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튀김
Somewhere there is a rainbow for…
15 min readFeb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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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순욱이 어깨에 기댄 걸 곽가는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시선을 내리니 해에 타서 더 노란 윗머리가 보였다. 조그마한 머리가 떨어질 것도 같이 곽가에게 걸쳐 있다. 한참을 고민하다 곽가는 결국 살짝 손을 대서 머리를 잡아주었다. 순욱은 아무 말도 없고, 이따금 아파하는 소리만 살금 냈다. 그러고 보니 월객이 왔다지. 생각이 난 곽가는 그대로 오랫동안 있었다. 뭐라 묻지도 않고 그저 앉아 있다가, 좀 제대로 끌어안아 줄까 한순간에 시종들이 하후 선생과 함께 방 안에 들어왔다. 반쯤 혼절하다시피 한 순욱을 업어 끌더니 금방 다들 나가버린다. 애꾸 선생은 곽가에게 마저 누워서 쉬다 가란 말만 남기고 같이 나갔다. 곽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 어지럽고, 머리가 뜨겁다. 자신의 까칠한 손도 거슬렸다. 순욱의 손은 참 부드럽고 어디 각진 데가 없었다. 몇 번 닿아본 것이 전부였지만 그때마다 느꼈다. 그의 양손 모두 그렇다. 글을 써서 굳은살 진듯한 부분도 거칠지가 않다. 순 가 도련님이 맞기는 맞다. 따님으로 자랐으면 수놓는 손에나 굳은살이 배겼겠지만, 글 쓰는 손가락에만 배긴 걸 보니 도련님이 맞다. 그러나 방금 월경통으로 실려 간 걸 방금 보지 않았는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남의 걱정 따위를 하자 기분이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에 열이 더 오른다. 아직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곽가는 겨우 그 방을 나갔다. 나와보니 상회 건물의 높은 층이었다. 계단을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걸을 때마다 힘이 들어 결국 계단에 구겨져 앉았다. 통행에 방해가 되는데도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는다. 곽가는 억지로 일어나 상회 바깥으로 나갔다. 길가의 흙담에 몸을 기대고 있자니 생각나는 게 하나뿐이었다. 소라도 된 듯이 느리게 걸어서 찻집 뒷문으로 갔다. 이미 가장 들켜선 안 될 사람에게도 들켰겠다, 누가 보든 상관이 없다. 지난번과 같이 하인 아이에게 잔돈을 주고 좁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낮부터 또 왔다고 여자가 웃는다. 곽가는 아무렇지 않게 돈을 여자에게 쥐여주며 침상에 기대앉았다. 한쪽 다리만 길게 뻗은 채 몸을 기대어 혀를 섞고 옷을 벗었다. 상시 하던 대로 하려는데, 여전한 현기증은 둘째 쳐도 뭔가 불만족스러웠다. 억지로 하려니 어지럽기만 하고 흥분되지가 않았다. 그냥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누워 애무받기만 했다. 얼마 못 견디고 기운 없이 침상에서 흘러내려가 바닥에 앉았다. 옷을 주워입은 곽가는 더는 됐다는 말만 던지고 훌쩍 나가버렸다. 무언가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정이 안 붙으면 잘 질리는 성격이나 탓했다. 먼 곳으로 걸었다. 걷다가 지치고 힘들어 쉬엄쉬엄 갔더니 어느새 초저녁이다. 요전처럼 똑같이 기루 대문으로 들어가 서 있자 똑같은 눈치를 받는다. 품에서 돈을 털어 방을 안내받았다. 가만 앉아 있었다. 잠시 지나자 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기력 없이 쳐다보았다. 요전의 그 새끼 기녀가 고개를 들이밀고 곽가를 확인한다. 생긋 웃는다. 와놓고도 왜 자길 찾지 않냐며 순간 원망하더니, 바둑판을 가지러 가겠다고 등을 돌린다. 