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튀김
Somewhere there is a rainbow for…
7 min readJun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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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순욱의 자택으로 향하던 곽가는 들판 외곽을 바라보았다. 간밤 큰불을 질렀던 자리는 벌써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어제는 순욱의 지시로 썩은 것들과 썩을 것들을 저곳에 모아 불태웠었다. 워낙 잡벌레가 창궐해 불을 키우려고 집어넣은 짚더미에서도 온갖 벌레가 튀어나와 곽가는 멀찍이 서서 구경만 했다. 모든 것이 타자 흙이 불을 먹어 새카매졌다. 그 흙과 재를 모아 물길 없는 곳에 묻었다. 그러나 간밤 불을 태운 자리마저 또 빗물이 고여있다. 길가를 걸을 뿐인데 신발에 진흙이 붙는다. 지겹다고 생각하며 곽가는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을 데리고 오늘 내로 이곳에 와라.”

그를 찾아 자리에 앉자마자, 난데없는 소리다. 곽가는 어깨를 으쓱이며 무슨 얘기냐고 물었다. 순욱 얘기로는 전염병이 더 커지기 전에 안팎 왕로를 막으려고, 관청에서 조만간 성문을 폐쇄할 예정이라 한다.

“언제요?”

“글쎄. 그 사람들 내킬 때 하겠지.”

씁쓸한 어투로 순욱이 말했다. 지역 유지인 순가 영향이 워낙 센 곳이다 보니, 관리들은 뭘 남겨 먹거나 행사하기 힘든 이곳을 굳이 힘들여 다스리지 않는다. 공시 없이 난데없이 일하는 경우가 잦았다. 곽가가 한번 사양한다. 순욱은 역시나 일언반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곽가도, 곽가의 아버지도 몸이 약하니 여기에 와서 몸을 사리는 게 어떠냐는 입장이다. 곽가는 또 거절했다. 노쇠하신 몸이라 성안까지 걸어오는 것만으로 큰 부담이다.

“변덕쟁이들이 언제 성문을 닫을지 몰라. 오늘 저녁일 수도 있고, 일주 후일 지도 몰라. 언제 다시 열지 나조차 모른다.”

