를 들고 시장에 간 어느 날은 공기가 매우 맵고 건조한 일중이었다. 얼굴을 보고 말을 걸어온 사내들 상대로 몇 가지를 막 판 참이다. 돈을 전대에 넣는 데 시선이 느껴져 봤더니 멀찍이서 웬 양인이 곽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곽가는 그제서야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순욱이었다. 모자도 쓰지 않고, 깃이 접힌 양옷과 끈이 달린 서양 장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 색까지 밝아 저러고 있으니 영락없는 외국인 소년 같다. 순욱 뒤에는 상단 소속의 사내들이 궤짝을 나르고 있었다. 몇몇 짐은 골목 건너 소금 상회로 간다. 잘못 마주쳤구나 하는데 순욱이 이쪽으로 꼿꼿하게 한참을 걸어온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곽가가 늘여놓은 좌판 앞에 섰다. 하얀 면피 속 동그랗게 뜬 눈이 무섭다.
“이러려고 날 바보 취급했습니까?”
물어오는 말에 곽가는 아무 답도 않고 다른 곳만 쳐다보았다.
“이러고 살기가 그리 좋습니까?”
되물었으나 끝까지 순욱에게 답도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마침내는 순욱이 다시 짐꾼 무리로 가 버린다. 곁눈질을 해 봤더니 상회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지시하고 있다. 한참 후 일이 끝났는지 무리가 파하고 모두 가버려서 곽가는 다행이다 하던 중, 순욱이 다시 나타나 이쪽으로 왔다.
“장사 파할 시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요?”
“어서 접으세요. 나랑 얘기 좀 하지요.”
“제가 왜….”
말대답하다 말고 말을 흐렸다. 어찌됐건 순 가 도련님 심기를 더 거슬러 좋을 게 없겠지 싶었다. 무엇보다 이상하게 저 조그만 얼굴이 무섭다. 곽가는 성의없이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 꾸려 들기 무섭게 순욱이 발걸음을 옮긴다. 신은 서양 장화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난다. 어디로 가나 봤더니 곡전 옆의 낡은 찻집이다. 자리를 찾아 삐뚜름하게 앉더니 순욱이 품에서 짧은 담뱃대를 꺼낸다. 이내 불을 붙여 뻑뻑 피우기 시작했다. 연기가 안 어울리는 얼굴로 순욱은 한참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그럴 만한 고급찻집도 아닌데 종업원이 와서 연초를 채워주고 가기까지 한다. 시켜놓은 차가 차갑게 식었다. 탁자 위로 담배 태운 연기가 가득 쌓여 곽가는 숨 쉬기가 힘들고 목이 간질거렸다.
“별당 오는 길, 뒷문 있는 길 다 기억하시겠지요.”
내내 붙들고 있던 담뱃대에서 겨우 얼굴을 떼고 순욱이 말을 한다.
“앞으로는 그냥 오고 싶은 날 오시죠. 사람 안 보낼 겁니다. 안 와도 뭐라 안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또 몇번 빡빡하게 연기를 뱉어내더니 순욱이 후 숨을 쉬고 말을 잇는다.
“곽가님이 정말 영리한 사람이라면, 와야 할지 아닐지 알겠지요.”
평소보다 어조며 호칭이며 더욱 예의발랐으나 뭔가 더더욱 침잠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에서 노골적으로 무시 못할 느낌이 났다. 순욱이 눈을 아주 똑바로 쳐다보는 와중 곽가는 선뜻 뱉어낼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연기를 한번 더 훅 뱉어내더니, 바쁜 사정이니 이만 가보겠다며 순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곽가도 찻집을 나서 죽을 끓일 재료를 사고 집으로 향했다. 혹시나 연기가 몸에 남았을까봐 탁탁 털고서 들어갔다. 아버지와 함께 자리에 앉아 내일 팔 것을 만들고, 저녁으로는 언제나와 같이 죽에 야채를 조금 넣어 먹었다. 주무시려고 누운 노부가 기침이 심해 잠들지 못한다. 곽가는 뜨거운 물을 끓여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순욱에게 받은 찻잎을 좀 넣었다. 차를 입에 대본 지 오래 된 어르신이라 역시 좋아한다.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곽가가 고개를 숙였다. 최소한 저것에는 손 안 대고 싶었다.
장사를 마치고 꾸역꾸역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도련님네 별채에 갔다. 뒷문으로 들어가보니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마침 하녀 하나가 지나가길래 불렀더니 곽가를 보고 크게 놀란다. 그러더니 뭐라고 뭐라고 혼자 떠드면서 사라진다. 괜히 온 것은 아니겠지? 싶어서 곽가는 그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안이 소란스럽다. 나중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안에서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라면서 사라지는 것도 들렸다. 뭐야 이건. 곽가는 뾰루퉁한 얼굴로 한참을 서 있었다. 나중에 겨우 시녀 하나가 나와서 서실로 안내해준다. 서실에 들어가 보니 순욱이 앉아 있었는데 표정이 이상했다. 억지웃음을 배실배실 흘리면서 오셨습니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다행입니다…… 하는데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고 이마는 땀투성이다. 굉장히 찝찝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는데 순욱이 앉은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 한다.