곽가는 일어나서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의도인지 금방 알아채고 그 기녀가 크게 당황한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안 된다는 소리에 곽가는 상대의 좁은 턱에 손가락을 뻗어 매만졌다. 그럼 안 팔면 될 텐데. 천천히 속삭인 말에 그 여자는 금방 넘어가 버렸다. 따라오라 한다. 몰래 뒷문의 뒷문을 넘어 아예 기루 바깥으로 가고, 광 같은 곳으로 들어왔다. 낡거나 부서진 가구를 넣어두는 곳인지 앉고 기댈만한 곳이 있었다. 자리를 찾아가 뺨을 문대다 입을 맞췄다. 속 타던 것이 더 끓기만 한다. 상대가 먼저 머리를 풀어주고 옷을 벗기려 들어 무심코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더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러기 싫었다. 그 애를 생각해주는 척 혀끝이나 나누었다. 그냥 관두라는 곽가의 말에 새끼 기녀는 자기가 풀어내렸던 곽가의 머리를 손수 묶어주었다. 솜씨가 능하다. 늘 하는 일이라는 게 티가 났다. 갑자기 이름을 물어본다. 뭐 하시는 분인지 알고 싶다고 묻는다. 그런 걸 안다고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얼마 전만 해도 이름을 쓰는 법도 몰랐다. 그래도 제대로 살았다. 곽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얼굴이 예쁘고 사지가 길쭉하니 팔린 신세였다면 저도 이런 곳에나 숙식했을까. 이 애는 분명 사온 사람이든 부모든 누군가 막 지어준 이름을 쓰고 있을 거고, 곁꾼 신세를 벗어나면 괴상하리만치 예쁜 단어만 골라 이름을 새로 짓겠지. 곽가에게도 상대에게도, 이름에 사실 의미 따윈 없었다. 애써 피하던 순욱의 생각을 했다. 분명 부모 운운하며 이름 쓰는 것을 알려주었다. 곽가는 그나마 승낙을 했지만, 이 여자는 그딴 소리를 기울여 들을까? 턱도 없는 소리다. 태어난 것을 저주하거나 부모를 미워하거나 하고 있을 것이다. 곽가는 다시 뾰족한 턱을 만져주었다. 괴로운 것만 씹어 삼키려고 태어난 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도 마찬가지이다. 이름 같은 증표를 나눌 사이가 아니다. 곽가는 순간 다정해졌다. 그 기녀는 어두운 안에서도 한껏 심울한 표정으로 곽가의 품에 안겨 있다 돌아갔다. 차가운 밤거리를 혼자 걸어나갔다. 얼마 전부터 머리의 열이 도통 식을 줄을 모른다. 오늘 친 사고로 인해 어지럽긴 했지만 이 열은 분명 아픈 것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 늦은 저녁을 차릴 준비를 했다. 아궁이 앞에 주저앉자마자 뭔가 코밑으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훑어보니 또 피였다. 황급히 밖으로 나가 흙바닥에 피를 흘렸다. 다행히도 금방 멈추었다. 발로 흙을 긁어 차 흘린 것을 흐려버리고 얼굴에 남은 것은 아무렇잖게 닦았다. 부엌으로 가서 죽에 넣을 옥수수 알갱이를 부숴 넣고 있자니, 얼굴이 창백하다며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곽가는 괜찮다고만 하고 집 구석을 바라보았다. 내다 팔지 않은 잡기가 조금 쌓여 있었고, 짜다 만 왕골 더미엔 재색 흙먼지가 속속들이 들어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하던 것을 집어치우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불쌍한 노부는 믿지를 못했다. 곽가는 무릎까지 꿇어가며 숨겨서 죄송하다 말했지만, 곽가의 아버지는 여전히 이해를 못 했다. 자기 눈에는 아직 어리고 약한 딸이, 지주댁 아들이 어쩌고 새로 일하게 된 곳이 저쩌고 한다.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곽가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야기의 어처구니 없음에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만 숙였다. 어찌 되었든 팔 것을 더는 안 만드셔도 된다, 그 얘기만 하고 식사준비로 돌아갔다.