그리고 순욱은, 자신을 한동안 못 보아도 괜찮냐고 물었다. 곽가는 한 번 더 사양하려던 말을 삼켰다.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우선 노부에게 설명을 드렸다. 곽가의 아버지는 딱히 사정을 이해한 것 같지 않았지만, 알았다며 자식이 하자는 대로했다. 간단히 옷가지만 하나 싸들고 나갈 채비를 했다. 못 본 사이에 멀쩡했던 등이 살짝 굽은 곽 씨는 무척이나 힘겹게 걸었다. 곽가도 천천히 걸어갔다. 겨우 초저녁 내로 성문 앞에 도착하자, 거기엔 이미 관리가 보낸 듯한 사내 몇이 문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이 닫히진 않았다. 곽가는 눈치 보지 않고 지나가려 했으나, 그들이 이내 막아 세웠다. 사는 곳과 이름을 묻기에 말해줬다. 행색을 한번 쓱 훑어본다. 지금은 신원이 확실한 자만 들여보낸다며, 사라지라 한다. 곽가는 자기가 순 가의 상회에서 일하고, 신원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얘기했으나, 그저 볼품없는 노인네를 대동, 초라한 차림을 한 계집애 따위의 막무가내로 보일 뿐이었다. 자기 혼자였다면 평소같이 욕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병든 아버지를 여기까지 오시게 했다. 소득 없이 기운만 축내고 돌아가긴 싫었다. 순욱이 한 소리도 맘에 은근히 걸렸다. 결국 계속 붙어서 떠들자 귀찮다며 툭 떠밀렸다. 곽가는 이를 꽉 깨물고 진정을 했다. 이 사람들도 맡은 일이 있으니 이러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최대한 설명을 하려고 했다. 그 와중 뒤에서 아버지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져 말이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순욱의 이름을 대었다. 그랬더니 일이 악화되었다. 안 믿는 것은 물론, 수상한 취급을 당했다. 대체 무슨 용무로 이런 시기에 그렇게나 안에 들어가고 싶어하는지, 똑바로 말하라며 목덜미를 개처럼 쥐고 질질 끌어간다. 노부가 와 놓아달라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내 여럿에겐 상대도 안 되었다. 옷에 목이 졸려 캑캑거리는 사이 질질 끌려 곁문까지 왔다. 근처에는 곧 뭐라도 세우거나 묻을 작정인지 큰 구덩이가 두셋 파여 있고, 사방이 흙더미와 벽돌로 어질러져 있다. 또 한 번 성 내로 출입하려는 의도를 묻는다. 사실대로 얘기했다. 순 가 도련님이 부르셔서 방문하러 간다. 그랬더니 거짓말도 좀 제대로 대라며 마구 비웃는다. 점점 화가 났다. 대문 쪽에선 여전히 실랑이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가겠다며 성질을 부리자 다시 한 번 목덜미가 잡혔다. 수상하니 잡겠다며 동료에게 큰 소리로 전한다. 저쪽에서도 알았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곽가를 근처의 구덩이 중 제일 깊은 곳에다 걷어차 넣었다. 비명도 못 지른 채 떨어져 들어갔다. 입에 들어간 흙을 고통과 함께 뱉어내고 있자니 이젠 문지기들이 다 아버지와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이다 싶어 퍼뜩 일어섰다. 곽가는 돌아가라며 아버지를 향해 소리 질렀다. 알아서 하겠다며 제발 집에 가라고 소리쳤다. 먼저 집에 가라고 몇 번을 얘기하자 바깥의 소란이 그쳤다. 돌아간 모양이다. 곧 문지기 하나가 와 관청에 넘기게 내일까지 여기 있으라고 말했다. 하나가 더 와 곽가를 보고 조소했다. 얼굴을 믿고 대충 부잣집 도련님 이름을 댄 모양인데, 순 가 아드님은 천한 여자까지 끌어들일 사람이 아니라고. 골라도 잘못 골랐다며 비웃었다. 알지도 못하는 게 떠들어대니 곽가는 욱하는 심정뿐이었다. 애써 침착하게 목을 한껏 뻗어 부탁했다. 나가게 해달라 했으나, 그들은 용변은 알아서 하라며 대문으로 돌아갔다. 분노에서 나온 땀이 등을 흐르는 게 느껴졌다. 곽가는 양손을 뻗어 기어오르려 했다. 키가 커서 가능할까 했지만, 계속된 비로 흙이 속까지 물러져 다 부서져 내렸다. 나갈 수가 없었다. 머리와 몸에 붙은 흙을 털어냈다. 굴러떨어지자마자 억지로 일어나고, 계속 소리를 질러서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기운 없이 흙에 몸을 기대고 꺼내달라며 바깥으로 계속 말을 걸었다. 대답 같은 건 없었다. 띄엄띄엄 그러기도 몇 시간, 기운이 다해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파낸 지 얼마 안 되는 흙구덩이 특유의 비린내가 싸했다. 젖은 흙에 등을 지고 있었더니 옷감이 얕게 젖었다. 등에 붙은 것들도 털어내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팔다리는 진흙투성이에, 떨어지며 어디 긁혔는지 팔등이 쓰렸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속절없이 한밤중만 되었다. 바깥에 횃불이 일렁이던 것도 꺼지고 인적도 다 사라진다. 사방이 깜깜하게 되었다. 곽가는 풀리지 않는 긴장과 분노로 몸을 수그린 채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이번엔 분별없이 화를 내거나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곱게 사정을 말했는데. 제대로 듣지도 않고, 들으면 거짓말 말라고 응징이 돌아왔다. 아무도 믿어주질 않는다. 뭘 어떻게 해도 순욱이 바로 옆에서 챙기지 않으면 자신은 늘 바보같은 꼴을 본다. 억울하고 괴롭다. 평생 그랬으나 그래도 너무나 분하다. 갑자기 정수리에 떨어진 찬물에 곽가는 고개를 들었다. 새벽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밤공기와 토양의 찬 기운에 떨던지라 절대 반갑지 않다. 그것도 이런 구덩이 속이다. 몸을 일으켜 비를 덜 맞으려고 가장자리에 붙었다. 부질없이 비는 더 자락자락 맘대로 내리기 시작해 꽤 긴 빗발이 흙 굴 속까지 내리쳤다. 금방 머리끝까지 다 젖었다. 밑바닥에도 물이 차기 시작했다. 흙탕물이 금방 발목까지 올라왔다. 숨을 내쉬니 하얀 김이 선명하게도 보인다. 끔찍해 하며 곽가는 추위로 몸을 덜덜 떨었다. 젖은 머리와 옷을 짜내어 봐도 오락가락하는 비가 다시 다 적셔놓는다. 그렇게 추워하자, 열이 나다 못해 몸에 김이 오를 정도로 한기가 팔다리를 다 잡고 흔들었다. 찬물에 어쩔 수 없이 고여놓은 양발은 발목뼈가 다 시리고 아팠다. 귀와 코가 빨갛게 되어 이미 감각이 없고 냄새와 소리도 흐릿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새벽을 간신히 버텼다. 이른 아침이 되어 사람 소리가 간간이 몇 번 들렸다.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해도 빗속을 서서 밤새운지라 겨우 목소리의 남녀만 구분되었다. 흙벽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해 겨우 기대 서 사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와중에 누군가 여기 왔었냐는 내용이 들리고, 유난히 어색한 어조라 더욱 익숙한 목소리가 하나 들렸다. 순욱이라 생각하고 목소리를 냈다. 뭘 얘기할 정신도 없어 그저 여기, 여기라고 간절히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냐며 얘기하는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얼굴마저 익숙한 그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마주치자 그의 안색이 새파래진다.