“자, 그 그럼 책을 펴, 펴볼까요.”
왜 저래? 싶어서 곽가가 순욱을 유심히 본다. 식은땀을 흘리고, 별로 춥지도 않은데 집안에서 갖옷까지 갖춰입었다. 이제 보니 허리춤에는 향낭을 주렁주렁 달아놨다. 아하. 별반 더 생각해볼 필요가 없었다.
“어~머, 월경 하십니까? 공자님.”
최대한 얄미운 목소리로 곽가가 물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공자님 하는 부분도 한 음절 음절 똑똑히 끊어서 불러주고 싶었다. 순욱의 얼굴이 금새 샛빨개진다. 곽가는 깔깔깔 소리내어 비웃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참았다.
“양친께서 주신 몸이 여, 여성인 것은 어쩔 수가 없, 없으고.”
들키기까지 하니 순욱의 눈이 팽팽 돈다.
“같은 여자끼리 왜 부끄러워 하세요!”
곽가만 싱글벙글 웃었다. 순욱은 어떻게든 수업을 하려 했다. 어디까지 버티나 싶어 곽가도 착한 척 수업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펴놓은 장의 반도 다 하기 전에 순욱이 몸을 수그리고 아파했다.
“저 갈까요?”
“아, 안 됩니다. 배움에는 날이 없습니다….아…”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계속 수업을 할 것 같아서 곽가가 콧방귀를 뀌었다. 왜 저래. 그런 심성이였다.
“그렇게 수업 하고 싶으세요? 그럼 돈 많으시니까 아편이든 뭐든 좀 쓰고 오시지.”
“정신 나갔습니까! 그런 잡약은 젊은 사람을 게으르게 하고 지식인들을 퇴화시키는…아흐읏.”
벌떡 화를 냈다가 더 아프기라도 했는지 흐아으아 휴우아아아. 하고 순욱이 혼자 이상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저건 수업 못 해서 죽은 글방선생 귀신이라도 붙었나봐. 곽가가 한심해한다.
“그럼 더 편한 자리로라도 가세요. 이렇게 차고 딱딱한 데 앉아있으면 더 힘드실텐데?”
“일리… 있습니다. 그럼 내 방 중 하나로 갑시다.”
순욱이 비틀비틀 일어나선 옷을 너무 많이 입은지라 뒤뚱뒤뚱 걷는데, 그 꼴에 곽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미칠 지경이였다. 웃겨서 죽겠다는 말이 이 순간엔 관용구가 아니였다. 수업 들으러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많은 방 중 하나로 안내받아 들어가보니 서실과는 다르게 화려했다. 책상에는 상아 조각이 박혀 있고, 의자에는 연꽃무늬 비단 방석 위에 대와 옥으로 짠 깔개가 올라가 있었다. 책을 껴안은 채 순욱이 달달 떨면서 앉았다. 이쯤 되니 너무 중증이라 곽가도 좀 측은해했다. 어제만 해도 사람 여럿 부리고 삐딱하게 앉아서 장화 신고 담배 뻑뻑 피우던 순 가네 도련님께서, 오늘은 계집인 걸 못 숨기니 이리 곤란해 한다. 측은지심에 오늘은 말을 잘 들어 드렸다. 순욱은 그런 상태로도 곽가가 다 이해했는지 꼬박꼬박 묻고 전에 배운 것들 까지 다 읊어 보게 했다. 그러더니 수업을 마치자마자 책상에 엎어진다. 훌렁 가 버리기 좀 그래서 곽가가 괜찮은지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공자님, 월객이 괴로운 건 아는데 이것 갖고 안 죽습니다.”
엎어진 손등을 곽가가 쿡쿡 찌르며 불렀다. 한참 지나도 답이 없어 또 쿡쿡 찔렀다. 순욱이 겨우 고개를 들고 입을 뗀다.
“….이 몸이 싫습니다…”
“그러시겠지요.”
“곽 소저는 그런 적 없습니까.”
“몰라요. 저는 이 몸 때문에 손해 본 적이 없어서.”
퀭한 얼굴로 묻는데, 곽가는 여전히 심드렁하게 답하고 긴 팔로 팔짱을 지었다. 순욱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러시겠지요. 워낙 미인이시고 하니.”
“여인끼리 이상하게 그런 소리 좀 마세요.”
“소저나 여인이지, 난 여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요? 그럼 월객 오는 사내가 어디 있어요? 있으면 말 해 보시죠.”
울컥했는지 코가 빨개진 순욱은 더욱 심하게 시무룩해졌다. 이만 하고 나가려는지 책을 품에 안고 느리게나마 자리에서 일어난다. 곽가도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순욱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이 몸이야 싫지만,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성도 남성도 구별없이 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못 볼 꼴을 보여서 미안하다며, 순욱이 나갔다. 과연 머리에 먹물 바른 부잣집 도련님 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곽가도 그 집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