다음날 깨어보니 월경이 돌아와 있었다. 마치 누구에게 옮아오기라도 한 것 같다. 평소엔 마른 몸으로 궂은일을 하니까 잘 오지 않았는데, 몸을 좀 편하게 두었더니 바로 이 꼴이다. 어제 오늘 이러니 현기증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말을 전할 수도 없으니 상회에도 그냥 안 가 버렸다. 종일 거동도 얼마 안 했다. 끼니때가 되었음을 떠올렸으나 기운이 없어 몸 하나를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아버지가 마른 콩이나 겨우 집어다 드시는지 까작까작 하는 소리만 났다. 이튿날엔 겨우 채비를 해서 나가려는데 바깥에서 동네 꼬마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친한 아이의 목소리라 나가보니 바로 제게 귓속말을 한다.

선생님이.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갔다. 아이의 손엔 밤이 한 개 들려 있다. 한적한 곳으로 도착하자 역시나 순욱이 숨어 있었다. 애는 가 버리고, 곽가는 얌전히 인사를 했다. 순욱은 보자마자 괜찮은지 물어왔다. 어제 아예 안 보여서 신경이 쓰였단다. 그래서 찾아온 거고.

“머리를 잘못 다쳤으면 어쩌나 싶어서… 정말 종일 염려했습니다.”

이제는 말짱해진 순욱에게 곽가도 괜찮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슨 주머니를 쥐여 준다. 뭐든 간에 거절해봤자 억지로 또 떠다밀 것 같아 순순히 받았다. 뜬금없는 좋은 밤이 여러개 들어 있다.

“먹으면 육혈衄血에 좋다 하기에.”

순욱이 혼자 흠 소리를 내며 어색해 해, 곽가도 겸연쩍게 감사를 표했다. 선생께선 품에서 주섬주섬 각연초가 든 작은 통과 곰방대를 꺼내 담배 피울 준비를 하며 중얼거린다.

“이제 혼날 차례입니다.”

또? 말을 듣자마자 곽가는 지금 당장 머리가 터져서 죽었으면 하고 빌었다. 자기가 좋아서 사건사고를 친 것이 아니다. 죄다 순욱 탓이다. 저 고집쟁이 지주댁 자제분의 잘못된 욕심 때문이다. 곽가가 벌써부터 괴로워하건 말건 순욱은 부싯돌을 꺼내 쇳조각을 치기 시작했다. 순욱이 쓰는 부시 조각을 보니 온갖 모양이 들어간 좋은 쇠다. 담배를 한 모금 들이킨 후에야 순욱이 말을 마저 한다.

“맞아 죽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아녀자의 주제를 아십시오.”

그 말에 곽가는 눈앞의 순 씨 처녀를 한껏 노려보았다. 순욱이 계속 이어 잔소리를 한다. 그 건장한 일꾼이 화풀이로 쓰러진 곽가의 머리통이라도 걷어찼으면 뇌가 터져 불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상회 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금방 멈춰 다행이지, 바깥이었으면 끌려가 무슨 짓 당했을지 아느냐고, 생각은 있는 것이냐, 머리가 좋으면 무엇 하냐, 성품이 형편없어 제 명에 못 죽을상이다, 눈매를 바로잡으시오 매우 건방지고 기분 나빠 보입니다, 하는 말에 곽가가 계속해서 얻어맞았다. 순욱이 겨우 역정을 멈춘다. 숨을 뱉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담배를 쭈욱 빨아들이더니 말과 함께 탁 토해냈다.

“아무튼간 걱정했습니다.”