“당장 꺼내주시오!”

순욱이 대동한 하인인 듯한 사람이 손을 내밀었으나, 그걸 잡을 기운도 없어 팔을 뻗자마자 비실비실 주저앉았다. 순욱이 보기 드물게 화내는 어조로 말하자, 문지기 하나가 아예 구덩이 안으로 기어들어와 쓰러져있는 곽가를 업어올려 바깥사람들이 건져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찌 된 거냐며 순욱이 채근하고, 문지기 들은 너무 당혹해서 정말이었느냐는 소리만 저들끼리 했다. 순욱이 하인 입을 통하지 않고 직접 그들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고 누구 명령으로 와서 이렇게 일하고 있냐고. 분명 고소하려는 것이다. 해코지는 물론이고, 비싼 율사를 사서 죄질의 열 배 천 배도 더 받게 하는 것 쯤이야 순욱에겐 간단하다. 그자들은 말을 못했다. 오금이 저리는지 갑자기 확 쪼그라든 그들을 보자니 한심하고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곽가는 죄다 노려보았다. 문지기고 하인이고 순욱이고 성벽이고, 모두 쳐다보았다. 모든 일이 부질없고 그저 추웠다. 눈을 감아버렸다. 순욱이 다가와 잡았는지, 손에 익은 부드럽고 더운 촉감이 손에 감겨왔다. 예사스럽지 않게 몸이 찬 것을 보고 순욱이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얼굴을 외우려는지 순욱은 문지기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지나갔다. 하인이 부축해 곽가를 걷게 하는데, 순욱도 걱정스러운지 자기도 손을 뻗어 도울 듯 망설이다 결국 그만둔다. 그 모습을 곽가가 힐끔 본다. 아예 먼저 가길 권해봤다. 추문이라도 날 법한 이 수상쩍은 꼴을 더 보이지 말고 가 버리라 하자 순욱이 얼굴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그 표정 그대로 잠깐 고심한다. 결국, 그럼 먼저 가 몸 녹일 것을 준비하겠다며, 순욱이 정말 먼저 가버렸다. 곽가는 진흙투성이가 된 채 하인과 함께 힘들여 걸었다.

별채 뒷문에 도착하자마자 모포에 싸여 욕실로 끌려갔다. 거의 끓다시피 한 뜨거운 물로 몸을 씻겨주자 갑자기 녹은 살갗이 간질거렸다. 핏빛이 올라와 빨갛게 익은 얼굴을 한 곽가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평상시와 다르게, 씻겨주고 말려주고 입혀주는 시중을 얌전히 다 받아들였다. 머리를 털어주는 대로 몸이 다 흔들거렸다. 콜록거리며 순욱의 방에 가자 그가 오만상을 다 한 채 찻그릇을 데우고 있었다.