정말로. 하면서 동그란 눈을 써 곧바로 쳐다보는데, 곽가는 또다시 당장 머리가 터져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괴롭고 불만스런 느낌이 들었다. 순욱이 담뱃잎을 다시 채워넣어 피운다. 계속 서 있기 힘들어 곽가도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순욱은 몸을 일으켜 바로 곽가의 옆까지 와 앉았다. 건초 타는 냄새가 풀풀 난다. 의원에겐 가 보았냐고 자상하게 묻는다. 안 갔다고 심드렁하게 답하자 또 걱정스러운지 표정이 심각해진다.

“아니, 근데 신경 쓰지 마세요. 어제 안 나온 건 저도 월경이 와서. 이틀 내내 피를 흘리”

“으악!”

순욱이 또 당황해 질린 얼굴로 떽 소리를 내서 말을 끊는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쳐다보자 순욱이 급하게 쿨럭거리며 담뱃대에서 재를 다 털어낸다.

“그런 부정한 소리를 아침부터 바깥에서 아무렇지 않게…”

“뭐가 부정해요? 여자끼리. 그리고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아니, 아니, 아니, 조금은 돌려 말하시오.”

곽가가 계속 뚱하게 있자 순욱은 완전히 포기를 했다. 뿔이 한번 나면 뽑아도 계속 난다더니. 하고 중얼거리며 곽가를 못된 염소 취급이나 한다.

“뿔난 자리를 지지면 새로 안 나요.”

“그래, 그래서 소저의 그 못된 소리 하는 입을 지지면 됩니까?”

“제가 어디가 못되었어요? 아주 착한 걸. 어딘가의 나으리 욕하는 사람 눈도 후벼주었고.”

방종하게 말하는 거 보니, 과연 안 아픈 것 같다며 순욱이 싱겁게 결론지었다. 멀쩡한 걸 알았으니, 가보겠다 하며 담배를 다 싸매넣는다. 곽가도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출근할 양을 하자 순욱이 말린다.

“맘껏 더 쉬다 나와도 됩니다.”

곽가는 뱁새눈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저 잘린 거군요…”

“뭐, 그렇달까.”

끈기가 없고 성질이 포악해서 창고지기는 못 시키겠습니다. 그런 말로 순욱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성실하지 않고 게을러 회계 일도 못 시키겠고. 하며 눈을 가느스름히 뜬다. 또 비난받고 있다. 곽가는 지겨워 죽겠단 표정부터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이 계속된다. 단연코 인품이 엉망입니다. 행실 또한 나빠서 혼자 하는 일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성질은 유난히 별스럽고. 말도 위아래 안 가려 거칠게 하고. 속이 좁은지 분기도 잘 쌓고. 대체 어디다 쓰겠습니까, 하고 쯧쯧쯧 격하게 혀를 찬다. 곽가도 이쯤 되면 순욱에게 대고 뭔가 비방하는 말이 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났다. 원래 면전에 대고 욕하는 것이 장기인데. 그저 입만 삐죽 내밀었다. 곽가의 뾰로통한 얼굴에 대고 순욱이 낮게 웃었다.

“그런데 참 귀엽습니다. 영특하고 눈치도 빠르고. 내 제자라 그런가.”

그러면서 어린애 귀여워하듯이 귀여워한다. 곽가는 그것 덕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나이 차를 생각해 보면 그러려니 할 법도 하지만, 워낙에 작고 어려 보이는 순욱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참 호전적입니다. 이렇게까지 싸우기 좋아하는 아가씨는 내 생전 처음 봅니다.”

“예에.”

“왜 하필.. 여자로 태어났습니까?”

고개 돌리고 있던 곽가가 눈을 마주했다. 아까부터도 온갖 소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 나쁜 소리는 처음이었다. 둘 다 표정이 가볍지가 않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분명 큰일을 했을 텐데.”

“큰일이 뭔데요? 그러는 그쪽은 왜 계집으로 태어나셨어요? 피차 천하고 더럽게 말예요.”

차갑게 확 쏴붙이자 순욱은 샐긋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아차, 하고 바로 후회했으나 소용이 없다. 혼날 것을 예상했으나, 생각외로 순욱은 한참을 바닥만 내려다보고 섰다. 본인부터가 서로 싫어할 말을 했으니 서로 없었던 걸로 하자며, 고개를 푹 숙이고 가 버린다. 곽가도 머리를 숙이곤 얼굴을 쥐어뜯었다. 또 사고를 쳤다. 집으로 돌아가 받은 밤부터 깎았다.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생밤을 오도독 씹어먹었다. 어디서 상품만 골라왔는지 하나하나 다 달고 유난히 맛있다. 그러나 그걸 즐기고 앉아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분명히 시비를 틀어댄 건 순욱인데 어쩐지 나쁜 사람은 곽가가 되어 있다. 악의의 문제다. 어차피 나갈 채비도 한 거, 사과하러 가야겠다 일어서서 성 안으로 갔다. 그러나 상회를 차마 못 들어가고 빙글빙글 거리를 돌았다. 상회 건물의 근방만 계속해서 하염없이 돌다가 결국 술집으로 샜다. 정작 앉아보니 또 술을 잔뜩 마시게 된다. 버릇이 무섭다. 의자에서 일어나기가 싫다. 원래 이런 일 가지고 사과 안 하는데. 자꾸 순욱에게 휘둘리고, 쓸데없이 그이 생각을 하고 온갖 걸로 눈치를 본다. 또 머리가 찌뿌둥해지는 느낌에 잔에 술만 채웠다. 따르고 비우고 반복하다 보니 결국 밤이 되었다. 가게로 근방 영감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기로 인한 호기가 돌긴 했지만 곽가는 나름 맨정신이었다. 상회 담벼락에 기대서서 사람들이 나가는 것을 흘겨보았다. 거의 다 나갔겠다, 싶을 때 고개를 쭉 내밀어 안을 보았다. 순욱이 1층으로 나와 창을 걸어 닫고 있다. 안을 정리 중이다. 곽가는 스스럼없이 걸어 들어가 순욱이 자길 발견할 때까지 문 아래 서 있었다.

“아.”

발견되기는 금방이었다. 낮게 소리를 낸 순욱의 표정이 살갑지가 않다. 물건 몇 개를 챙겨 품에 끼더니 따라오라고 한다. 곽가는 말없이 위층으로 쫓아갔다. 들어가는 대로 따라가 보니 지난번 곽가가 기절했을 때 있었던 그 방이었다. 순욱이 자기 집무실로 쓰는 모양이다. 안을 보니 전에 누웠던 긴 좌석에는 방석이 열 맞추어 놓여 있고, 묘하게 낡은 책장이 놓여 있으며 전체적으로 담배 냄새가 만실했다. 순욱이 좌석으로 가 앉아 한숨을 쉰다. 순욱이 탄식하는 꼴을 너무 많이 봐 곽가는 이제 그의 버릇까지 외웠다. 한숨 쉴 땐 눈썹만 찌푸리고 얼굴은 구기지 않는다. 아무튼간 저러는 걸 너무 많이 보았다. 수그려 앉으니 더 작아 보이는 좁은 등이 보였고, 시선을 내리자 통통한 손안에 들린 해지고 해진 장부가 눈에 들어왔다. 곽가가 곧장 아침의 폭언을 사과한다. 사죄를 들은 순욱이 손을 오그려 쥔다.

“아뇨, 내 잘못입니다.”

머리라도 아픈지 혼자 이마를 한참 문지른다. 곽가는 그냥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난 그저.. 정말 아쉬웠어요. 솔직히 말해 소저의 성격도 여성이니 흠결이지, 사내였다면 좋은 담력으로 보였을 겁니다.”

손에 든 책만 계속 만지작거리던 순욱은 그걸 옆에 내려놓았다. 한참을 혼자 괴로워하더니 어렵게 말을 튼다.

“사실 무슨 생각까지 했냐면.”