“벌써 다 씻었구나.”

걱정스럽게 보며 다관에 물을 붓고 찻잎을 넣는다. 자리에 앉았는데도 몸이 이리저리 기우는 것을 흘끔 본 순욱이 말한다. 차만 한잔 마시고 가서 누워라. 잠시 후 따라주는 차에 억지로 입을 댔다. 팔을 후들대니 순욱이 혼자 한숨을 쉰다. 무슨 일이었냐고 물어, 마시는 간간이 이야기를 해줬다. 어찌 그딴, 하면서 순욱은 불쾌해 했다.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나요.”

곽가는 기침을 하느라 말을 잠시 멈췄다.

“언니가 나에게 뭘 시키고, 사람들은 나를 믿지 않고. 그러다 언니가 나타나면 덜덜 떨구요. 나만 병신이 된 것 같죠.”

쿨럭거리느라 찻물을 입에서 흘렸다. 소매를 써 엉거주춤 닦아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그자들은 내가 처벌하마.”

“그러시든지…”

기침 하느라 자꾸 찻물을 뱉어낸 곽가는 결국 반만 빈 잔을 내려놨다. 멍한 얼굴로 순욱의 침대에 가 누웠다. 순욱이 와 이마에 손을 댄다. 열이 있는 것 같다고, 의원을 부르자고 한다.

“되었어요.”

자고 싶어요. 그런 말로 베개 밑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하고 나직하게 대답이 돌아온다. 따뜻하고 동그란 손끝이 귓가를 약간 만지다 사라진다. 곽가는 잠에 빠졌다.

자면서도 온몸이 아픈 것을 느껴 깰 듯 말 듯했다. 그러다 얼굴에 젖은 천이 오가는 감각에 곽가는 눈을 떴다. 순욱이 뺨을 닦아주던 참이었던 듯, 손수건을 구겨 쥐고 있다. 일어났냐며 곧장 조곤조곤 말을 건다. 뭐 하던 거냐고 얼굴을 문질렀다.

“자면서 눈물 콧물 투성이던걸.”

제가요? 그럴 리가. 곽가는 잔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순욱이 잡아 말린다.

“더 누워 있어. 자는 동안 춥진 않았어? 배고프진 않아? 허기가 있으면 우선 좁쌀죽에 노른자를 풀어줄테니 좀 먹지 그러니?”

걱정하는 것이야 고맙지만 아버지가 걱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얘기를 했더니 사람을 시켜 소식을 전할 테니 그냥 여기 있으라고 한다. 곽가는 가라앉고 쉰 목소리로 그러라 했다. 잠이 깨고 보니 확실히 관절과 근육이 아프고, 머리에서 열이 나는 듯 이마가 무거웠다. 벽에 몸을 기대고 있자 순욱이 하인을 시켜 죽을 가져오게 한다. 아까 말한 대로의 죽이 나오고, 그걸 들고 온 시녀 한 명이 일일이 떠먹여 줄 듯 수저를 들이민다. 입맛이 싹 사라져 곽가는 그냥 기운없이 고개만 저었다. 별수 없이 탁자에 두게 시키고 하인들은 다 물러났다. 깨어나서도 곽가가 계속 기침만 밭게 하자 순욱은 곤란한 듯 죽을 둔 탁자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의원…”

“됐어요.”

곽가가 다시 잘 듯 몸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힘없이 그러는 모습에 순욱이 와서 잠시 손등을 만지작거린다. 아직도 살이 차다. 곽가의 차가운 손등을 들어올려 자기 뺨을 대 따스하게 한다. 곽가는 실눈만 뜨고 기진맥진한 투로 말을 했다. 감기 들 것 같으니 많이 만지지 말고, 저녁이 되어도 자기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따로 주무시라고. 순욱이 동그란 눈을 접어가며 찬찬히 웃는다.

“나는 건강해.”

뭐든 안 옮을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려놓고 이마를 만진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는 곽가를 안 보는 날이면 본채에 있는 자기 방에서 자고 있다고 한다. 신경 쓸 것 없이 푹 자라며 살랑이는 장막을 쳐 주고, 창을 손수 닫는다. 마지막으로 문까지 잘 닫고 나가는 모양을 보고 나서야 곽가는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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