곽가 양이 남자였다면 내 집에 들이고 싶었습니다. 하고 짧게 던진 얘기에 곽가는 얼굴을 있는 대로 다 찌푸렸다. 못 알아듣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영리했다. 머리가 좋고, 사지와 기관이 다 붙어 있고, 생긴 것이 준수하고 무엇보다도 친족이 없고 신분이 낮으니 자기 애를 낳기 위해 정을 뽑을 남자로 골랐을 거란 소리다. 순간 너무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 턱끝까지 덜덜 떨렸다. 나는 계집애야. 그래도 사람인데. 어째서 끌고 갈 만한 개 취급을 하는지? 순욱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고는 있을까?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자신에게 인정받았으니, 부끄러운 얘기라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라는 듯한 표정이다. 지겨운 분노가 심장을 터지도록 쥐어짜 댄다. 어차피 지주댁 자식이다. 이런 식으로 진작 모욕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평민들은 그저 자기들이 누리는 것의 파편만 떼어줘도 고마워하며 평생 살 거라고 생각을 한다. 혀를 자르고 팔다리를 묶어 상자 안에 가둬도 그 안으로 던져주는 의복과 식량을 고마워하라고 할 종자들이다. 너무나도 화가 났으나 소리치거나 때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다 대고 무슨 소릴 했는지는 아셔야 한다. 순욱의 멱살을 잡아채 자리에 확 깔아눕혔다. 무릎을 올려 배를 짓눌렀다. 좌석에 올려둔 장부가 툭 떨어져 구른다. 삽시간에 누운 채 붙들린 순욱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내가 맘에 드셨다 이거에요? 남자면 좋겠고?”

밀착한 곽가의 숨에서 따가운 술 냄새를 맡아낸 순욱이 더욱 당황한다. 소저, 하고 얕게 부른다.

“자, 잠깐. 그런 게 아니라. 잠시만. 이러지 말아요.”

아랑곳 않고 목덜미의 옷을 뜯어내자 순욱이 겨우겨우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해요!”

몸을 떼어낸 곽가는 바로 서서 숨을 돌렸다. 힘겹게 일어나 앉은 순욱이 애걸한다.

“여, 여색을 밝히는 거야 이젠 알고 있어요.”

헌데 난 여인이 아니에요, 제대로 된 여인이 아니니까 제발 이상한 짓 하지 말아요. 그러면서 식은땀 난 얼굴로 떠는데 겁탈하지 말라며 애원하는 것이 더욱 여인 같고, 힘없어 보였다. 곽가는 땀범벅이 된 뺨과 눈을 쓸어내렸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다. 눈꺼풀을 감고 양손을 늘어트렸다. 순욱은 쉽게 차분해진 얼굴로 금방 옷매무새를 다듬었지만, 단추를 쥐며 손끝을 떨었다. 곽가는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아 순욱을 올려다보았다.

“절 고발하실 건가요.”

“아니요.”

대답이 빠르다.

“취한 것 같으니 돌아가서 쉬도록 해요.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화나게 한 것 같네요.”

진짜 그러려던 건 아니었죠? 나만 우습게 됐군요. 말에 깔린 믿음에 곽가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머리를 쓸어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고 방문을 잡아당겼다. 뒤에서 부른다.

“저어, 있잖아요.”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칭찬하고 싶었어요. 순욱은 그런 짓을 당하고도 온순하게 말을 걸었다. 곽가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알아요.”

얇은 문틀에 애써 시선을 맞추었다. 눈이 뜨겁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가 더럽게 군 것 뿐이죠.”

견딜 수가 없어 몸을 빠르게 빼내고 문을 닫았다. 거친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부적한 인간이라 부적하게 살았다. 어디에 정을 붙인 적도 없었다. 정나미가 없었으니 의미가 없었다. 이는 길가의 흙조각같은 삶이다. 왜 자꾸 자신을 주워 올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를 꽉 깨물고 거리를 걸어나갔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이제는 말을 들어드리기로 했다.

감상은 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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